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 한국인 관광객 테러 사건이 발생하자, 대부분의 언론들이 비슷비슷한 논조로 예멘을 설명했다. 알카에다 ‘두목’인 오사마 빈 라덴의 고향이니 예멘이 어떤 곳인지 뻔하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빈 라덴이 성장하고 주로 산 곳은 사우디아라비아임에도 말이다.

물론, 이런 보도조차 "테러범들이 북한하고 연계되었을 가능성이 조금 있을 수 있다"고 말한 한나라당 의원 송영선과 비교하면 나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판에 박힌 보도를 보면, 예멘에서 해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자살폭탄 테러 등 알카에다의 활동이 비교적 최근(2006년 이후)에야 시작된 현상임을 이해할 수 없다.

또, 비록 알카에다가 때때로 예멘에서 극적인 테러 활동을 펼쳐 국제 언론의 관심을 독차지하지만, 알카에다의 활동이 예멘에서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인 것도 아니다.

북부 사다 지역에서는 2004년부터 시아파 종파인 자이드파 소속 부족들이 주도하는 대규모 무장 항쟁이 진행되면서 큰 사상자가 발생했다. 남부에서는 2007년 퇴역 군인의 연금 상향 조정 요구로 시작된 행동이 남부의 경제적 낙후에 항의하는 대규모 투쟁으로 발전했다.

이뿐이 아니다. 2007년 미국 정부가 에티오피아의 소말리아 침략을 부추긴 후 많은 수의 소말리아 난민들이 예멘으로 흘러들어 왔다. 최근 조사를 보면, 약 25만 명의 소말리아 난민들이 예멘에 거주하고 있다.

언론들이 이런 항쟁들을 언급하는 경우에도, 그들은 예멘을 ‘위험한 곳’으로 만든 이 사건들 뒤에는 동일한 원인 ― 제국주의 개입과 국제 경제 기구와 예멘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 ― 이 작동하고 있음을 언급하지 않는다.

제국주의 개입

영국 제국주의는 19세기 중반부터 1967년까지 나중에 남예멘으로 불려진 아덴만 지역을 정복·지배했다. 영국 지배는 악랄하기로 악명이 높아 많은 수의 민족해방 운동 활동가들을 납치·고문·살해했다.

그러나 영국 제국주의가 쫓겨난 뒤에도 제국주의 열강의 개입은 중단되지 않았다. 그것은 예멘이 해상 수송의 중심지인 홍해에 인접하고, 사우디아라비아 등 페르시아(걸프)만 지역의 친미 왕정 국가와 가까울 뿐 아니라, 소말리아와 지부티 등 아프리카의 전략적 요충지와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제2차세계대전 후 중동 지역에서 지배적 열강으로 부상한 미국은 예멘을 못살게 굴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례가 1991년 1차 걸프전이었다. 당시 유엔 안보리 비상임 이사국이었던 예멘은 미국이 주도한 대이라크 무력 사용안에 찬성하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예멘 유엔대사에게 “역사상 가장 값비싼 반대표가 될테니 각오하라”고 협박했다. 이윽고 이 경고는 현실로 드러났다.

미국 정부는 중동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인 예멘으로 향하는 인도주의적 지원을 일체 중단했다. 다른 중동 국가들도 미국 정부의 압력을 받아 자국의 예멘 노동자 85만 명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해외 송금에 크게 의존하던 예멘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고 1990년대까지도 예멘은 이 타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예멘은 조지 부시 1세가 선언한 ‘새로운 세계 질서’ ― 사실은 미국의 세계 패권을 확대하려는 시도 ― 의 진정한 실체를 보여 주기 위한 표적이 됐다.

또,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 국방장관 럼스펠드는 2000년 아덴만에서 미국 함선 USS콜이 자살 폭탄 공격을 받았던 것을 상기시키며 미군 공격 대상으로 아프가니스탄뿐 아니라 예멘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래서 예멘 정부는 부리나케 ‘테러와의 전쟁’ 참가 신청서를 작성했다. 다른 한편 예멘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 참가에서 얻을 이득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평범한 예멘인들에게는 전혀 이득이 아니었다.

