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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반기 노동자 투쟁을 돌아보며

하반기는 롯데 호텔 노조와 사회보험노조의 파업과 항의 시위로 시작됐다. 이 투쟁은 정부가 은행 구조조정을 강요하기 위해 본때를 보이려는 데 맞선 저항이었다. 이 저항이 매우 완강했던 덕분에 은행 노동자들은 하룻만에 정부를 일시적으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금융노조 지도자들이 이면 계약 따위로 벼락치기 합의를 하지만 않았던들 은행 노동자들은 더 확실한 양보를 얻어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롯데 호텔 노조와 사회보험노조는 은행 노동자들이 업무에 복귀하고 다시 혼자 남게 됐어도 기가 꺾이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했다. 김대중 정부로서도 쉽게 물러설 수 없었다. 왜냐하면 둘 다 어쨌든 국민적 초점이 된 투쟁이므로 정부가 밀리는 듯한 인상을 줬다가는 하반기 구조조정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두 노조가 주축이 된 7-8월 민주노총 항의 투쟁의 정점은 8·15 때의 전국노동자대회였다. 이 때쯤엔 정부와 롯데 재벌과 민주노총 상근 간부들 사이에 그 동안 부담이 돼 온 롯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공통 인식이 형성돼 있었다. 롯데에 대한 여론은 정부가 무리를 한 탓에 노조 쪽에 유리하게 형성돼 있었다. 반면에,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대한 여론은 정부의 마녀 사냥 탓에 사용자 쪽에 유리하게 형성돼 있었다.

이 차이를 이용해 정부는 둘을 분리시켰다. 8월 하순에 롯데 호텔 노조는 조합원의 다수가 찬성하는 합의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반면에, 사보노조는 9월 중순 무조건 업무 복귀라는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사보노조의 항복은 정치·경제 위기의 심화와 관계가 있었다. 롯데 호텔 노동자들이 업무에 복귀한 직후 한빛은행 대출 비리, 여당의 선거 부정 교사·은폐·축소, 당시 교육부 장관 송자의 부당 이득 취득 등 부패 추문이 불거졌다. 부패 추문은 '금고' 사건의 형태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당은 남북 정상 회담 전처럼 다시 야당에 마구 밀리기 시작했다. 9월 중순에는 석유 가격 급등, 포드의 대우차 인수 포기, 반도체 가격 급속 하락으로 인해 주가가 폭락하고 경기 후퇴의 재발을 우려하는 여론이 유력해졌다.

경제 불황에 직면하게 되면 노동조합은 한계가 드러난다. 불황으로 인해 노사 간의 타협점이 매우 작아진다. 그러면 아무리 좌파적일지라도 노조 지도부는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아진다. 노조 지도자들은 기업주와 현장 조합원 양쪽으로부터 압력을 받아 샌드위치 신세가 된다. 사보 노조 지도부의 경우, 정치·경제 위기 심화로 인해 위(정부)로부터의 압력은 엄청났으나 아래(현장 조합원 대중)로부터의 압력은 9월 중순쯤엔 별로 크지 않았다. 조합원들은 다소 지쳐 있었고, 우익 야당이 설치는 것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9월 중순 이후 시기는 이전과 비교된다. 나는 방금 경기 후퇴와 잇달은 부패 추문, 이로 인한 야당의 공세 강화에 대해 얘기했다. 경기 후퇴는 또 다른 문제점들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대북 관계 개선의 효과를 반감시킨다는 점과, 구조조정을 밀어붙임으로써 노동자와 더한층 긴장과 충돌을 빚어야 한다는 점이다.

비전향 장기수 북송을 전후한 때부터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 〈조선일보〉와 우익 야당은 경기가 후퇴하자 '경제도 어려운데 웬 대북 지원이냐'는 악선동을 통해 반격의 강도를 높였다. 우익은 북미간 관계 개선 조짐도 '북한이 다시 통미봉남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악선동에 이용했다.

