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지난 6주 남짓 세계 자본주의를 휩쓴 엄청난 경제 위기 말고 다른 주제로 글을 쓰기가 무척 힘든 달이었다. 특히 이 위기가 이제 한국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다른 모든 신문과 마찬가지로) 〈저항의 촛불〉도 이미 이 위기를 분석하고 있을 것이므로 나는 여기서 전반적 설명보다는 현 상황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논평을 몇 마디 하는 선에서 그치려 한다.

위기가 심화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웃고 싶기도 하고 울고 싶기도 했다. 서방 지배계급들과 그들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대변자들이 모순에 빠지고 망가지는 것을 보면 웃음이 나왔다. 그들은 지난 20여 년 동안 그토록 확신을 갖고 숭상해 온 경제 학설들을 죄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전 세계 근로 민중과 빈민들에게 닥칠 것이 불 보듯 뻔한 고통과 불행을 생각하면 나는 울고 싶어졌다. 저들은 자신들이 부른 위기의 대가를 우리가 치르기를 바라고 있다.

웃기는 일들은 많았다. 예컨대,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를 추구해 온 조지 부시의 우파 정부가 모기지 업체인 프레디맥과 페니메이를 인수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국유화를 단행한 데 이어 일련의 국유화 조처들을 실행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 그렇다. 그러나 그런 조처들은 … 사회주의 아닌가? 사실,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일 뿐이다. 그러나 몇 달 전이었다면 부시 일당은 그런 조처들을 사회주의라고 비난했을 것이다.

영국에서 특히 재미있었던 것은 영국 정부의 한 입으로 두 말 하기였다.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정부가 아일랜드 은행들의 예금을 지급 보증해 준 것에 대해 (그러면 사람들이 영국 은행들에서 돈을 빼내 아일랜드 은행들로 옮길 것이므로 아일랜드 정부의 조처는 시장을 왜곡하는 불공정 경쟁이라고) 불평을 늘어놓은 바로 다음날 아이슬란드 정부가 아이슬란드 은행들이 파산했을 때 영국인들의 예금을 보호해 주지 않았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미국 연방준비은행 총재를 지냈고 자유 시장의 교황 노릇을 했던 앨런 그린스펀이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결함”이 있었다고 시인했다. 사실, 리먼브러더스·AIG·메릴린치·HBOS·와코비아 ─ 이들은 수백 년 동안 축적과 착취를 자행해 온 자본주의의 거인들이자 세계의 지배자들이었다 ─ 가 잇따라 무너지거나 살려달라고 국가에 비는 것을 보면서 일종의 희열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저들의 곤혹스러움 뒤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현실적 고통이 뒤따를 것임을 알고 있다. 임금 삭감과 해고, 실업과 빈곤, 주택 압류와 강제 퇴거 ─ 이런 것들이 경기 침체의 필연적 결과다. 복지 혜택 삭감과 교육·의료 등 사회 복지 사업의 축소 ─ 이런 것들이 머지않아 자본주의 정부의 대책이 될 것이다. 가난한 나라들에서는 굶주림과 물자 부족 사태가 벌어질 것이고, 개발도상국들에서는 발전이 주춤하거나 일부 개발도상국들은 아예 붕괴할 것이고, 심지어 가장 부유한 선진국들에서도 노동계급은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결함

웃다가 울다가 하면서 괴로워하는 사이에 17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이 떠올랐다. “웃지도 말고 울지도 말라. 다만 이해하라!” 그래서 이 위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점 세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첫째, 지금의 위기는 자연 재해나 기후 재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린스펀은 이 위기를 “1백 년 만에 한 번 닥칠 만한 쓰나미”로 묘사했다. 그리고 주류 언론들도 “경제적 태풍”, “[경제적] 허리케인” 운운하는 말들로 넘쳐난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소리다. 지금의 위기는 결코 자연적인 것도 아니고 신의 섭리도 아니다. 이 위기는 순전히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 위기는 개략적이나마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고, 실제로 크리스 하먼이나 로버트 브레너 같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이 예측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린스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런 경제 위기들은 “1백 년 만에 한 번”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되풀이된다.

