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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고사 반대로 해임된 김윤주 교사가 말한다:
“해임을 각오하고 나섰습니다. 연대, 연대합시다”

학부모들에게 일제고사에 대한 선택권을 줬다는 이유로 해직된 김윤주 교사가 한 토론회에서 발표한 글을 싣는다. 게재를 허락한 김윤주 교사에게 감사드린다.

대한민국의 무수한 익명 훈장 중 한 명이었던 평범하기 그지없는 제가 정부 덕분에 ‘해직투사’ 호칭을 얻은 지도 70일을 넘어섰습니다. 호칭 ‘득템’[‘아이템 획득’의 약자, 인터넷 신조어] 이후, 여기저기서 일제고사의 문제점을 묻는 인터뷰와 기고 요청을 받아 왔는데요.

바로 이 상황 자체가 일제고사의 첫 번째 문제점입니다. 잡범이 독립투사되는 넌센스적 상황. 대체 이명박과 공정택은 왜 그랬던 걸까요? 딴나라당 내에서조차 무리한 징계라는 소리를 들어 가면서까지 왜 MB정부는 이런 우스꽝스런 호러쇼를 감행하면서까지 일제고사에 사활을 걸고 이탈자를 처단해야 했을까요? 이따 살펴보겠습니다.

일제고사의 두 번째 문제점은 교육과정을 파행시킨다는 점입니다. 역시 이따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교육과정의 파행보다 더 아찔한 것이 아이들의 잠재적 교육과정을 망가뜨린다는 것이고 이것은 교육이 갖는 본연의 사회적 생동감을 말살한다는 점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 번째 문제점입니다.

네 번째 문제점은 교직사회를 지금보다 훨씬 더 복지부동화, 윗전에 대한 딸랑이로 만든다는 점입니다.

다섯 번째 문제점은 이 모든 문제의 총체적 결과물로서 학생과 교사가 서로를 자기서열 획득의 도구로 삼고 학교 역시 서열화되어 결국은 교육의 공정성이 포기되고 적자생존의 정글로 변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대한민국 학생 전부를 자신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키워내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경쟁적 욕망의 화신.

이미 그들은 비정규직 일반화를 통해 대학가를 취업경쟁에 매몰시킴으로써 독재 시대에도 유일하게 저항문화로 생동하던 20대 청춘들을 생활인으로 주저앉히는 방법을 학습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청소년들이 문제입니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오질 않나, 상대평가에 반발하지 않나 … 평등과 연대, 사회 참여의 감수성을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질식시켜 놓지 않으면 지금의 승자독식 구조는 늘 위태위태합니다. 그럼 과연 일제고사는 이 구조에 어떻게 기능할까요? 그 역할이 얼마나 지대하길래, 미국 공화당 교육 당국조차 거부할 권리를 안내하고 시행하는 일제고사를 마치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의무처럼 취급하며 병역기피보다 더 중죄로 엄벌하려 들까요?(참고로 저는 그냥 시험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안내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해직당했답니다.)

적자생존의 정글

봅시다. 국제중, 특목고, 스카이 대학교로 이어지는 학벌 획득의 과정이 이미 세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생존 기득권 확보를 위한 가장 무난한 코스이며, 이 코스 선점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모의 경제력임은 현재의 모든 지표가 말해 줍니다. 아무리 공교육이 이것저것 끌어들여 발버둥쳐 봐도, 무한 경쟁에 의한 선발제도라는 프레임 내에서는 해답이 없어요. 비교우위를 점하기 위한 고가의 사교육은 꾸준히 생성되고 진화하니까.

결국 서민이 뼛골 휘어지게 자식 학원비를 대 본들 사교육 시장만 살찌우고 아이들만 잡을 뿐, 이용 낭비의 제로섬 게임 속에 주변 둘러볼 새도 없이 숨가쁜 생으로 뺑이치는 것이 다입니다. 딩동댕~ 그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매년 2번씩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일제고사는 신자유주의 교육의 가장 정기적인 시스템이 됩니다.

그런데 … 게임의 룰과 목적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대안실천이 그나마 일부로나마 시도되고 있는 학교 현장에 일제고사라는 몬스터가 자리 잡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학교와 지역교육청의 명예와 책임자의 커리어를 좌우한다니!

