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9일, 박노자 씨는 경제 위기로 인해 중국과 러시아 등이 미국을 최상부로 하는 현재의 제국주의 위계질서에 도전하면서 지정학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썼다.

나는 이에 동의하면서도, 각국 지배계급 간 세력관계뿐 아니라 국제 반전 운동과 노동계급의 단결을 통한 국제적 저항의 가능성도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을 써서 박노자 씨의 글에 링크해 뒀다.

이에 대해 박노자 씨는 〈레디앙〉 기고를 통해 “자본주의적 계산에 철저하게 길들여진 … 서구 민중에 대한 낭만적 꿈”을 버리라고 조언했다.

나아가 그의 반박 글은 러시아 혁명의 사례를 들어 혁명 과정에서 발생할 폭력으로 인해 평범한 다수의 삶이 강간과 유아살해 등으로 범벅이 될 것처럼 묘사하며 ‘혁명보다는 급진적 개혁이 바람직하다’는 것으로 결론 맺고 있다.

그러나 그의 러시아 혁명 묘사는 부당하다. 박노자 씨도 “1917년 혁명의 진실한 모습을 배웠다”며 극찬한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러시아 혁명이 소수의 음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의 적극적 지지를 연거푸 획득하면서 진행됐음을 보여 준다.

또, 혁명 과정에서 폭력이 나타나는 것은 지배계급이 혁명의 위협 앞에서 순순히 양보하기보단 폭력을 동원해서 혁명을 꺾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 싸우지 않을 때 오히려 더 많은 피를 보게 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반동 세력을 분쇄할 기회를 놓친 19세기 파리 코뮌과 20세기 독일·스페인의 경험은 반혁명의 잔인한 결과를 보여 준다.

박노자 씨는 또 서구 민중은 “원한과 분노”가 잘 축적돼 있지 않기 때문에 투쟁과 혁명에 나설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본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낳은 “원한과 분노”는 제3세계뿐 아니라 시애틀(1999년), 제노바(2001년)에서 투쟁으로 폭발했다. 프랑스 최초고용계약법 반대 투쟁(2006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들춰낸 미국 사회의 계급 모순과 영화 〈식코〉가 보여 주는 미국 의료체계의 문제는 “[서구의] 피지배계급이 자본/국가 체제에 대단히 잘 포섭”돼 있다는 주장을 무색케 한다.

카트리나

끝으로 그는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며 금융기업 국유화, 무상 의료·무상 교육, 각종 부유세 징수, 대학 평준화와 남북한 공동 군축 등을 언급한다. 그런데 이런 과제들은 개혁주의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다함께’가 제시한 ‘더 나은 삶을 위한 주요 요구들’도 이러한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요구들을 어떻게 쟁취하느냐는 것이다. 박노자 씨는 “이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고서도” 이러한 요구들이 “국민적으로 선택되어지면” 나아갈 수 있다는 듯 얘기한다. 그러나 이런 “대단히 급진적인” 요구들을 한국의 지배계급이 “국민적 선택”만으로 순순히 들어 줄 리 없다.

이러한 요구는 지난 촛불 항쟁과 같은 대규모 투쟁으로 지배계급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때에만 실현 가능하다. 그 투쟁이 발전하게 되면 자본주의 질서 회복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더욱 멀리 투쟁을 밀고 나갈 것인지 택해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아직도 변혁을 꿈꾸는 노동자가 박노자 씨에게

김우용(기아차지부 소속 금속노조 중앙위원)

박노자 씨는 〈레디앙〉에 기고한 ‘서구 민중에 대한 낭만적 꿈 버려라’라는 글에서 ‘다함께’ 회원들을 “대체로 도심 중산계층의 가정에서 곱게 커 배고픔 한 번 겪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며 “‘혁명’을 이야기할 때에 과연 그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머리가 아닌 피부로 아는지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하고 썼다. 나는 이것을 읽고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박노자 씨의 이런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박노자 씨가 정말로 “‘혁명’까지 외치는 다함께 분들의 열정을 존경”한다면 최소한 사실관계는 알아 보고 이런 주장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다함께의 고참 활동가 대부분은 20여 년 가까이 사회변혁 운동에 헌신해 온 사람들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탄압(국가보안법)으로 투옥됐던 사람들도 있다.

신념

또 다함께 회원 중 절반 이상이 노동자고 그 중 상당수가 노동조합원이다. 나처럼 20년 가까이 대공장 노동자로 노동조합 운동과 사회변혁 운동의 결합을 주장하며 싸우다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경험이 있는 노동자 회원들도 있고, 비정규직으로 살면서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투쟁하는 회원도 다수 있다.

물론 젊은 청년과 학생 회원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박노자 씨의 주장처럼 ‘배고픔을 모르고 살아온 중산층의 자녀’라고 단정 지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중산층의 자녀들은 머릿속으로만 혁명을 느낀다’는 주장을 맑스·엥겔스·레닌·트로츠키 같은 ‘중산층’ 또는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혁명가들이 듣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혁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급진적 개혁이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박노자 씨의 주장에 나는 이견이 있지만 그렇다고 박노자 씨를 ‘중간 계급 교수이자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박노자 씨의 강연도 들어 본 적이 있고, 저서도 한두 권 읽어 본 바 있다. 해박한 지식과 민중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명쾌한 비판을 듣고 읽으며 내심 존경해 왔다.

박노자 씨가 주장하는 급진적 개혁의 요구들도 지지하며 함께 투쟁해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다. 그러나 박노자 씨가 다함께 회원들을 함께 운동하는 동지라 생각한다면 근거도 없이 비방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