1978년 북예멘 대통령으로 시작해, 당시 20년 이상 장기 집권중이던 살레흐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반대 세력들을 몰아붙일 절호의 기회를 발견했다. 자신이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한, 미국과 서방 국가들이 자신을 지지할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살레흐의 대통령직을 ‘상속’받고 싶은 후보들, 대표적으로 그의 아들(대통령 경호대장)과 사촌(보안군 사령관)은 서로 충성 경쟁을 벌이며 이른바 ‘테러 용의자들’을 닥치는대로 잡아들여 고문·살해했다.

예멘판 〈한겨레〉인 〈예멘 타임스〉를 보면, 어느날 갑자기 테러 용의자로 몰려 보안군에 잡혀간 후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사람들의 가족들 기사를 종종 볼 수 있다.

예멘 알카에다 지도자 중 한 명은 예멘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최근 자살 폭탄 테러 중 상당수는 알카에다 소속이 아니라 보안군에게 잡혀 고문과 학대를 당한 사람이나 그 가족들이 복수심에서 행동을 벌인 경우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일부 인권 활동가들은 정부가 반대자들을 탄압할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자작극을 벌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제기하기도 했다.

또, 2007년 에티오피아의 소말리아 침략과 함께 ‘테러와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예멘 인근 지역에서 펼쳐지자, 예멘은 좀더 직접적 영향을 받게 됐다. 2007년에만 거의 10만 명의 소말리아 난민들이 예멘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의 침략을 부추긴 미국 정부는 소말리아 난민 지원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현재 예멘에는 전쟁으로 고통받고 버림받은 분노로 가득한 25만 명 이상의 소말리아인들이 존재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소말리아 파병을 대단히 명예스러운 일인양 떠들어 댄 상황에서, 이들 중 누군가가 이번에 한국인 관광객들과 한국 정부 대표단을 노렸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많은 예멘인들도 열강의 군함 파견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본다. 작년 말 미국 정부의 한 인사는 파견된 군함들에 배속된 특수부대원들이 해안에서 지상 작전을 벌일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예멘인들은 미국 정부가 ‘알카에다의 새로운 소굴’이자 ‘실패한 국가’로 언급하기 시작한 예멘에 직접 개입하기 위한 수순이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20세기 이후 예멘은 계속 가난한 국가였다. 그러나 1980년대 남예멘과 북예멘이 통일했을 때, 예멘인들은 희망에 부풀었다. 남예멘이 가진 석유·천연가스 자원과 북예멘의 노동력이 결합하면 충분한 일자리와 복지가 제공되는 새로운 예멘을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이 기대는 1991년 걸프전 이후 미국의 개입이 낳은 불안정과 마찬가지로, 미국 정부가 주도하는 국제 금융 기관들이 권고한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에 산산이 부서졌다.

1991년 걸프전으로 예멘 경제가 큰 곤경에 처한 후 예멘 정부는 세계은행과 IMF에 손을 벌렸다. 두 국제기관은 예멘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해야 하며, 이를 위해 제3세계 국가들의 빈곤을 심화시킨 이른바 ‘구조조정 정책’을 도입할 것을 권유했다.

1995년부터 예멘 정부는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보조금 대폭 삭감과 공공서비스 사유화 정책을 진행했고, 공무원 임금을 강제 동결했다. 당연히 이것은 평범한 예멘인들의 생활수준을 크게 낮췄다.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예멘 정부는 무려 5백억 달러의 재정흑자를 봤지만, 사람들의 고통은 더 커졌다. 구조조정 정책은 약속했던 일자리를 창출하지도 못했다. 2007년 실업률은 무려 40퍼센트였다. 또, 생필품 가격 결정을 무자비한 시장에 맡기자 빈곤율이 인구의 60퍼센트까지 치솟았고, 2007년부터 시작된 세계 곡물가 상승은 평범한 예멘인들의 삶에 직격탄을 날렸다.