김대중은 10월 중순 노벨 평화상 수상 발표와 아셈 회의 개최를 통해 숨 돌릴 여유를 되찾았다. 그러나 아셈 회의 개최에 맞춰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이 항의 시위는 마치 반자본주의 시위가 선진국만의 현상인 양 보도하는 선진국 매스 미디어에 반증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국제주의적으로 큰 공헌을 했다. 게다가 시위 참가자의 대다수가 민주노총 노동자들이었다는 점도 뜻깊다. 서구 좌파의 일부는 시애틀과 미요를 제외하면 반자본주의 항의 운동에 노동자 참여가 적다고 실망하고 있다. '서울'은 그들에게 큰 힘이 됐을 것이다.

아셈이 끝나자 김대중 정부는 노벨상 수상 발표로 중단했던 좌익 마녀 사냥을 재개했다. 국제사회주의자 5인과 소위 '민혁당' 관계자 2인이 구속됐다. 마녀 사냥의 목적은 책임 전가다. 경제 위기의 책임이 노동 운동에 있고, 노동 운동이 전투적인 데 대한 책임은 좌익에게 있다는 것이다. 마녀 사냥의 대상은 흔히 실제로 노동자 투쟁을 조직한 노동조합 지도자들보다는 투쟁이 중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았을 뿐인 소규모 좌익 그룹이 되기 십상이다. 1991년 소련 붕괴 이래로 주사파 그룹들과 국제사회주의자들이 단골 속죄양이 돼 왔다. 물론 공개적으로 의견을 내놓지 못하는 조직들은 대개 사냥감조차 되지 못한다.

국가 탄압의 효과는 사회 불안과 경제 위기의 책임 전가 외에 노동 운동의 분열이다. 탄압이 노동자 운동 일반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특정 부분에 대한 것이므로 탄압은 주류 개량주의자들과 비주류 좌익을 분리시켜 다스리는 각개격파 효과를 낸다. 그러므로 주사파가 당하든 다른 어떤 단체가 당하든 국가 탄압에 맞서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 PD계열에 속하는 좌파 다수가 정부의 한총련 탄압에 침묵한다든가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도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 온다.

11월 중순에 좌우파 양대 노총이 각기 따로 전국 노동자 대회를 개최한 것은 이러한 탄압에 의한 분열 효과였던 듯하다. 우파 노조인 한국노총은 좌파 노조인 민주노총과 함께 개최하기를 꺼렸다. 올바르게도 민주노총 단병호 위원장은 전국노동자대회 공식 연단에서 한국노총에 공동 투쟁을 제안했다.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11월 16일 공안대책협의회를 다시 가동시키는 것이었다.

사실, 우리 나라의 노동조합 운동이 두 노총으로 나뉘어 있는 것은 그 동안은 불가피했지만 장차 지양돼야 한다. 노동조합 운동의 단결을 지지하는 진정한 투사들이라면 두 노총의 통합을 지지해야 한다. 바람직한 통합은 두 노총이 좌경적으로, 즉 민주노총 주도로 통합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10월 8일, 11월 26일, 12월 5일처럼 두 노총이 함께 집회를 여는 것이 좋다. 하지만 두 노총이 함께 파업하는 것이 훨씬 더 좋다.

아쉽게도 파업에 관한 한 각 노총의 각 단위노조는 각기 따로 파업에 들어가려 했다. 전력 노조 따로, 도시철도 따로, 철도 노조 따로, 한국통신 따로 파업하겠다는 식이었다. 이것은 노동자 연대와 정반대인 부문주의다. 또한, 노동조합들이 각자의 요구를 수렴한 계급적 요구들을 ― 예컨대 민영화 반대, 기업 퇴출 반대 등등 ― 제기한다면 투쟁이 어느 정도 정치적 성격도 띠게 되는 데 반해, 부문적 요구들은 경제적 수준에 머물러 있으므로 부문주의는 경제주의이기도 하다. 부문주의와 경제주의는 동전의 앞뒤 관계에 있는 경향들이다.

그리고 두 경향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실천의 핵심적 특징이다.

