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다함께(노동자연대의 전신)가 2003년 6월에 펴낸 팸플릿의 전문이다.


“우리에게는 이스라엘 군대를 공격할 무기가 없다. 우리가 가진 것은 빼앗긴 땅 위의 돌과 저들의 총알과 로켓 포탄을 맞을 맨 몸뿐이다.”

― 2000년 10월, 나블루스 라페디아 병원의 의대생 사민 다비


이스라엘, 제국주의, 팔레스타인 항쟁 앤 알렉산더 지음, 이수현 옮김

목차


제2차 팔레스타인 항쟁 [목차로]

“우리는 충격을 받았다. 여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하다. 이 지역을 둘러보니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하고, 가는 곳마다 죽음의 냄새가 진동했다.”

― 2002년 4월 18일 유엔 특사 테르예 뢰드-라르센이 예닌 난민촌에서 기자에게 한 말.

2002년 3월 29일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은 “방패 작전”을 개시했다. 수백 대의 탱크가 요르단강 서안 지방 전역의 팔레스타인 도시와 마을을 점령했다. 샤론은 침략군을 지원하기 위해 예비군 3만 명을 소집했다. 그 뒤 몇 주 동안 이스라엘 병사들이 요르단강 서안 지역을 철저히 짓밟았다. 샤론은 “테러리스트를 찾기 위해서”라고 둘러댔다.

그 뒤 봉쇄당한 도시에서 끔찍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시체가 거리에 널려 있다거나, 부상당한 남자들과 비무장 상태의 남자들이 처참하게 처형당했다거나, 이스라엘의 무장 불도저들이 집을 파괴하는 바람에 부녀자와 노인들이 생매장을 당했다거나, 민간인들이 물·음식·전기·의약품도 없이 살아간다는 등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예닌 난민촌은 대부분 잿더미로 변했다. 팔레스타인인 소식통은 난민촌에서 수백 명이 살해당했다고 말했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유엔 진상조사단이 학살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이런 대학살에도 불구하고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샤론을 “평화 애호자”라고 추켜세웠고,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는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에게 “테러”를 단속하라고 요구했다.

예닌의 공포는 방패 작전 배후에 있는 진정한 동기를 밝히 보여 주었다. 그것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철저히 파괴하려는 것이었다.

2002년 3월 동예루살렘의 베이트 하니나에서 23살의 팔레스타인 청년 마흐무드 살라가 이스라엘 경찰에 체포된 지 30분 뒤 즉결 처형당했다.

침공의 도화선은 3월 27일 네타냐에서 발생한 자살 폭탄 테러였지만, 2002년 4월 초의 사건들은 [2000년 9월부터] 당시까지 1천2백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생명을 앗아간 이스라엘의 억압 가운데 최근의 일일 뿐이다.

2000년 9월 예루살렘 알 아크사(Al-Aqsa) 사원을 방문하면서 새로운 인티파다*를 촉발한 장본인이 바로 샤론이었다. 그 방문은 모욕을 주기 위해 계산된 행동이었다. 샤론은 1982년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난민 수천 명이 학살당한 사건에 책임이 있는 자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평화 협상이라는 이름으로 서서히 진행된 식민지화 과정을 이미 여러 해 동안 참아 왔다. 그 평화 협상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알 아크사 사원에서 시위를 벌이던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군대가 발포하자 요르단강 서안 지방과 가자 지구 전역에서 저항이 폭발했다.

2001년 초 아리엘 샤론이 선거에서 승리한 뒤, 봉기에 대한 이스라엘의 대응은 훨씬 더 잔혹해졌다. 샤론은 재판 없는 처형 정책을 추진했다. 이것은 이스라엘 정부 대변인들이 말했듯이 “표적 살인”이었다.

여러 차례나 정전 협정을 위반한 것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저지른 암살 사건들이었다. 이런 암살은 군사적 대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저지른 짓이었고, 이것은 이스라엘 군대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재점령하기 위한 좋은 구실이 됐다.

이스라엘의 F-16 전투기들은 3톤짜리 폭탄들을 팔레스타인 지역에 투하했다. 아라파트는 라말라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 갇혔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 식량, 희망을 상실함에 따라 팔레스타인 경제는 산산조각 났다. 바로 이 때문에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자살 폭탄 공격을 감행하게 됐다. 그들은 쇼핑센터나 식당에서 이스라엘 민간인들을 공격하면서 자신을 희생했다.

예닌의 공포는 미국이 중동 평화를 위해 애쓰고 있다는 주장이 거짓임을 다시 한번 보여 주었다. 대량 학살이 절정에 달했을 때 미국 국무장관 콜린 파월은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군대가 미제 무기로 난민촌을 산산조각 내는데도 파월은 아라파트가 자살 폭탄 공격을 중단시키기 위해 충분한 조치들을 취하지 않는다며 비난했다.

이 갈등의 뿌리는 팔레스타인인들의 “테러리즘”이 아니다. 이 갈등은 수천 년 동안 지속해 온 인종 갈등도 아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슬람이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아랍 각국의 공동체에서 살고 있었다. 이들 공동체 대부분에서는 수백 년 동안 아랍계 무슬림들이 기독교도 이웃들과 평화롭게 살았다.

