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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테러지원국 해제:
미국 패권의 균열이 낳은 부시의 굴욕

미국이 결국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했다. 사실, 그동안 숱한 침략 전쟁을 하고, 제3세계에서 우익 반군·테러리스트들의 학살과 파괴행위를 지원한 사상 최악의 테러지원국인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규정한 것 자체가 위선이었다. 미국은 자신의 패권을 유지하는 데 이용하려고 자의적으로 이 목록을 작성했다.

북한이 이 명단에 오르게 된 계기는 1987년 김현희의 KAL기 폭파 사건 때문인데, 이에 대한 정확한 진상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우파들은 이제 북한이 테러지원국에서 해제됐으니 본격적인 시장 개혁과 개방에 나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동안 빗장을 건 것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문은 밖에서 잠겨 있었던 것이다. 자유시장이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주장하던 미국은 정작 북한의 WTO·IMF 등 국제기구 가입을 막아 왔고, 2002년 북한이 ‘시장주의적’ 개혁에 나섰을 때도 이를 무시했다. 미국의 진보적 외교정책 전문가 존 페퍼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당나귀 일화에서처럼 북한이 당근을 잡으려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당근은 늘 같은 거리에서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존 페퍼, 《남한 북한》)

그러나 이번에는 북한이 미국에게서 당근 한 개를 잡아챌 수 있었다. 애초 부시는 테러지원국 해제 합의를 미루며 시간을 벌어 보려 했지만, 시간은 부시의 편이 아니었다.

북한은 미국의 합의 이행이 지지부진하자 불능화 작업을 중단했고, 곧 국제원자력기구 요원에게 출국을 요구했다. 심지어 북한은 2차 핵실험에 나설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렇게 되면 5년을 맞은 6자회담은 사실상 붕괴하고 미국의 위신은 추락할 터였다.

부시는 브루킹스 선임연구원 마이클 오핸런의 푸념대로 “[유화책을 쓰든 강경책을 쓰든]뭘 해도 손해”인 진퇴양난의 상황에 몰렸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지배자들은 심각하게 분열해 있었다. 유엔 핵 사찰단원으로 지난해 북한을 방문했던 데이비드 올브라이트는 미국의 검증안이 “북한의 군사시설을 정탐할 권리”를 달라는 것이며 “어느 주권국가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결국, 부시는 파국보다는 민망한 후퇴를 택했다. 〈뉴욕타임스〉는 테러지원국 해제가 “부시에게는 드라마틱한 순간”이라고 했는데, 사실 부시에게는 굴욕적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부시가 “악의 축”이라고 지목한 북한이 바로 부시에 의해 핵까지 보유한 ‘정상국가’가 된 셈이다. 게다가 철저한 검증 없이 테러지원국 해제는 없다고 큰소리 친 게 불과 몇 주 전이니 민망함이 더 할 것이다.

“98퍼센트 북한의 승리”라는 네오콘 존 볼턴의 분노에서 보듯이, 이번 합의안의 내용은 명백히 부시의 패배다. 부시는 대선을 앞두고 오바마에 유리한 ‘이적행위’를 했다는 조롱까지 받았다.

백악관 대변인은 “미국이 추구했던 모든 요소가 핵 검증 패키지에 포함됐다”며 우파들을 달래려 했지만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다.

핵심 쟁점이던 미신고 시설에 대한 사찰은 북한의 동의를 거쳐야만 가능해졌다. 신고된 시설에 대한 검증을 먼저하고 고농축우라늄 문제 등 미국이 의혹을 제기하던 미신고 사항에 대한 검증은 나중으로 미루자(이른바 분리검증)는 것인데, 이는 결국 지난번 합의를 반복한 것이다. 그때와 다른 것은 미국이 실제로 테러지원국 해제에 나섰다는 것뿐이다.

