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경제 위기에 맞서 싸운 전 세계 노동자 투쟁의 사례와 교훈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번이 그 세 번째다.


1997년 동아시아를 휩쓴 경제 위기는 끔찍한 고통과 함께 저항과 반란도 낳았다. 그런 반란이 가장 진척됐던 인도네시아에서는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나 수하르토 30년 독재를 끝장냈다.

수하르토는 1965년 쿠데타를 일으켜 민족주의 지도자 수카르노뿐 아니라 인도네시아공산당 활동가와 사회 운동·소수민족 운동 단체 활동가 2백만 명을 학살하며 집권했다.

수하르토는 냉전 시대 친서방 노선을 걸으며 인도네시아의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해 미국 시장에 자국 상품을 대거 수출할 수 있었고, 일본 자본들의 투자를 유치했다. 덕분에 인도네시아의 고도성장이 정점에 달한 1980년대에는 연평균 성장률이 6퍼센트를 넘었다.

30년 독재

경제 성장의 과실은 거의 전적으로 정부 고위 관료와 그들과 결탁한 자본가들에게 돌아갔다. 특히, 수하르토 가족들은 공공사업을 독점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해 한때 그들의 자산은 4백60억 달러에 달했다.

동시에, 인도네시아에서는 불평등한 체제를 뒤흔들 힘을 가진 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에 약 8천6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전국의 공장과 사무실에 고용돼 있었고 그들 중 2천만 명은 주요 도시의 대형 작업장에서 일했다.

1990년대 중반, 인도네시아 경제는 다른 동아시아 경제들과 비슷한 문제에 봉착했다. 지배자들은 수출 시장의 지속적 팽창을 예측하고 엄청난 외자(그 중 상당액은 단기 부채였다)를 도입해 투자했지만,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것이 대규모 고정자본 투자에 따른 이윤율 하락 경향과 결합되면서 인도네시아 경제는 문제에 봉착했다. 그 결과 1997년에 금융 위기가 발생해 많은 공장이 문을 닫았고 임금 체불과 실업 문제가 발생했다.

IMF의 개입은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1998년 초 IMF의 요구에 따라 16개 부실 은행이 폐쇄되자 화들짝 놀란 국제 투기꾼들은 순식간에 돈을 빼갔고 외환위기가 폭발했다. 1998년 상반기에 매달 노동자 2백만 명이 해고됐고 실질임금이 거의 50퍼센트나 줄었다.

수하르토는 위기를 정면 돌파하려 했다. 그는 1998년 3월 자신이 새 대통령으로 ‘재선’됐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을 듣고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경찰과 충돌했다. 이것은 도시 빈민들에게 큰 자극을 줬고, 일부 대공장 노동자들도 급진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수하르토가 IMF의 요구인 연료 가격 70퍼센트 인상을 발표하자 분노가 폭발했다.

초기에는 분노가 소수민족인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났다. 분명, 화교 자본가들이 인도네시아 자산의 70퍼센트를 소유했지만, 대다수 화교들은 평범한 노동자·서민이었다. 수하르토와 측근 인사들은 경제 위기의 책임을 화교들에게 떠넘기면서 공격을 부추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분노의 초점은 점점 수하르토와 그 측근들로 옮겨갔다. 물가인상에 항의하고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행동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

영문 주간지 〈인사이드 인도네시아〉는 이렇게 말했다. “연일 계속되는 시위로 부패한 관료들이 궁지에 몰렸다. 농민들은 수하르토에게 빼앗겼던 토지를 되찾았다. 각종 정당·노동조합·반부패 단체 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IMF와 서방 지배자들은 당황했다. 수하르토의 용도는 다했다. 결국, 5월 21일 군부의 압력으로 수하르토가 사임했다. 사람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거리를 뛰어다녔다.

그러나 친수하르토 인사인 하비비가 임시 대통령이 되고 손에 피를 묻힌 군부 인사들이 주요 장관으로 임용되면서 다시 한 번 폭발의 가능성이 열리는 듯했다. 이때 수카르노의 딸 메가와티가 구원 투수로 나섰다. 메가와티는 시장주의자였다. 그는 대중의 희생을 통해 인도네시아 경제를 ‘원상복구’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정치적 대안을 제시해야 할 인도네시아 좌파들은 심각하게 분열했다. 게다가, 그들은 한 가지 잘못된 정치적 가정 ─ 계급연합(국민전선) ─ 을 공유하고 있었다. 좌파들은 군부 독재의 부활을 막기 위해 자유주의 부르주아들과 연합하는 것을 일차적 과제로 삼았다.

흩어진 분노

덕분에 노동계급 내에 존재하던 엄청난 분노가 정치적 초점을 찾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1999년 중반 총선을 전후로, 인도네시아의 상황은 ‘정상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인사이드 인도네시아〉는 이렇게 말했다. “1999년 6월 총선은 개혁 열망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 대중의 초점은 거리에서 의회로, 행동에서 법 제정으로 이동했다. … 개혁 운동은 역동성을 잃었다.”

물론 1998년 노동자·민중의 영웅적 투쟁으로 인도네시아는 훨씬 민주적인 사회가 됐다. 노동조합이나 사회단체 활동가들은 좀더 쉽게 공개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그러나 2002년까지 실업률은 30퍼센트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고 평범한 노동자들의 임금은 여전히 생활필수품을 사기에도 턱없이 모자랐다.

노동자·빈민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단지 악당 수하르토를 제거하는 것뿐 아니라, 지배자들의 경제 권력과 이를 비호하는 국가 권력 자체에 맞서 싸우는 것이 필요했다. 1998년 투쟁은 인도네시아 민중, 특히 노동자들이 충분히 그럴 잠재적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