자본주의와 근대 유럽의 국민 국가가 발전하면서 시온주의* 운동이 탄생했고 아랍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이 생겨났다. 반유대주의가 성장하자, 초기 시온주의 선구자들은 유럽 안에서 박해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그러나 인종 차별주의에 대한 방어적인 대응을 억압적인 세력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바로 시온주의와 제국주의의 동맹이었고, 이는 지난 80년 동안 계속됐다.


이스라엘에 대한 제국주의의 이해관계 [목차로]

19세기 말 세계 열강이 군사적·경제적 경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면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이 공격적인 제국 건설의 시기에 거대한 지역이 유럽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됐다.

자본가들은 자국 정부에게 원료, 영토, 새로운 시장의 원천들을 장악하도록 촉구했다. 제국주의라고 부르는 이 경제적 경쟁 체제는 전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제국주의가 중동 지역을 어떻게 구획했는지 이해하지 않고서는 중동에서 이스라엘의 역할을 파악할 수 없다. 특히 한 상품 때문에 중동 민중은 수십 년 동안 식민 지배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 귀중한 자원은 현대 자본주의의 생명수인 석유였다.

제1차세계대전 때 영국은 페르시아 만의 유전 지대를 지배하는 것이 경제적·정치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중에 브리티시 피트롤리엄(BP)이 된 앵글로-페르시아 석유회사는 1908년에 이란에서 석유를 발견했다. BP, 셸, 독일의 도이체 방크는 1914년에 이라크의 석유를 개발하기로 합의했다.

무너져가던 오스만 제국이 제국주의 열강의 분할 지배를 방해하고 있었다. 영국의 전략가들은 현지의 아랍 족장들에게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면 독립을 얻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영국의 진정한 의도가 드러난 것은 러시아의 혁명 정부가 비밀 조약들을 폭로했을 때였다. 그런 조약에는 중동을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권으로 분할하는 계획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영국 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팔레스타인에 식민지 정착민들의 국가를 건설하면 중동에서 영국의 석유 이권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뒤 수십 년 동안 자본주의의 석유 의존도는 더욱 커졌다. 오늘날 자동화된 사회의 전체 구조는 값싼 석유를 무제한 공급받는 데 달려 있다.

영국 제국의 힘이 쇠퇴하자, 양대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과 소련이 중동과 그 부존 자원을 지배하기 위해 한판 붙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식민지 지배자가 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는 1880년대와 달리 그다지 단순하지는 않았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민족 해방을 요구하는 대중 운동이 아랍 세계를 휩쓸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은 이란의 팔레비 왕정 같은 부패한 정권들을 후원했고, 중동에서 서방의 “경비견”이 되겠다고 약속한 신생 이스라엘 국가에 막대한 군사·경제 원조를 제공했다. 미국의 처지에서 보면, 미국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이스라엘은 이 지역에서 결정적인 안전판이었다. 어떤 반제국주의 대중 운동도 감히 이스라엘에 도전할 수는 없었다.

1967년 6일 전쟁은 이스라엘의 가공할 군사력을 입증했다. 일주일이 채 못 돼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 군대를 굴복시켰다. 이집트는 1973년 전쟁에서 또 패배한 뒤 미국·이스라엘과 타협하는 길로 나아갔다. 1980년 이집트 지도자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캠프 데이비드 평화 협정에 서명했는데, 이 덕분에 이집트는 중동에서 미국의 두 번째 종속국 이란을 대신할 수 있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석유 이윤을 지키겠다는 미국의 단호한 태도는 1991년 걸프전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미국은 회유와 협박을 통해 전례 없이 많은 아랍 나라들을 반이라크 동맹에 끌어들였다. 그 전쟁으로 30만 명의 이라크인이 죽어야 했다. 뒤이은 경제 봉쇄로 50만 명 이상이 죽었는데, 주로 다섯 살 미만의 어린이들이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했다. 그는 신세계질서를 네 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뜻대로 되는 것.”

21세기의 자본주의는 여전히 중동의 석유에 의존하고 있다. 화석연료가 초래한 환경 오염이라는 재앙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석유 소비는 증가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전 세계 석유 생산에서 중동산 석유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더욱 커졌다.

다국적 석유회사 셰브런의 부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중동은 우리 산업의 심장이다. 그리고 그 중요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갈 것이다. 세계 석유 매장량의 3분의 2와 세계 가스 매장량의 3분의 1이 중동에 있다. 이 수치도 파악된 매장량일 뿐이다.”

21세기의 제국주의는 그 부를 부자와 권력자의 수중에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할 것이다.


시온주의와 유대인 국가 [목차로]

19세기 말에 많은 유대인들은 서유럽 사회에 중요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150여 년 전에 일어난 위대한 혁명들은 유대인의 삶을 억압했던 중세 사회의 낡은 법률과 관습을 많이 폐지했다.

그러나 두드러진 소수 집단이었던 유대인들은 막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인종 차별주의에 취약했다. “인종”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낸 이론가들은 유대인을 열등한 집단이라고 비난했으며, 종교적인 반유대주의의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를 썼다.

