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위기가 심각해지는 요즘,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10년 전 IMF 때를 돌아보게 된다. 그때는 전국적으로 “국가경제가 살아야 내가 산다”며 금모으기 운동을 강조해 많은 사람들이 결혼 예물, 아기 돌 반지를 아주 싸게 내놓았다.

내가 있는 현대차 울산공장에서도 회사 측은 공장 내 모든 소모품을 삭감하기 시작했다. 야간 근무 때 난방 시간, 안전화, 안전모 등을 줄이거나 없앴다. 그러면서 첫째로 정리해고된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었다. 비정규직 2천여 명은 ‘소모품’처럼 내쫓겼다.

이어서 회사 측은 각 공장별 순환휴무를 실시했다. 처음에는 평균임금의 70퍼센트를 지급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무급으로 순환휴무가 실시됐다.

부부사원이나 형제가 함께 회사를 다니는 경우는 정리해고 1순위였다. 부부나 형제에게 두 명 다 해고되기 싫으면, 한 명은 정리해고, 또 한 명은 무급휴직하라고 협박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우선 해고됐다. 공장 내 20여 개 식당에서 근무하는 여성 조합원 1천여 명 중 1백여 명만 남고 모두 강제로 ‘희망’퇴직했다.

결국 회사 측은 1998년에 5천여 명의 정리해고 명단을 노동부에 신청했다. 사측은 정리해고 통보서(일명 노란봉투)를 조합원 개개인에게 전달했다. 노란봉투를 받은 조합원들이 관리자들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공장의 모든 생산이 중단됐고 노동자들이 36일간 공장을 점거해 파업을 벌였다. 조합원들은 정문에 승용차와 컨테이너, 산소통 등을 쌓아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사수대 5백여 명이 공장을 순회하면서 사무실 관리자들과 악질 노무관리자들을 공장 밖으로 쫓아내 버렸다. 식당 여성 조합원들과 가족들은 매일 아침 정리해고 반대 구호를 외치며 공장을 순회했다.

아주 뜨거운 여름에 벌어진 점거파업은 노동자들의 엄청난 힘을 보여 준 싸움으로 나는 기억한다.

그런데 그해 8월 말쯤 노조 지도부가 “정리해고 철회가 아니라 정리해고 최소화를 인정하고 협상해야 한다”며 정부안을 수용해 부분적인 해고와 무급휴직을 받아들였다. 많은 조합원들이 집행부에 항의했지만 투쟁은 그렇게 일단락됐다. 그러나 이 합의안은 조합원 총회에서 부결됐다.

IMF 때의 고통과 투쟁은 아직도 많은 현대차 노동자들의 가슴속에 기억되고 있다. 당시 비정규직부터 겨냥한 공격의 칼날은 결국 정규직에게로 향했다. ‘회사 살리기’가 아닌 단호한 파업만이 우리의 일자리를 지켜 줬다.

파업으로 5천여 명의 정리해고를 막아낸 것은 성과였지만, 막판에 식당 여성 조합원 등 3백여 명의 해고와 2천여 명의 무급휴직을 수용한 것은 뼈아픈 잘못이었다.

이러한 교훈을 명심한 채 다시 찾아 온 경제 위기에 맞서 잘 싸워야 한다. 지금 현대차 울산 2공장에서는 차량 단종으로 사내 협력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1백15명이 해고될 처지다. 10년 전의 교훈을 잊지 말고 비정규직 해고 반대 투쟁에 정규직이 연대해 함께 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