뻔하죠. 중대한 평가는 교육과정 자체를 규정해 버리는 위력을 가진 법입니다. 인문계고를 봅시다. 몇십 년째 대입교육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이제 한국의 학교는 초등학교 때부터 문제풀이와 서열획득을 위한 교육에 폭 파묻혀야 한답니다. 그래야 반 평균 깎아먹는 놈이란 소리 안 듣고, 너 땜에 승진 못 했다는 말 안 듣고, 너희 학교 땜에 망신당했단 소리 안 듣죠. 이것은 개인의 초연함이나 내공으로 극복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교사의 성과급, 평가에 반영될 것이고, 학교선택제에 반영될 것이고, 영국의 예에서 보듯 빈민가의 성적 나쁜 학교는 국가지원을 끊어 버리는 채찍이 가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육본연의 생동감(사회개혁성)이 사라질 것은 뻔합니다.

진단과 지원?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상위성적 학교장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게 지원입니까? 10월에 시험봐서 진급을 앞둔 12월에나 나오는 성적으로 무슨 진단을 어떻게 한답니까? (사교육)지원이겠죠. 5060, 7080세대가 받은 무지막지한 교육이 ‘최소비용 투입, 최대효과 창출’을 위한 가난한 국가의 숙명이었다해도 지금 우리 나라 경제규모에서는 말이 안 됩니다. 국가는 가만 앉아서 “알아서 경쟁해라, 살아남는 놈들만 우리는 쓴다”는 태도는 매우 부도덕할 뿐만 아니라 불공정한 경쟁에 대한 정당성 문제를 어물쩍 개인의 문제로 돌려 버리는 것입니다.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수법입니다.

몬스터

학생들은 어떨까요? 일면식도 없는 국가라는 최고 권위기관으로부터 자신의 등급을 판정받고 통보받습니다. 어린 시절의 자존감이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확립되는가는 개인의 생애를 좌우하는 중차대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존감이 형성된 기준을 통해 세상을 보고 이웃을 보고 삶의 행로를 결정하므로. 굳이 초등학교까지 일제고사를 무리하게 시행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시험을 잘보기 위한 공부를 하고, 친구들과 경쟁하여 등급을 받으며, 내 서열을 올려 줄 선생님을 선호하고 반평균을 올려 주는 아이를 예뻐하는 선생님을 지켜보며 부모님과 선생님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조바심내며 매년 정기적으로 시험을 보는 것에 몸과 마음이 적응되어 가는 동안 키도 크고 머리도 크죠.

그리고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간 일상을 통과하여 어른이 되었을 때 사람이 만든 시스템을 절대시하고 불공정한 경쟁을 절대원리로 수용하고 성공과 승자를 신화화하며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곳을 바라보는 시선은 패배자에 대한 경멸로 바뀌는 것입니다. 연대해야 할 수많은 이웃들을 스스로 궁상맞게 여겨 모래알 같은 섬으로 국민 개인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 그리하여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기득 구조를 전 국민의 마음으로부터 내면화하게 만드는 것. 몸과 영혼이 함께 자라는 보드라운 시기에 냉혹한 세상 이치를 때 이르게 체득하고 미리미리 늙어 갈 아이들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습니다.

전북 임실을 필두로 쏟아져 나오는 일제고사 성적조작 사건은 아마 그들도 충분히 짐작했을 겁니다. 모를 수가 없어요. 그 바닥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당황한 것은 생각보다 수습이 간단치 않았다는 것이지요. 겁주는 걸로는 끝나지 않는 국민적 저항과 집요한 언론. 그래서 3월 일제고사를 31일로 미루고 표집으로 하겠답니다. 풉! 근데 윗전 심중 살피는 데는 도가 튼 시도교육감들은 전수평가, 즉 일제고사로 그대로 실시하겠다네요?

쇼가 먹힐지는 두고 봐야 알겠습니다만 우리는 지금 교과부가 당면한 수세적 국면을 최대한 공격해야 합니다. 여기서 고분고분 속아 넘어가 준다면 10월 일제고사는 다시 작년 상황으로 유턴할 것이 자명합니다. 촛불의 예를 보세요. 이명박 정부가 국민에게 가르쳐 준 교훈은 ‘끝장을 봐야 할 때 끝장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민은, 특히 우리 노동자들은 이 시험 거부 의사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시험 안 보는 대신 체험학습을 신청하거나 하다못해 병결 의사라도 밝혀야 합니다.

자! 오랜만에 나약한 교사들이 해직을 각오하고 싸움을 시작하였습니다. 연대. 연대, 연대, 연대해야 합니다. 이명박은 고대를 나와서 연대를 무척 싫어라 한다는데 우리는 연대해야 합니다. 교육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 대문입니다. 다니엘 헤니의 발음으로 다시 한번 얘기하지요. “더 타이밍 이즈 나우!(The timing is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