제정 러시아에서는 짜르의 비밀경찰이 부추긴 반유대주의 폭동으로 수천 명의 유대인이 대량 학살당했다. 수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서유럽으로 탈출한 다음 미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서유럽에서도 반유대주의가 번지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유대인 장교였던 알베르 드레퓌스가 조작된 혐의 때문에 간첩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고위 군 장교들이 반유대주의를 부추겼다.

오스트리아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이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은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된 것은 바로 드레퓌스 사건 때문이었다. 1896년 그는 〈유대인 국가〉라는 소책자를 출판하는데, 여기서 그는 박해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유대인들이 독자적인 국민 국가를 건설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처음부터 헤르츨은 유대인 국가 건설이 제국주의와 인종 차별주의에 도전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이었다. 그는 시온주의자들이 제국주의의 힘을 이용해 유대인들의 식민지를 개척해야 하며, 이 식민지는 “아시아에 대항하는 유럽의 성벽 일부이며, … 야만주의에 대항하는 문명의 전초 기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뒤 50년 동안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제국주의 열강에게 이 계획을 후원해 달라고 설득하는 데 열을 올렸다. 영국 정부에서 일했던 과학자 카임 바이츠만은 시온주의를 영국의 중동 정책과 연결시키는 데서 핵심 구실을 했다.

영국의 정치인들은 시온주의자들을 후원하면 영국이 중동을 지배할 수 있는 식민 세력을 창출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바이츠만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인들을 경멸했다. 바이츠만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아랍인들에 관해서 영국인들은 거기에 수십만 명의 깜둥이들이 있지만 중요하지 않다고 내게 말했다.”

팔레스타인 가옥들을 파괴하는 “임자 없는 땅” 만들기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영국 정부는 1917년 밸푸어 선언*에서 시온주의자들의 제안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 뒤 몇 년 동안 점점 더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시온주의 신화에서 이것은 “땅 없는 사람들에게 임자 없는 땅”을 제공한 것이었다.

사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중동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에 속했다.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수백 년 동안 이 곳에 살면서 농사를 지었다. 자파 주변의 오렌지 과수원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경작한 것이었다. 1880년경 해마다 3천만 개 이상의 오렌지가 팔레스타인에서 유럽으로 수출됐다. 팔레스타인의 기독교도 공동체들도 이 곳이 자신들의 종교적 기원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1918년에 유대인 정착민은 5만 명이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은 약 50만 명이었다. 1939년이 되면 유대인은 44만 3천 명으로 늘어났고 팔레스타인인들은 1백만 명으로 증가했다. 처음에 유대인 정착민들은 아랍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매입하고 아랍 농부들의 노동에 의존했다. 나중에 도착한 시온주의 활동가들은 경제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배제했다. 이들은 유대인들만의 “노동조합”인 히스타드루트를 조직했다. 이 히스타드루트의 슬로건은 “유대인의 땅, 유대인의 노동, 유대인의 상품”이었다. 테러는 이 이념을 더 강화했다. 시온주의 활동가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가게를 공격하고 그 물건들을 못쓰게 만들었다. 유대인 기구[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정착을 지원하는 기구—옮긴이]는 지주들에게 땅을 팔도록 강요했고, 소작농들은 강제 추방당했다.

이스라엘 건국 직후 고향에서 쫓겨나 피난길에 나선 팔레스타인 난민들

1936년에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가 폭발해 거대한 총파업이 일어났다. 각계 각층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이 파업에 참가해 대규모 시민 불복종 운동을 벌였다. [영국] 당국은 탄압으로 대응했다. 영국은 시온주의 활동가들을 모아 민병대를 만들었다. ‘특수야간부대’는 총파업을 분쇄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총파업은 6개월 동안 지속됐고 3천∼5천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희생당한 뒤에야 끝났다. 정착민들은 1936년의 교훈을 잘 배웠다. 특수야간부대는 1948년 팔레스타인인들을 고향에서 내쫓은 시온주의 민병대들의 중핵을 형성했다.

영국 지배계급이 시온주의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제국주의 열강의 잔재를 지키려던 냉혹한 시도였다. 시온주의자들을 후원했던 바로 그 정치인들과 군인들이, 박해를 피해 도망친 유대인들이 영국 안에서 안전한 피난처를 찾는 것을 방해했다. 심지어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한 뒤에조차 이러한 제한 조치는 계속됐다.

1948년 팔레스타인에 도착하고 있는 유대인들

이 모든 사정에도 불구하고 시온주의는 전 세계 유대인 중에서 소수의 흐름이었다. 유럽의 가난과 억압에서 탈출한 유대인 중 8.5퍼센트만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것을 선택했다. 1880년에서 1929년 사이에 거의 2백만 명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많은 유대인들이 반유대주의와 싸웠고 인종 차별주의의 승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피억압 집단들과 연대를 구축했다. 유대인들은 동유럽 노동 계급의 저항에서, 그리고 사회주의 운동에서 두드러진 구실을 했다. 심지어 몇몇 시온주의자들조차 시온주의가 점점 더 제국주의에 의존하는 것을 미심쩍게 보고 있었다. 1921년에 작가 이스라엘 쟁윌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 힌두인·이집트인·아일랜드인이 영국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서로 다투고 있는 이 때 유대인들은 미친 듯이 그 굴레 속으로 목을 들이밀고 있는 기이한 광경을 보고 있다. 유대인들은 심지어 노예 상인에게 구조되는 것을 기뻐하는 바다 위의 표류자들 같다.”

