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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의 어제와 오늘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 재파병을 추진할 듯하다. 이에 <레프트21>은 아프가니스탄 점령의 위험을 경고한 영국 사회주의자 조너선 닐의 글을 재게재한다. 이 글은 <레프트21>의 컨텐츠 제휴 단체인 ‘다함께’가 2008년 9월 8일 발행한 <저항의촛불>에 실린 글이다. 1970년대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류학 조사를 벌인 경험이 있는 조너선 닐은 최근 아프가니스탄 역사를 소개하고 오늘날 미국 제국주의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수렁에 빠지게 된 이유를 분석한다.

1979년 말 소련 침략과 함께 30년에 걸친 침략 전쟁과 내전을 겪기 전, 아프가니스탄은 농업 사회였다. 90퍼센트가 농촌에 살았고, 그 중 80퍼센트가 농민이고, 10퍼센트가 유목민이었다. 도시민은 10퍼센트에 불과했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대지주들이었다. 즉, 중앙 정부나 도시에 있는 왕이나 자본가들이 아니라 대지주들에게 진정한 권력이 있었고 그들은 농촌에 자기만의 소왕국을 건설했다.

대지주 밑에는 자작농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 땅을 소유했고 다른 농민들과 소작 계약을 맺었다. 대다수의 농민들은 토지가 아예 없거나 토지 면적이 작아 다른 사람을 위해 소작을 해야 했다.

토지에 대한 권한은 매우 불안정했다. 중앙 정부가 매우 약했고 법정은 언제나 뇌물을 주는 자들을 편들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매우 가난하고 불평등한 사회였고, 경제개발도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부르주아가 경제개발을 하기 시작하면 왕과 대지주가 부르주아의 재산을 뺏곤 했다. 왕정 정부는 미국과 소련의 지원에 의존해 생존했다.

왕정은 재정의 대부분을 교육과 군대에 썼다. 고등교육 제도가 탄생하면서 새로이 교육받은 계급이 나타났다. 이 계급은 자작농과 상점주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대지주와 왕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공산주의자와 소련 침략

이 새 계급은 [소련식] 공산주의와 이슬람주의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공산주의자가 다수였고, 그들은 1978년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몰아냈다.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자들은 소련 권위주의적 근대화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쿠데타를 일으키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대지주에 반대하고 여성해방과 평등을 지지했다.

처음에 그들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다. 아무도 왕족을 방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왕족이 제거된 다음에 농촌에서 저항이 시작됐다. 농촌의 종교 교사인 물라가 이 항쟁을 주도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농촌에 기반이 없었다. 결국 그들은 과거 중앙정부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동자를 잡아 고문했다. 그리고 분노가 확산되자 폭격을 했다. 많은 무고한 빈농이 죽으면서 저항의 규모가 갈수록 커졌다.

19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했고,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자들은 소련 침략자들의 품으로 달려갔다. 공산주의자들은 이제 도시민들의 지지도 잃었다.

소련 침략군은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자들의 도움 아래 사회주의·토지개혁·여성해방의 이름으로 침략 전쟁을 벌였고 점령을 지지했다. 그 과정에서 아프가니스탄 총인구 1천5백만 명 중 50~1백만 명이 죽었고 지뢰 때문에 1백만 명이 불구가 됐다. 또, 6백만 명이 난민이 됐다. 만일 한국에서 사회주의자와 페미니스트 들이 한국민 2백50만 명을 죽였다면 아무도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을 지지하지 않게 될 것이다.

소련 점령군에 맞선 싸움이 7년 동안 지속됐다. 이슬람주의자들이 항쟁을 주도하는 구실을 했고, 결국 다수의 지지를 받게 됐다.

탈레반의 등장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소련이 붕괴하기 직전인 1988년에 소련 점령군을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토지 소유 문제를 포함해 아프가니스탄 사회의 계급적 불안정성이 다시 등장했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영국 정부가 토지 소유 문제를 독단적으로 처리했다. [1978년]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자들이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을 때, 농촌 대지주들은 자기 땅을 떠났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자기 땅을 떠났고, 이른바 ‘사령관’이라 불리는 자들 ─ 지역 반소 저항 지도자들 ─ 이 새로운 대지주가 됐다. 그러나 그들의 권력과 토지 소유권은 매우 불안정했기 때문에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이들과 계속 싸워야 했다.

이슬람주의 정당들은 러시아와 맞서는 동안 파키스탄·사우디아라비아·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그런데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떠나자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지원금을 끊었다. 미국이 테헤란의 종교지도자보다 더 오른쪽에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주의자들을 지원하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서 1990년대 동안 내전이 지속됐다. 전국적으로는 이슬람주의자들이 서로 다퉜고, 지역 사령관들도 지역 통제권을 놓고 싸웠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인들의 삶은 더 불안정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1995년 탈레반이 등장했다. 탈레반은 원래 파키스탄 군부와 미국의 지원을 받아 탄생한 집단이다. 그들은 주로 파슈툰 언어를 사용하는 남부 사람들로, 계급적으로 난민, 농민, 물납 소작인[수확물의 일부를 소작료로 바치는 소작인]이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탈레반이 평화와 질서를 가져올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환영했다. 또, 도둑질을 일삼는 다른 이슬람주의자들과 사령관들과 달리 탈레반은 정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탈레반이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으니 이제 평화가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탈레반은 파슈툰 우월주의자들이었다(지금은 아니지만). 그래서 북부와 중부의 비(非)파슈툰 사람들이 반발했고, 탈레반은 전국의 통치권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을 관통하는 석유·천연가스 수송관을 건설하려는 미국의 입장에서 탈레반은 쓸모없는 존재가 됐다.