둘째, 이 위기는 근본적으로 신뢰의 위기가 아니다. 자본주의 언론과 언론의 평론가들은 항상 이런 위기들이 근본적으로 투자가들, 투기꾼들, 심지어 제조업자들의 신뢰 문제라고 주장하려 한다. 때때로 그들은 “근본적인 실물 경제는 건전하다”는 진부한 말로 교묘히 빠져나가려 한다. 물론 신뢰가 일정한 구실을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 여러분이 은행 파산을 우려한다면 은행에서 돈을 찾으려 할 것이고, 그래서 은행 파산 가능성을 더욱 높일 것이다. 만약 어느 회사에 대한 투자 수익률이 낮을 것으로 예상된다면 여러분은 다른 회사에 투자하려 할 것이고, 만약 전반적인 경기 침체가 예상된다면 여러분은 십중팔구 돈을 금으로 바꿀 것이고 그래서 경기 침체의 기간을 늘리고 정도를 심화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신뢰’나 신뢰 부족은 밑도 끝도 없이 제멋대로 마구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신뢰는 허공에 떠돌아다니다가 투자자들의 마음속으로 갑자기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증거와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예컨대, 신용 경색의 시발점이 된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의 문제들은 단지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문제들이 아니었다. 실제로 모기지 상환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의 현실적 문제였다. 그리고 모기지 대출업체들의 관점에서 보면, 주택 시장 위축 국면에서 압류 주택을 유리한 조건으로 팔 수 없게 됐다는 현실적 문제였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이 이룬 큰 성과 중 하나는 모든 부의 창출이 궁극적으로 노동을 자연에 적용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과 모든 [교환 ─ 지은이] 가치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의 지출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점이다. 증권 거래, 헤지펀드, 환투기가 난무하는 저 높은 세계의 가격들이 이 현실의 물질적 가치들로부터 너무 멀어지게 되면, 머잖아 다시 되돌아가게 돼 있다. 마치 고무줄이 늘어났다가 줄어들 듯이 말이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세 번째 요점인즉슨 지금의 위기가 단지 월스트리트 등의 탐욕스런 은행가들이나 금융업자들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말은 은행가들이나 금융업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분명히 탐욕스런 자들이고, 그들의 탐욕은 위기의 동역학을 이루는 중요한 구성요소다. 그러나 분명히 해 두자. 그들이 최대한의 이윤을 가차없이 추구했을 때 그들은 엑슨과 셸, 월마트와 삼성 등 제조업·소매업·기타 모든 업종의 자본주의 기업들이 추구하는 것과 똑같은 논리, 즉 자본주의 고유의 경쟁 논리를 추구했을 뿐이다. 이를 두고 마르크스는 “축적을 위한 축적”이라고 말했다. 은행들의 과잉 대출은 호황기에 과잉 생산이 나타나는 일반적 경향의 변형일 뿐이다. 이런 경향도 이미 오래 전에 마르크스가 지적한 바 있다.

이윤율

더욱이 현재 위기의 뿌리는 단지 금융 부문이 아니라 이른바 ‘실물’ 경제에 닿아 있다. 영국에서는 영국 경제가 3사분기에 이미 후퇴하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는 통계 수치들이 막 발표되고 있다. 3사분기라면 금융 붕괴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금융 위기를 촉발하고 앞서 말한 신뢰 상실을 불러일으킨 것은 분명히 ‘실물’ 경제의 문제들이었다. 특히, 전반적인 평균 이윤율이 최근에 저하한 것이 근본적 문제였다.

이 세 가지 신화 ─ 위기를 자연 재해로 묘사하거나 신뢰 상실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거나 탐욕스런 은행가들 탓으로 돌리는 것 ─ 의 이면에는 정치인들과 주류 언론과 따분한 전문가들의 욕구가 숨어 있다. 그들은 붕괴의 원인을 체제의 상대적으로 피상적인 측면들에서 찾으려 하거나 자본주의 자체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분석을 어떻게든 피하려 한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 우리는 칼 마르크스가 스피노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1845년에 “철학자들은 세계를 이렇게 저렇게 해석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하고 썼다. 현재 상황에서 세계를 변혁한다는 것은 두 가지를 뜻한다. 하나는 노동계급을 동원해서 해고, 임금 삭감, 주택 압류, 복지 삭감, 세금 증가 등 앞으로 벌어질 온갖 공격에 맞서 저항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궁극적으로 벗어나는 길은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이윤이 아니라 필요를 위한 생산 체제로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것뿐임을 이해하는 운동과 정당을 건설하는 것이다.

존 몰리뉴는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책갈피),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