시온주의는 유럽의 대다수 유대인들에게 대안이 아니었다. 1930년대에는 유대인들이 너무나 많아 중동에 모두 정착할 수 없었다.

심지어 제2차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대다수 유대인은 미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선택했다.


홀로코스트와 그 이후 [목차로]

논쟁적인 소수 집단에 불과했던 시온주의자들이 전 세계 유대인의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홀로코스트였다.

나치는 유대인 6백만 명을 살해하는, 계획적인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규모였다. 나치가 점령한 유럽 전역에서 기차는 수천 명의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를 매일 죽음의 수용소로 실어 날랐다. 아우슈비츠의 문은 긴 그림자를 남겼다. 생존자와 그 후손 들은 아우슈비츠를 보면서 반유대주의라는 살육 논리를 떠올려 왔다.

시온주의자들은 유대인 국가라는 주장의 정당성을 완벽하게 입증한 사건이 바로 홀로코스트라고 생각했다. 시온주의자들은 영국과 미국이 외면한 유대인 난민들의 운명을 지적했다. “파시즘에 대항한 전쟁”이라는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은 이민 통제를 고수함으로써 수천 명의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나치의 범죄와 연합국의 수치스런 전력도 시온주의자들의 주장이 올바르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못한다.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것은 죽은 히틀러가 옳았다고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시온주의자들은 주장한다.

지난 몇 년 동안 많은 이스라엘인들은 홀로코스트가 그런 잔혹한 일이 재발하는 것을 막아야 할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주었다고 올바로 지적했다.

1982년에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침공했다. 1982년 9월 이스라엘 무기로 무장한 레바논의 파시스트 민병대 팔랑헤는 사브라와 샤틸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에워쌌다.

이스라엘 군대가 난민촌을 봉쇄하고 있는 동안 팔랑헤는 난민촌에 들어가 팔레스타인 부녀자 2천 명을 학살했다.

이 사건에 대해 데이빗 쉬플러는 〈뉴욕 타임스〉에 이렇게 썼다. “히틀러가 만든 죽음의 수용소에서 빠져 나온 나라가 ‘우리가 하지 않았다’거나 ‘우리는 모른다’는 대답만 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다른 나라가 등을 돌림으로써 6백만 유대인이 살해당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민족의 행동 기준은 더욱 엄격해야 하는데, 이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더욱 많다.”

이스라엘이 안전 지대이기는커녕 지구상에서 가장 폭력적인 사회 중 하나가 됐다는 사실은 비극이다. 시온주의와 제국주의의 동맹을 통해 탄생한 국가는 체계적인 억압에 의존해 생존하고 있다.


테러 국가 [목차로]

매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축하할 때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빼앗기고 쫓겨난 알 나크바(Al-Nakba), 즉 대재앙의 날을 떠올린다. 테러와 선동 때문에 팔레스타인의 대부분 도시와 마을은 텅 비었다. 데이르 야신이라는 마을은 우익 민병대 이르군과 스턴이 공격의 표적으로 삼은 곳이었다. 적십자의 한 목격자는 1948년 이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을 이렇게 묘사했다.

“첫번째 방은 컴컴했어요. 온통 어수선했고 아무도 없었죠. 두번째 방은 가구 안의 물건들이 나뒹굴었고 온갖 파편들이 널려 있었죠. 나는 싸늘하게 식은 시체 몇 구를 발견했어요. [이스라엘 민병대는] 기관총과 그 다음에는 수류탄으로 여기를 ‘청소’했어요. ‘청소’의 마지막은 칼로 끝마쳤죠. 어느 누구라도 알 수 있었어요. … 이 마을에는 4백 명이 살고 있었는데, 살아남은 사람은 약 50명뿐이었요. 나머지는 의도적으로 살해됐죠. 내가 관찰한 바로는, 이 살인 집단은 아주 잘 훈련을 받았고 명령받은 대로만 움직였어요.”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장악은 사실상 유엔의 공식적인 지지를 받았다. 1947년에 유엔은 이 지역을 분할하여 유대인 정착민과 팔레스타인인 들에게 나눠주자고 제안했다. 유엔의 분할안은 시온주의자들에게 크게 양보한 것이었다. 전체 인구의 3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 유대인 정착민들이 토지의 57퍼센트를 차지하게 돼 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미국과 소련이 팔레스타인인들의 권리를 방어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이 분할안은 시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웃 아랍 나라들이 팔레스타인에 군대를 보냈지만 대결은 언제나 불평등한 것이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여러 해 동안 무기를 비축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 데이비드 벤-구리온이 자기 회고록에 기록했듯이, 이스라엘은 1945년 한 해에만 무기 구입에 거의 1백만 달러를 썼다. 아랍 군대는 사기도 낮았고 무장도 형편없었다. 첫번째 아랍 군대가 진격할 때조차 요르단의 지배자들은 평화 협상에 매달리고 있었다.