예멘 정부는 이런 고통을 줄이려 노력하기는커녕, 뿌리까지 썩어들어가며 오히려 문제의 일부가 됐다. 한 연구자는 예멘 정부 예산의 약 25퍼센트가 부패로 낭비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례로, 수도 사나에는 일자리와 식수가 없어 고통받는 빈민들이 부지기수인데, 정부는 6천만 달러(약 9백억 원)를 들여 대통령의 치적을 기리기 위한 대형 이슬람 사원을 건설했다. 

그래서 많은 예멘인은 예멘 정부가 팡파레를 울려대는 석유·천연가스 수출 계약을 반기지 않는다. 어차피 살레흐 정부와 그 인척들만 이득을 챙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폭발한 분노

1990년대 국제기구와 예멘 정부가 도입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빈곤과 실업의 증가, 정부의 부패, 타락을 낳았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공격했다. 1990년대 말부터 대가를 노린 납치 사건이 빈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 분노는 좀더 조직된 형태를 띄기 시작했다.

2004년 북부 자이드파는 살레흐의 수니파 지지자들이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다며 총을 들었다.

남부인들은 예멘 통일 당시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반발했다. 그들은 석유와 천연가스의 대부분이 남부에서 생산되는데 왜 자신들은 계속 가난해야 하냐고 물었다.

북부와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들의 공통점은 예멘 정부에 대한 분노뿐 아니라 긴축 정책을 권고한 국제기구를 운영하고 살레흐 정부의 뒤를 봐준 미국과 서방 열강에 대한 적개심이었다. 그래서 이라크 침략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을 전후해 예멘에서 수십만 명이 참가한 거리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알카에다는 그 중 극소수 사이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이른바 ‘새로운 세대의 알카에다’가 나타났다. 그들은 주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 많고, 전 세계를 무대로 삼아 미국과 싸우는 것을 목표로 삼는 오사마 빈 라덴의 알카에다와는 다소간 차이가 있다.

원래 빈 라덴은 예멘이 알카에다의 해외 활동을 위한 기지가 되길 바랐지, 활동지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1990년대 후반 이래 예멘 정부는 국내에서 활동하지 않는 조건으로 알카에다들이 예멘을 안식처로 삼는 것을 용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멘의 신생 알카에다 활동가들은 예멘 정부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에서 급진화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강렬한 반미 정서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주적은 자신들의 가족과 유년 시절을 파괴했고,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돕고, 이제는 전 세계 열강이 이웃 소말리아 개입하는 것을 허용하는 예멘 정부였다.

그들은 정부 재정 원천인 해외 원조나 석유와 천연가스 생산 활동을 가로막아 정부의 숨통을 옥죄려 했다. 무고한 관광객에 대한 자살 폭탄 공격, 송유관 폭파 활동의 이유는 예멘 정부의 말처럼 “알카에다가 모든 것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예멘 정부에 타격을 가하고 싶기 때문이다.

2005년 한국 정부와 예멘 정부가 체결한 천연가스 공급 협정은 예멘에서 꽤 큰 뉴스였다. 한국 석유가스공사는 2007년에만 2억 4천6백만 달러의 천연가스를 들여왔다.

이번 한국 관광객에 대한 공격이 정말 예멘 알카에다가 저지른 것이라면, 그 실마리는 한국 정부의 소말리아 파병뿐 아니라 한국 정부가 부패한 예멘 정부와 거래한 데서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마당에 왜 한국이 공격 대상이 됐는지 모르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반응은 뻔뻔할 따름이다.

📱 스마트폰 앱으로 〈노동자 연대〉를 만나 보세요! 안드로이드 앱 다운로드 아이폰 앱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