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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 직면할 모순

전임자들의 취임식과 마찬가지로, 노무현의 대통령 취임식은 ‘전직 대통령’들이 참석하고, 축하차 미국과 일본의 고위 관리(베트남전 당시 미라이 마을 학살 책임자 콜린 파월과 몇 주 전 신사 참배한 고이즈미)들이 참석했다. 취임사도 으레 그렇듯 “안정 속의 개혁”, “평화”, “번영” 따위 번지르르한 추상어로 가득했다.

하지만 노무현 취임식은 일반 시민들이 대거 참석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새 대통령에 대한 평범한 사람들의 기대와 희망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새 내각에 강금실·김두관·이창동 씨들이 포함된 것과 이 파격 인사의 배경을 대통령이 직접 새 각료들에게 설명하는 것도 이채로웠다. 다른 분야의 일부 보수적 인사는 이 파격 인사에 가려 묻혀 버린 듯하다.

전에 노무현은 사람들이 자기를 링컨에 빗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링컨에 대해 책을 쓰기도 했다.

물론 노무현이 묘사하는 링컨은 “민주주의”에 대해 유창하게 연설하는 링컨이지, 다음과 같이 말한 링컨은 아니다. “나는 흑인과 백인의 사회·정치적 평등을 어떤 식으로든 가져오는 데 찬성하지도 않고, 찬성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가난한 청년이 자수성가해 서민의 애환을 이해해 줄 지도자가 됐다는 입지전 신화는 의미심장한 공통점이다. 이 신화에서는 개혁을 통해 1980년대의 악몽은 치유될 것이고, 따라서 그 시대의 ‘불가피한’ 전투성은 이제 참된 의미의 주류 사회 안으로 편입돼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파격 인사에서 보듯) 새 세대의 정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취임 초기의 개혁 이미지가 하도 강력하고 이회창의 수구 보수적 이미지와는 하도 달라서, 두 달 전에만 해도 노무현에게 아무런 환상도 갖지 않았던 〈다함께〉 애독자조차 현실을 망각하는 순간 심리적으로 표류할지도 모른다.

현실인즉, 그의 개혁은 가령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입법’을 하겠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의 요체인 정치적 견해 표명의 완전한 자유 불허를 그대로 놔두고 조금 손질만 한 채 이름을 바꾸는 것이다.

또한 대공장 노동자의 해고가 쉽지 않아 문제라고 한다. 미국 기업인들에게 “해고가 쉬워지게 하겠다”고 약속하기까지 했다.

진정한 개혁―착취와 억압을 완화하는 조처―과 거리가 먼 노무현이 왜 이처럼 개혁의 정치적 상징을 사용하는가?

첫째 이유는 1980년대 말 운동의 유산이다. 그 운동은 1989∼91년 옛 소련 블록의 붕괴를 사회주의의 종말로 오해한 당시 좌파의 사기 저하와 방향감각 상실 때문에 1990년대 초중엽 침체를 겪었음에도 한국 사회에 지워지지 않은 흔적을 남겼다.

그 운동은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을 위해 투쟁했다. 중간에 겪은 침체 때문에 아직 운동은 진정한 민주주의에 훨씬 못 미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또 민족 통일에 훨씬 못 미치는 대북 화해·협력 정책을 위한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그리고 운동은 급진적인 좌파와 함께 온건한 중도파(중도 좌파를 포함해)를 위한 공간도 확보했다. 물론 급진 좌파에 대한 국가 탄압과 옛 소련 붕괴의 즉각적 여파로 지금까지는 후자의 공간이 더 많이 확보됐다.

무엇보다 그 운동은 노무현의 사회적 기반인 자유주의 자본가들과 자유주의 포퓰리스트 중간 계급을 위한 공간을 확보했다. 물론 이들을 위한 공간은 지배 계급(여전히 재벌 중심인)의 실제 권력에 견주면 여전히 부차적이다.

게다가 이제 노동계 지도자들마저 새로 국정(國政)에서 일정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수 있게 됐다. 이 기대가 어느 정도 충족될지는 경제 상황이 앞으로 얼마나 나빠지느냐에 달려 있다.

노무현이 자신의 실체와 모순되는 정치적 상징으로 개혁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둘째 이유는 성장하는 노동자 계급 운동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민주화의 동력이 노동자 계급 조직임을 강조했다.

일부 현대 필자들(D 뤼시마이어 외, 《자본주의 발전과 민주주의》, 박명림 외 옮김, 나남, 1997년)도 19세기 후반부 노동자 계급의 자주적 조직 덕분에 보통선거권, 국가 기구가 의회에 책임을 지는 것, 시민적 자유권 등이 성취됐음을 지적했다.

전두환 군사 독재를 무너뜨리고 노태우 정부 →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 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권위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로의 전환’을 강제해 온 것은 1987년 6∼9월 투쟁과 1996년 12월 26일∼1997년 1월 중순 투쟁이 두 차례의 폭발점이었던 노동자 운동이었다.

이것은 개혁가를 표방하는 포퓰리스트 노무현에게 압력을 의미하고, 그는 이 압력을 반영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이 압력을 행동으로는 반영할 수 없다. 그래서 이미지로 반영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환상을 자극한다. 행동은 그 환상을 산산이 부술 것이다.

그 한 가지 결과는 쓰라린 환멸이고, 다른 한 가지 결과는 분노의 폭발일 것이다.

물에 빠지면 짚이라도 잡는다는 말처럼 우리가 노무현 개혁에 희망적 해석을 가하다가는 당황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