1967년 6일전쟁과 함께 토지 약탈도 계속됐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 군대를 재빨리 패배시킨 다음 요르단강 서안, 동예루살렘, 가자 지구, 그리고 갈릴리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골란 고원을 장악했다. 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제 이스라엘의 직접 지배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1982년 이스라엘은 베이루트에 본부를 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파괴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민중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레바논을 침공했다. 레바논 내의 이스라엘 동맹 세력은 파시스트인 팔랑헤 조직과 남레바논 군대인데, 이 둘 다 끔찍한 살육을 저지른 바 있다. 18년이 지나서야 이스라엘 군대는 레바논 국경 밖으로 퇴각했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수십 년 동안 끔찍한 억압을 당해 왔다. 국제사면위원회와 휴먼 라이츠 워치 같은 인권 단체들은 학대, 자의적 처벌, 고문, 언론 탄압, 검열 그리고 재판 없는 구금 등의 사례를 보고했다. 집단 처벌은 예사였다. 모든 도시와 마을에 야간 통행 금지령이 내리고, 용의자들의 가족들은 추방당하거나 그들의 집은 부서진다. 미국 국무부도 해마다 이와 비슷한 인권 침해 사례를 보고하고 있다.

“1996년 5월 예루살렘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팔레스타인 죄수가 이스라엘 경찰과 병원 경비에게 맞아 죽었다. 병원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의) 손과 발은 수갑이 채워진 채 침대에 묶여 있었다.”

지난 10년 넘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직접 억압하는 것은 물론 요르단강 서안의 정착민들을 이용해 팔레스타인인들을 단속해 왔다. 1993년에 시작된 이스라엘과 PLO의 평화 협상 기간에도 새로운 정착민 수천 명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했다. 지난 7년 동안 요르단강 서안의 정착민 수는 10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두 배 증가했다. 정착민들은 일상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을 살해·폭행·유괴한다. 정착민들은 가장 좋은 토지와 물을 이용할 수 있다. 이스라엘 정부가 대준 돈으로 만든 정착민들의 포장 도로는 요르단강 서안 지역을 고립된 파편들로 만들어버렸다. 이 덕분에 이스라엘 군대는 점령지 전체를 몇 일, 심지어 몇 주 동안 계속 봉쇄할 수 있게 됐다. 아주 하찮은 구실로도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을 집안에 가둬둘 수 있다.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사람들조차 많은 정착민 조직들의 인종 차별주의를 보면서 충격과 당혹감에 빠졌다. 호전적인 미국인 마이어 카한이 암살당할 때까지 이끌었던 카흐(Kach) 같은 극우 조직들은 지금 불법이지만 그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 1994년 바루흐 골드슈타인이 헤브론의 모스크에 쳐들어가 예배중인 무슬림들에게 총격을 가해 29명을 죽였다. 골드슈타인과 같은 광신자들은 이스라엘 정치의 광기 어린 단면을 표현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들의 행동은 이스라엘 사회의 주류 사이에서 벌어지는 많은 논쟁의 논리적 결론이다. 레바논 침공 당시 이스라엘 총리였던 메나헴 베긴은 팔레스타인인들을 “두 발 달린 짐승”이라고 불렀다. 1990년대에 총리를 지낸 베냐민 네타냐후는 아랍인들이 “통제할 수 없는 폭력 성향을 지니고 있다. 이런 성향의 기원은 특정한 이데올로기적·종교적 목표들이 모든 도덕적 금기의 제거를 정당화하고 사실상 이를 요구하는 세계관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원과 무기 : 아메리칸 커넥션 [목차로]

이스라엘의 억압 능력은 강대국들에게 전혀 비밀이 아니다. 1945년 이후 미국은 이스라엘의 주요 무기 공급처 구실을 떠맡았다. 그 수치는 놀라울 정도다. 미국과학자연맹에 의하면, “1950년 이래 미국은 4백60억 달러가 넘는 군사 원조를 이스라엘에 제공했는데, 그 액수는 미국의 두번째 군사 원조 수혜국인 이집트가 받은 것보다 최소 2백억 달러를 상회하는 것이다.”

1996년 이스라엘은 미국의 해외 원조 예산의 25퍼센트인 1백20억 달러를 받았다. 여기에는 연 평균 1인당 국민 소득이 약 1만 9천 달러나 되는 나라[이스라엘]에 대한 경제 원조 수백만 달러도 포함돼 있다. 지원의 가장 큰 부분은 직접 군사 지원 형태이다. 이스라엘은 해마다 특혜 조건으로 약 18억 달러를 받는데, 〈워싱턴 리포트 온 더 미들 이스트〉에 의하면 “세계의 어느 수혜국에게도 적용되지 않는” 액수다.

미국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탄압할 목적으로 만든 게 분명한 장비들을 이스라엘에게 판매했다. 1998년 미국 국무부는 3백50만 달러어치의 폭동 진압용 대인(對人) 화학무기와 2천8백53만 9천4백 발의 탄약과 1만 2천7백68개의 군용 총기의 수출을 허가해 주었다.

여러 해 동안 이스라엘은 전 세계 악당 국가들이 마지막으로 의존할 수 있는 무기 거래상 노릇을 해 왔다. 1980년대 이스라엘의 고객 명단에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지원하는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 이란, 자이레 그리고 과테말라가 들어 있었다. 이스라엘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를 고수하던 남아공 정부와 특별한 관계를 확립하고는 정보 수집과 비밀 핵무기 프로그램 개발 관련 기술을 공유했다. 많은 경우 이스라엘은 미국이 공개적으로 지원할 수 없는 정권들에게 군사 장비를 제공하는 중개상 노릇을 했다.