여전히 멀고도 험난한 길

이번 검증안 합의로 북미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가 보장된 것은 아니다. 어려운 문제는 다시 뒤로 미뤘고, 따라서 본게임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당선이 유력한 오바마는 이번 테러지원국 해제조처를 지지하면서도 “만약 북한이 철저한 검증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에너지 지원을 중단하고 최근에 철회한 제재를 다시 가하며 새로운 제재를 검토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시료 채취 문제도 모호하게 처리됐는데, 그동안 북핵 협상에서 이런 모호성은 나중에 문제를 원점으로 되돌리곤 했다.

게다가 테러지원국 해제가 자동으로 북한의 세계체제 편입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미 국무부는 우파들의 반발을 의식해 마약, 위폐 관련 등 19개의 제재가 아직 남아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테러지원국 해제는 상징적 의미는 크지만, 당장에 북한에 가장 필요한 해외차관 도입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북한이 테러지원국 해제와 함께 아시아개발은행 가입을 희망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1996년에 미국은 북한이 4자회담에 참가하는 대가로 아시아개발은행 가입 보장을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일본이 북한의 신청서를 거부했고 미국은 이를 방조했다.

무엇보다 남한, 일본 등 주변국들이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있는 현실 자체가 북한핵의 완전한 폐기를 어렵게 만들 것이다. 핵무기는 북한 지배자들에게 생존 수단이기 때문이다.

왜 부시는 고개를 숙이게 됐을까

한규한

일부 사람들은 핵실험 등 북한의 강경 대응이 이번 ‘승리’의 원동력이라고 보지만, 이는 일면적인 분석이다. 사실, 초보적 수준의 북한핵 자체는 미국에게 위협이 못된다. 재래식 군사력은 말할 것도 없다.

핵심은 미국 패권 전반의 위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수렁에 빠져 있다. 최근 미 국방장관이 “탈레반과도 협상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미국은 고전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 미국을 강타한 경제 위기는 가뜩이나 지나치게 확장돼 있는 미국의 군사적 능력을 제한하고 미국의 위신을 추락시키는 요인으로 떠올랐다. 이런 상황이 북한에 숨 쉴 공간을 넓혀 준 것이다.

김정일 와병설이 한창이던 시기에 미국의 양보조처가 나왔다는 점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시기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당시 미국은 김일성 사망으로 인한 동북아 불안정을 우려해 북핵 위기를 봉합하는 제네바 합의에 나섰다. 얼마 전 존 페퍼는 “[김정일] 정권 몰락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혼란이야말로 예측 불가능성을 극대화하는데 미국은 그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북한을 6자회담에 묶어 두고 여전히 핵 폐기 프로세스가 작동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주변국에 던지기 위해 부랴부랴 양보했던 듯하지만, 이는 또 다른 모순을 낳았다.

일본은 납치자 문제를 무시한 채 테러지원국 해제에 나선 미국에 배신감을 공공연히 표출하고 있다. 이런 반응은 자민당·민주당을 가리지 않았다. “미국에 의존하려 한 것이 잘못”(민주당 간사장 하토야마 유키오)이라는 것이다.

배신감

남한 우파들도 미국에 대한 분노를 보이고 있다. 〈조선일보〉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긴] … 원칙없는 양보”라고 한탄했고, 이회창은 “핵을 가진 북한을 머리에 이고 사는 … 재앙의 시대가 열[렸다]”고 미국을 비난했다. 물론 대북 강경태도이던 이명박은 뻘쭘하게 부시의 조처를 지지한다고 했지만 말이다.

이래저래 미국은 위기관리 능력 저하를 감추지 못했고, 패권에 대한 의구심만 키우는 꼴이 됐다. 따라서 북미 유화국면 속에서도 동북아시아에서 긴장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는 북미 유화국면이 자동으로 동북아시아의 평화로 연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이 벌이는 제국주의적 경쟁과 상호견제, 군비증강이 이 지역의 불안정과 긴장의 진정한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북한핵을 통한 북미관계 정상화 강제하기’가 동북아시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일각의 주장은 공상이다. 동북아시아에서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국제적 차원의 반전·반제국주의 운동을 건설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