여기서 노동조합 관료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사회 집단의 존재를 인지하지 않고는 근래에 여러 노조 지도자들이 싸워 보지도 않고 일련의 항복을 한다든가, 그런데도 한국노총이 노사정위에 복귀하는 따위의 사태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력노조 지도부가 파업 계획을 철회한 바로 다음 날 양대 노총은 대통령 면담을 요구했다. 이것은 전력노조와 그 밖의 다른 파업 예정 노조 현장 노동자들의 분노를 식히는 데 일조하는 것이었다. 대개 '관료' 하면 정부 관리만을 떠올리지만, 기업체 임원·간부, 사법부 판사 따위도 관료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임원들과 상근 간부들도 또한 일종의 관료다. 그리고 정당의 ― 심지어 혁명적 정당의 ― 상근 간부들도 역시 관료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체제 타도를 지향하는 혁명적 기관이 아니다.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기관은 혁명 때 탄생할 노동자 평의회(소비에트)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기관이다. 그것은 착취 조건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지, 착취 자체를 끝장내기 위한 조직은 아니다. 노조 관료는 바로 이 임무, 즉 착취 조건을 놓고 사용자와 협상을 전담하는 노동력 판매 중개인이다. 바로 이 기능 덕분에 노동조합 내에서 그의 권위가 서게 된다. 그는 작업장의 규율에서 면제된다. 그 불결함과 위험으로부터도, 직반장이나 관리자와의 충돌로부터도, 그러나 그의 동료 노동자들과의 우애로부터도 그는 분리돼 사무실이라는 매우 다른 환경으로 옮겼다. 현장 노동자들과 사용자들 사이의 협상 전문가라는 사회적 지위 때문에 그는 그의 동료들로부터 격리된다. 그의 수입이 동료들의 수입보다 별로 많지 않을지라도 그의 수입은 더는 자본주의 경제 변동에 달려 있지 않다. 그는 잔업할 필요도 없고, 정리 해고나 비정규직화의 위협을 받지도 않는다. 인원 감축의 폭을 놓고 협상하는 노조 지도자들 자신은 감원당하지 않을 것이다. 경영진쪽 인사와 끊임없이 협상을 하는 그는 노사간 협상과 타협·화해를 노동운동의 정수로 여긴다. 투쟁은 협상을 위태롭게 만들고, 재정을 비롯한 노조 조직을 파괴하고, 심지어 그 때문에 감옥에 갈 수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요, 차선책일 뿐이다. 노동조합 조직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돼 버린다.

그러나 노조 관료는 지배 계급의 일부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위를 보존하기 위해서 필요하면 사용자와 싸워야 한다. 한국통신 노동조합의 저 우파적인 지도자들조차도 "신사적인" 즉 명목상의 파업은 한다. 그들이 싸울 때는 그들을 지지해야 한다. 만약 그들이 현장 조합원 대중의 뜻에 따라 싸워야 하는데도 싸우지 않는다면, 변혁 운동가들은 그들과 관계 없이 현장 조합원 대중을 이끌어 싸워야 한다.

지금까지 말한 바에 비춰 보면 대우차 노조 지도부의 구조조정 노조동의서 제출, 전력노조 지도부의 세 차례에 걸친 파업 취소, 도시철도 노조의 파업 취소 등에 대해 제대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를 인식하는 것을 넘어, 노동자 계급이 세계를 변혁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내년에 노동자들은 싸울까? 경기 전망과 대량 해고 위협, 취업 부문의 노동 강도 강화 가능성 등의 요인에 비춰 볼 때 노동자들의 분노는 올해보다 증대할 것이다. 한편, 노동자들의 자신감 수준도 여전하다. 한국통신 현장 노동자들과 은행 노동자들을 보라. 비록 대우차 노조와 전력노조의 지도부들이 굴복했지만, 현장 조합원 대중이 싸우다 지치고 사기 저하되고 환멸에 빠진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은 대체로 아직 본격적인 공격을 받지 않았고 따라서 건재하다. 또, 일부는 ― 가령 데이콤과 이랜드 ― 끈질기게 싸우고 있고, 다른 일부는 ― 가령 아시아나항공 조종사들 ― 승리를 거두기도 하고 있다. 노동자 투쟁의 이러한 불균등성은 내년에도 계속될 것 같다. 우리의 과제는 노동자 쟁점을 둘러싸고 운동하든 학생 쟁점을 둘러싸고 운동하든 관계 없이 노동자 대중 투쟁의 방아쇠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쟁점을 중심으로 공동전선 운동을 하는 지부로 전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