팔레스타인 민중의 저항 [목차로]

1948년의 대재앙 이후 반세기 동안 팔레스타인 민중의 저항은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팔레스타인인 몇 세대가 망명지나 점령지의 난민촌에서 성장했지만 그들은 투쟁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흑백 체크 무늬 스카프인 카피예[kaffiyeh : 아랍인이 머리에 쓰는 두건 — 옮긴이]와 팔레스타인 국기는 억압에 맞선 연대의 강력한 상징이 됐다. 이 투쟁은 팔레스타인의 저항 문화를 표현하는 시인·화가·음악가·작가를 배출했다.

1948년의 대재앙 당시 팔레스타인인들은 거의 준비돼 있지 않았다. 저항 조직들은 1936년 총파업 이후 뒤따른 탄압에서 회복되지 않았다. 1960년대 말이 돼서야 팔레스타인 조직들은 의미 있는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6일전쟁 뒤에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이 야세르 아라파트의 파타(승리) 조직이 개설한 게릴라 훈련 기지로 몰려들었다. 파타는 PLO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파타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의 해방은 오직 무장 투쟁으로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67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에게 패배한 뒤 이들은 중동에서 저항의 유일한 중심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투적인 행동을 주장한 파타의 미사여구 뒤에는 이스라엘 주변의 아랍 정권들이나 중동의 중개인 노릇을 하는 제국주의 열강, 둘 다와 타협을 하려는 바람이 숨어 있었다. 파타는 평범한 팔레스타인 민중을 대중적인 민족 해방 투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무장 게릴라 투쟁과 막후 외교를 병행하는 것에 의존했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1974년 유엔 총회에 가입하는 역사적 연설에서 PLO의 전략이 “총과 올리브 나뭇가지”에 기초해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파타 전략의 극적인 상징을 보여 주었다. 1970년대 말에 PLO는 이미 이스라엘 국가 승인과 무장 투쟁 중단을 제안하면서 몇 차례 미국에 접근했었다. 그 대가로 PLO는 작고 무기력하며 경제적으로 기형적인 “팔레스타인 국가”를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건설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1990년대 초가 돼서야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스라엘이 PLO와 협상에 나서게 만든 한 가지 요인은 1987년에 발생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봉기, 즉 인티파다였다. 인티파다는 이스라엘의 자만심을 산산조각 냈다. [팔레스타인의] 십대들은 돌멩이를 던지며 세계 4위의 군사 강국에 도전했다. 총파업 때문에 점령지의 상가들은 몇 주 동안 문을 닫았다.

1936년 이후 처음으로 팔레스타인 사회 전체가 해방을 향한 대중 투쟁에 참여했다. 한 여성 활동가는 인티파다의 충격을 이렇게 묘사했다.

“[투쟁] 지도부는 실제로 민중 내부에서 등장해 민중 자신들의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민중 위원회들의 활동 덕분이다. … 통합전국봉기지도부가 총파업을 호소하자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고 거리에는 한 사람도 없다. … 우리는 지금 봉기가 계속되고 있을 뿐 아니라 확대되는 것을 보고 있다. 이 봉기에는 지금 각계 각층, 모든 계급들이 참여하고 있다. 가게 주인들도 참여하고, 노동자들도 참여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학생 혁명이 아니다.”

인티파다의 핵심은 망명지의 PLO가 아니라 점령지에 있었다. 이 봉기는 신세대 젊은 활동가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점령지의 영웅적 저항은 쇠퇴해 가던 PLO에 큰 힘을 주었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1988년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선포했고 이듬해 이스라엘 국가를 승인했다. 미국 관리들은 이스라엘에게 PLO와의 협상에 동의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인티파다에 대한 이스라엘 정치인들의 해결책은 단 한 가지, “강압·무력·구타”뿐이었다. 총리 이츠하크 샤미르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 군대 사이에 공포의 장벽을 재건해야 하며, … 이 지역의 아랍인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심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티파다가 계속되면서 이스라엘은 평판이 나빠졌고 봉기를 억압하는 데 드는 군사적 비용이 증가했음을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평화 협상 : 전쟁의 다른 이름? [목차로]

1991년 걸프전쟁으로 중동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정치적 지배가 입증됐다. 이스라엘의 몇몇 전략가들은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훨씬 더 강자의 처지에서, 그리고 미국의 원조 약속으로 주변 아랍 정권들이 매수된 상태에서, 이스라엘은 무슨 조건이든 원하는 대로 강요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93년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협상을 벌인 복잡한 조약들의 모든 조항에는 이런 현실이 반영됐다.

