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 경제에 대한 장하준의 분석에서 출발점은 박정희식 재벌 육성 정책(선별적 산업 정책)에 대한 옹호다. 그는 IMF 위기가 발생한 것은 이 정책이 한계에 도달해서가 아니라 탈규제 정책, 금융자본주의(주주자본주의) 등의 도입으로 국가와 재벌의 연결고리가 깨졌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장하준은 IMF 이후 양극화 심화도 금융자본주의의 확산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금융자본의 투기 활동으로 재벌들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주주 배당금 확보에 몰두하면서 투자가 줄었고, 성장률이 하락하면서 비정규직이 확산되고 양극화가 심화했다는 것이다.

그는 성장률이 다시 고도성장기 평균(8~9퍼센트)으로 돌아가야 복지국가[사회보장제도] 등 진보적 정책을 펼 조건이 형성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장하준은 자신을 “성장주의자”로 규정하면서 무엇보다도 재벌 “기업의 경영권을 안정”시키는 등 재벌에 대한 양보 조처를 도입해 재벌 투자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 재벌들은 친재벌 정책에 대한 ‘보답’으로 노동자들에게 복지국가를 선사할까? 장하준은 재벌은 “‘투자한 돈만 돌려받으면 우리 나갈게’ 하는 식으로는 못하기 때문에 노동자들과 타협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국민’ 전체를 대표해 국가가 나서서 타협을 중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장하준이 재벌의 투자, 즉 자본축적을 한국 자본주의의 원동력으로 본 것은 체제의 성격을 올바르게 파악한 것이다. 국가가 자본축적 과정에서 핵심적 구실을 한다는 것도 현실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다. 또, 복지국가 성립이 자본축적이 활발한 호황기에 상대적으로 더 쉽다고 주장한 것도 맞다.

그러나 활발한 자본축적이 가능한 조건에 대한 그의 주장은 너무 단순하다. 또, 진보적 정책을 쟁취하기 위해 어떤 행동이 필요한지에 대한 문제에서 모호하거나 잘못된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일단 경영권을 보장하면 재벌들이 고도 성장기만큼 적극적으로 투자할 거란 주장은 사실과 맞지 않다. 자본축적에는 특정한 제도보다 더 근본적인 요인인 이윤율과 세계 시장의 상황이 있다(그 중에서도 이윤율이 더 중요하다). 국가 개입이나 제도 변화를 통해 이윤율 위기에 처한 기업들의 생명을 잠시 연장시킬 수는 있지만 체제 전체의 이윤율을 쉽사리 끌어올릴 수는 없다.

사실, IMF 이후 한국의 자본축적률이 예전보다 떨어지고 동시에 성장률도 하락한 것은 주주자본주의의 효과라기보다는 이윤율이 예전 수준보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상당수 재벌들은 배당금을 내느라 허덕이기는커녕 막대한 사내 유보금을 쌓아 놓은 채 투자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불황이 심각해지고 있다. 재벌들은 복지국가의 도입에 반대하거나 제한을 둘 것이다. 이것은 이윤에 목을 매는 모든 자본가들의 매우 자연스런 반응이다. 이런 상황에서 장하준은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장하준은 최근 이런 주장을 했다. “신자유주의적 금융발전 전략을 포기[하고] 지나치게 개방된 자본시장을 다시 규제[하고], 기업의 배당과 자사주 매입을 규제하여 기업 이윤을 실물투자로 돌려야 한다. … 내수를 진작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비정규직을 줄이고 복지제도를 강화하여 국민들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

성장

자본시장에 대한 규제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옳다. 그러나 불황이 심화될수록 기업 이윤 중 투자로 가는 몫은 갈수록 적어질 것이다. 비정규직을 줄이고 복지제도를 확충하자는 그의 주장은 매우 훌륭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성장이 없는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장하준은 여러 책과 기고문, 인터뷰에서 1930년대 공황기에 복지제도를 도입한 스웨덴의 사례를 본받자고 주장했다. 사회적 타협을 통해 “파업을 안 하게 되면서 이익이 발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장하준은 불황기를 경쟁력을 강화하는 기회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스웨덴에 복지국가가 도입된 것을 사회적 타협에 따른 생산성 향상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

먼저, 당시 스웨덴은 운 좋게 수출을 늘릴 수 있었다. 스웨덴은 중립국이었고 다른 나라에서 군비가 팽창하면서 스웨덴 상품 수요가 늘었다. 그러나 한국은 당장 수출 증가율이 추락하고 있고 상황이 호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한국이 스웨덴처럼 거의 로또 수준의 행운을 누릴 거라 기대하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다.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1920년대 스웨덴의 치열한 계급투쟁이었다. 사실, 계급투쟁과 복지 제도 발전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세기 독일 우파 총리 비스마르크가 최초로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한 것도 노동자들과 사회적 타협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치열한 투쟁에 대한 대응이었다. 심지어 제2차세계대전 후 유럽에서 복지국가가 확대될 때도 전쟁으로 급진화한 노동자들에 대한 대응의 성격이 있었다. 영국의 한 정치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저들에게 복지를 주지 않으면 저들은 우리에게 혁명을 선사할 것이다.”

장하준도 때때로 이런 점을 인정한다. “[스웨덴 복지국가는] 1920년대 치열한 갈등 덕분에 등장했다.” 그러나 그는 기층 투쟁이 중요하다고 결론내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노동자들은 “타협하고자 하는 마인드를 갖는 것이 필요”하고, 국가가 타협을 중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하준은 투쟁을 통한 급진적 변화에 반감이 있는 것 같다. “전통적으로 보면 우파는 점진이고 좌파는 급진인데, 저는 그런 측면에서는 우파거든요.”

기층 투쟁

그래서 아시아 국가들의 IMF 위기에 대한 서로 다른 대응을 논의한 1998년 〈LA타임스〉 칼럼에서 장하준은 인도네시아 같은 혁명적 대중 항쟁을 “사회적 위기가 심화”한 부정적 사례로 언급했다. 반면, 한국 김대중 정부의 등장은 그런 갈등을 피할 수 있는 기회로 보며 기대를 보냈다. 김대중은 확실히 대중의 인내를 종용하는 데 오랜 야당 정치인으로서 정치적 자산을 사용했다. 그러나 결과는 복지국가가 아니라 불평등과 비정규직 확대였다.

물론 장하준은 김대중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 즉, 경제 위기 때 국가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도출하지는 못했다. 국가는 오직 기층 투쟁의 압력이 거셀 때만 그에 반응해 양보를 내놓는다.

결국 장하준이 목표로 삼는 유럽 복지국가라는 것은 성공적인 자본주의 축적·성장과 치열한 계급투쟁이 결합돼 등장한 것이었다. 따라서 지금 상황에서 한국에 사회적 타협을 도입하면 이것이 가능할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경제 위기 때 복지국가를 목표로 삼는 기층 투쟁을 고무하는 것은 여전히 필요한 일이다. 당장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양보 조처를 따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설사 당장 물질적 양보를 얻지 못하더라도 기층 투쟁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도전하는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장하준이 운동으로 표현되는 대중의 고통에는 동정적이면서도 운동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앞으로도 지배자들의 각종 시장주의 정책을 비판할 때 그의 저작은 유용할 것이다. 또, 복지국가가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광범한 대중적 공감을 얻을 만한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장하준의 대안은 지금 경제 위기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 지침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