9·11, 아프가니스탄 침략

미국이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했을 때 아무도 탈레반을 위해 싸우려 하지 않았다. 미국의 동맹인 북부동맹을 위해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오랜 전쟁에 지쳐 있었다. 1백만 명 이상이 소련과의 전쟁에서 죽었다. 거의 모든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주변 사람을 전쟁으로 잃는 경험을 했다. 그들은 무려 23년 동안 가장 기초적인 안정조차 누리지 못했고, 누군가 내 상점, 내 땅, 내 가족을 빼앗아 갈까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인들은 평화를 원했다.

대다수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미국 편에 서서 싸우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은 파키스탄 군부의 중재 아래 탈레반과 평화협정을 맺어야 했다.

이 평화조약에 따르면 탈레반이 카불을 떠나고 미국의 지지를 받는 꼭두각시 정부가 권력을 장악하는 대신 탈레반과 동료들은 동남부 고향으로 돌아가든가 아니면 파키스탄 산악 지역으로 이주해 살든가 등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다. 오사마 빈 라덴도 이 협정 덕분에 빠져나갈 수 있었다. 몇 년 동안 양측 모두 평화협정을 준수했고 탈레반 지도자들은 체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라크 상황과는 달리 거의 2~3년 동안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미국이 경제 개발과 평화와 개인적 안정을 가져올 거라 기대했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자존심을 포기할 각오가 돼 있었다.

더구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더는 어떤 신념도 신뢰하지 않게 됐다. 과거에 그들은 공산주의와 정치적 이슬람을 위해 목숨을 던졌다. 그러나 그들은 둘 모두에 의해 배신당했고, 이제 자기 가족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저항의 등장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저항이 시작됐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직면한 저항은 이라크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큰 것이었다. 이것은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미국 점령의 현실이 자신의 기대와 완전히 다른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먼저,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외부 지원과 재건을 기대했다. 미국은 외부 지원과 재건을 약속한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미국 점령이 시작된 후 1년 뒤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하미드 카르자이는 워싱턴을 방문해 제발 재건 비용을 달라고 애걸을 했다. 미국 정부는 4천만 달러를 줬다. 이건 껌 값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중 3천만 달러는 카불에 5성급 호텔을 짓는 데 사용됐다!

최근에 미국이 좀더 많은 돈을 지원하고 있지만 대부분이 서구 NGO들에게 흘러들어간다. 그들은 그 돈의 대부분을 고용인들의 월급으로 쓰고 있다. 대다수 아프가니스탄인들의 수입은 하루 1달러도 채 안 된다. 그런데 외국인 NGO들은 집세로만 한 달에 2천~1만 달러를 쓴다. 1년 집세는 거의 2만 4천~12만 달러가 될 것이다. 이른바 ‘개발 컨설턴트’들은 1년에 무려 50만 달러를 받는다.

사실,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정부라는 것은 태생적으로 부패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서구 NGO들도 뇌물을 받고 돈을 빼돌리는 등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것을 보고 너무나 분노했다.

그래서 비록 카불은 1990년대 내전과 2001년 침략으로 폐허가 된 도시지만, 동시에 현재 전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2006년에 미군이 교통사고 직후 군중들을 상대로 총을 쏘는 만행을 저지르자 카불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미군만 공격하지 않았다. 소요는 카불 전역으로 확산됐고, 사람들은 NGO 사무실도 공격했다. 평범한 카불 거주자들은 NGO도 적으로 여겼던 것이다.

저항이 나타난 둘째 이유는 점령군의 만행이었다. 미군과 동맹군들은 탈레반을 색출한다는 빌미로 아프가니스탄 동남부를 순찰했다. 겁에 질린 미군과 동맹군의 어린 병사들은 기지 밖에는 적들이 깔려 있고 공격적으로 행동하라고 훈련받았다. 병사들은 곧 순찰 중에 발포를 해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러면 죽은 사람의 가족과 이웃들은 보복하려고 밤에 미군 기지를 찾아가 총을 몇 방 쐈다. 그러면 미군은 보통 공중 폭격을 요청했고, 크게 분노한 지역민들은 전면 항쟁을 일으켜 미군 기지를 무차별 공격했고 미군은 대규모 폭격으로 대응했다. 그리고 계속된 싸움 끝에 미군이 그 지역에서 철수해야 했다.

저항이 발생한 셋째 이유는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아직도 안정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앙 정부의 통제력은 카불을 벗어나지 못한다. 토지 소유권을 둘러싼 불안정은 여전하다. 그래서 지역 사회에서는 집단들 간 잔인한 충돌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저항이 발생한 것은 아프가니스탄이 이슬람 국가여서도, 아프가니스탄인들이 태어날 때부터 민족주의 투사여서도 아니다. 사실 그들은 지쳐서 미군 점령을 받아들일 각오가 돼 있었다. 그러나 점령의 현실과 NGO의 부패를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아프가니스탄 저항은 세계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저항은 승리하고 있다. 저항세력이 통제하는 지역이 갈수록 늘어나면서 카불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들은 지난달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의 감옥을 습격해서 죄수 4백 명을 구출했다. 현재 그들이 국경 지역 대부분을 통제하고 있고 점령군은 지고 있다. 미군은 엄청난 폭격을 통해서만 상황을 간신히 통제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쫓겨난 옛 소련 점령군들이 범한 짓을 반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