평화 협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스라엘은 대규모 정착촌 건설 프로그램을 통해 점령지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 왔다. [정착촌] 건설 속도는 2000년 한 해 동안에만 96퍼센트나 증가했다. 새로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는 평화 협상을 통해 가자 지구의 60퍼센트와 요르단강 서안의 4퍼센트만 직접 통치할 수 있게 됐다. 나머지 점령지는 이스라엘과 공동으로 통치해야 했다. 1947년의 유엔 분할안이 사실상 시온주의자들의 강탈 계획이 된 것과 꼭 마찬가지로 1990년대의 평화 협상은 요르단강 서안을 병합하기 위한 근거가 된 것이다.(페이지 상단의 지도 참조)

클린턴과 아라파트,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 집착하는 것은 분명한 경제적·전략적 이유들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물 소비량의 50퍼센트를 1967년 국경선 밖의 지역에서 끌어온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비료 때문에 오염된 원시적 우물들에 의존해 살아야 하는 반면, 이스라엘인들은 사막에 수영장과 정원을 만들어 놓고 산다.

평화 협상 덕분에 이스라엘은 가난한 팔레스타인 경제도 더 강력하게 지배할 수 있게 됐다.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통제 지역에서는 인구 성장 때문에 자원에 대한 압력이 엄청나다. 1997년 6월부터 2000년 6월까지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제사업국(UNRWA)에 등록된 난민 수는 10.5퍼센트 증가했다. 팔레스타인 경제와 이스라엘 경제를 비교하면 제3세계와 선진국의 차이를 볼 수 있다. 1995년 이스라엘의 총수출액은 1백90억 달러인 반면, 팔레스타인의 총수출액은 3억4천만 달러였고 그나마 그 중 94퍼센트는 이스라엘로 수출한 것이었다.

PA 관리들의 청원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경제를 지배하기 위해 자유 시장 기구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협상 과정에서 점령지에 공항과 항만 시설을 건설한다는 수많은 합의가 있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은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서 사실상 포로 생활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스라엘은 국경 봉쇄를 체계적으로 이용해 팔레스타인 경제의 기반을 무너뜨렸다. 유엔의 연구 보고서 작성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국경 봉쇄는 비대칭적으로 적용된다. 팔레스타인 상품의 이스라엘 반입은 대개 금지된 반면, 이스라엘 상품은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계속 쏟아져 들어온다.”

관료적 검사 비용 때문에 점령지와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 상품의 가격은 상승한다. 이스라엘 기업에 대한 우대 때문에 흔히 팔레스타인 과일과 채소는 상점에 도착하기도 전에 썩어 버린다. “유대인의 땅, 유대인의 노동, 유대인의 상품”이라는 구호가 여전히 이스라엘 경제를 움직이고 있다.

이스라엘이 자행하는 인권 유린이 계속되는 동안 점령지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은 PA 자체의 억압에도 직면해 있다. PA 보안군은 잡아 가둔 사람들을 고문하다 죽이고 언론인들과 학자들을 탄압했으며 테러 용의자들을 재판 없이 처형했다.

아랍어 석간 신문 알 쿠즈(Al Quds)의 편집자는 예루살렘의 그리스정교 대주교와 아라파트의 면담 관련 기사를 1면에 싣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이 사건에 대해 아라파트는 “편집자가 [PLO] 의장[아라파트 자신—옮긴이]의 희망이나 의지를 듣지 않거나 따르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억압 조치는 대부분 PA의 부패나 경제 실정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금지하려는 고의적인 시도였다. PA의 보안 기구 일곱 개가 가뜩이나 모자란 예산의 대부분을 쓰고 있다.

2000년 10월 봉기 직후에 작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영국 신문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평범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배신감을 이렇게 묘사했다.

“제2차 팔레스타인 항쟁의 일부는 아라파트를 겨냥한 것이다. 그는 거짓 약속으로 자기 국민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독점기업들을 보유한 부패한 관리들을 감싸고돈다. 심지어 그들이 그를 대신해 협상하는 과정에서 무능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때조차도 그렇다. … 그의 국제적 후원자들은 이것을 ‘평화 협상’이라는 말로 받아들인다. 확실히 이 말은 팔레스타인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일 것이다.”

평화

1993년 “평화 협상”이 시작된 이래로 팔레스타인인들의 생활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악화했다.

1993년 이후 국민총생산(GNP)은 35퍼센트 하락했다. 일부 점령지의 실업률은 40퍼센트까지 치솟았다.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의 1인당 평균 소득은 1987년 1천7백50파운드(약 3백50만 원)였지만 지금은 1천50파운드(약 2백10만 원)이다. 이스라엘의 1인당 평균 소득은 1만 2천 파운드(약 2천3백50만 원)이다.

이스라엘 국경선 안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은 1백만 명이다. 그들은 2등 시민 취급을 받는다. 유대인의 시간당 평균 임금은 팔레스타인인보다 33퍼센트 많다.

1940년대 이래로 이스라엘 내에서 아랍인들의 마을이 건설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진 아랍인들이 건축 허가를 신청했다가 거부당한 사례가 올해에만 2만 2천 건이나 됐다.

아랍인의 신생아 사망률은 유대인보다 두 배나 높다.


중동에 평화가 정착될 수 있을까? [목차로]

“여러분은 우리[이스라엘]가 영원히 점령할 수 있다고, 피할 수 없는 폭발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정말로 믿었는가?

우리가 토지를 몰수하고 인권을 부인하며 바리케이드에서 피점령자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정말로 믿었는가?

우리가 발코니에서 그들에게 오줌을 갈기고 점령지의 행정을 이용해 그들을 괴롭히고 그들의 명예를 더럽힐 수 있다고 정말로 믿었는가?

그들의 피가 우리의 피보다 가치가 없다는 점을 그들에게 보여 줄 수 있다고 정말로 믿었는가?

우리가 그들을 협박하고 짓밟는데도 분노가 결코 폭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정말로 믿었는가?

영리한 소수 민족[이스라엘]이 손에 곤봉을 쥐면 얼마나 어리석게 변하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 이스라엘 신문 〈예디오트 아하로노트〉 2000년 10월 13일치

2000년 10월의 새로운 인티파다는 “평화 협상”이 쓸모없다고 느낀 평범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를 반영했다. 굴종을 거부하는 그들의 용감한 외침은 전 세계에 메아리쳤다. 특히 이웃 아랍 나라들의 학생과 노동자 들은 점령지에서 일어난 저항 운동에 연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모로코에서 시리아, 이집트까지,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섰다. 제국주의에 맞선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의 불꽃이 짧게나마 중동을 밝게 비췄다.

“평화 협상”의 실패와 PLO의 나약함은 시온주의나 제국주의와 타협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 보여 준다. 이런 조건들에 기초한 평화 협상은 [일방적인] 항복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 중동을 지배한 운동들은 노동계급의 자신감과 연대를 약화시키는 것들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후 식민지 권력을 쫓아낸 해방 운동의 지도자들은 시리아·이집트·이라크의 노동자들에게 국민 국가 건설을 위한 자기 희생을 요구했다. 경제 위기 때문에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미국 제국주의와 타협하게 되자 민족해방이라는 꿈은 시들해졌다.

중동 전역에서 노동자들은 똑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물가 인상, 임금 하락, 치솟는 실업률, 사회 복지와 보건 체계의 붕괴.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을 생산하는 지역에서 살고 있음에도 자국 지배자들과 제국주의 열강의 동맹 때문에 계속 빈곤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팔레스타인의 비극은 중동을 체계적으로 약탈하는 더 넓은 비극의 일부다.

이스라엘 국가 창건의 기초는 제국주의의 이익과 거대 열강의 책략이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정책은 제국주의와 다국적 기업들의 요구 둘 다와 연결돼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평범한 사람들의 권리를 위한 더 커다란 전투의 일부다. 그것은 지금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엘리트들에 대항하는 전투다. 오직 이 투쟁만이 아랍인과 유대인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민주적 사회주의 국가를 팔레스타인에 건설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물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회가 정말 건설될 수 있을까? 물론, 수십년 간의 증오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유일한 현실적 해답은 또 다른 질문 속에 있다. 그럼 대안은 무엇인가?

중동에서 이스라엘의 존재를 유지하는 힘은 미국이라는 힘이다.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무기는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에게 평화와 안전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지구상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군국주의적인 사회들 중 하나에서 살고 있다. 그 사회의 기초는 유대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 수 없는 인종 차별이다.

모든 유대인이 시온주의자들인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시온주의 외에도 국제 연대와 사회주의라는 다른 정치 전통들도 있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이집트·이라크·시리아에서는 유대인·아랍계 기독교도·무슬림이 제국주의에 맞서 함께 싸웠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통의 적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지리아에서 켄 사로-위와(Ken Saro-Wiwa)를 처형당하게 만든 석유 회사들은 이스라엘 헬기들이 요르단강 서안에 강요하는 “안정”으로부터 이득을 얻는 바로 그 석유회사들이다.

이스라엘에 최신 군사 기술을 제공하는 바로 그 체제가 아프리카의 가장 가난한 나라들로부터 외채 상환 명목으로 수십억 달러를 빼앗아 간다.

이 때문에,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과 미국의 대외 정책에 맞선 파업과 시위는 모두 팔레스타인인들을 옥죄는 사슬을 끊는 투쟁이기도 하다.

전 세계에서 전쟁과 빈곤을 낳는 이 비인간적 체제에 맞선 투쟁은 중동 평화의 토대를 놓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점령지역에서 철수하라” ⓒ노동자연대

참고 자료 [목차로]

팔레스타인 분쟁은 재래식 무기에 의한 전쟁일 뿐 아니라 말과 통계를 이용한 전쟁이기도 했다. 다음은 이 소책자에 나오는 자료의 주요 출처와 더 심층적인 이해를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자료들이다.

웹사이트

추천 도서

  • 석유와 제국주의 : 앤써니 샘슨, 《석유를 지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책갈피.
  • 시온주의 식민지의 초기 역사 : Nathan Weinstock, Zionism: False Messiah (London, 1979). 필 마셜, 《인티파다 : 시온주의, 미국과 팔레스타인 저항》, 책갈피.
  • 사브라와 샤틸라 학살 : Robert Fisk, Pity the Nation (Oxford, 1992).
  • 이스라엘의 침공과 인티파다 : 노암 촘스키, 《숙명의 트라이앵글 : 미국·이스라엘·팔레스타인》, 이후. David Hirst, The gun and the Olive Branch (London, 1077). Phillis Bennis, From Stones to Statehood: The Palestinian Uprising (London, 1990).
  • 평화 협상의 실패 : Edward Said, The End of the Peace Process (London, 2000). Graham Usher, Palestine in Crisis: The Struggle for Peace and Political Independence after Oslo (London,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