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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반전 운동 소식

세계를 휩쓴 반전 물결

3월 20일 부시와 블레어의 전쟁이 시작됐지만 국제 반전 운동은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 개전 당일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시위 행진을 벌이고 파업에 들어갔다. 이틀 뒤에는 적어도 27개국에서 수백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미국 전역에서 벌어진 거리 시위는 베트남전 반대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와 비슷했다.

반전 시위는 부시가 가장 두려워하는 지역에서 특히 강력했다. 전쟁에 대한 분노가 중동 전역을 휩쓴 것이다. 특히 이집트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투적으로 벌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집트는 지난 30년 동안 미국의 동맹국이었고 이스라엘 다음으로 미국의 원조를 많이 받는 나라다.

요르단에서는 학생·노동조합원·야당 당원·여성단체 회원 등 수천 명이 수도 암만에서 벌어진 시위에 참가했다. 베이루트 등 레바논의 여러 도시에서도 수천 명이 시위 행진을 벌였다. 티레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미국 국기와 미국산 제품을 불태웠다. 파키스탄의 라호르에서 5만 명이 반전 시위를 벌였고, 아프가니스탄의 라그만 주에서도 약 1천 명이 시위를 벌였다.

프랑스 전역의 30개 도시에서 15만 명,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12만 명, 독일 전역에서 10만 명, 스위스 베른에서 4만 명,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3만 5천 명,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3만 명, 스웨덴 스톡홀름과 예테보리에서 각각 1만 5천 명 등 유럽 각지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그리스에서는 노동자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벌였다. 시위에는 약 50만 명이 참가했다. 터키에서도 노조 주최 시위 행진에 5천 명이 참가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열린 집회에는 10만 명이나 참가했다.

3월 22일 미국의 뉴욕에서는 25만 명 이상이 반전 시위를 벌였다. 오레곤 주 포틀랜드에서도 약 4만 명이 시위를 벌였고, 로스앤젤레스에서도 2만 명이 행진을 했다. 캐나다 몬트리올에서는 20만 명이 행진을 했다. 캐나다 항만 노동자들은 투표를 통해 군수품 선적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스페인/이탈리아 - 도시를 마비시킨 반전 시위대

우파 총리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가 이끄는 스페인에서는 3월 20일(목요일)에 노동자 수천 명이 소속 노조 깃발을 들고 반전 시위에 참가했다. 3월 22일(토요일) 시위에는 적어도 1백만 명이 참가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약 50만 명, 수도 마드리드에서도 수십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스페인 경찰의 대응은 폭력적이었다. 마드리드 경찰은 시위대에게 곤봉을 휘두르고 고무총탄을 쏘면서 수백 명을 잡아갔다.

역시 우파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이탈리아에서는 개전 당일 노동자 수십만 명이 네 시간 총파업을 벌였다. 토요일에는 전국의 모든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코바스 노조 활동가 루치아노 물바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큰 시위는 20만 명 넘게 참가한 밀라노 시위였다. 로마 시위에도 10만 명이 참가하는 등 수많은 도시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모두 합쳐 약 1백만 명이 참가했다. 3월 23일에는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북부의 미군 기지들 앞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3월 24일 벌어진 교사 파업의 슬로건 중 하나는 ‘전쟁 반대’였다. 일부 노조들은 4월 2일 다시 파업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다른 노조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영국 - 노동자들의 반전 파업

3월 22일(토요일) 런던 시위에는 50만 명이 참가했다. 개전 당일에는 학생 시위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파업도 있었다. 노동자들은 흔히 상사들의 말을 거부한 채 반전 시위에 참가했다. 많은 도시에서 고등학교 교사들과 대학 강사들이 파업을 벌였다.

공무원노조(PCS) 조합원들은 몇 년 만에 벌어진 비공식 투쟁 중 최대 규모라고 말했다. 부총리 존 프레스콧의 사무실을 포함해 런던의 몇몇 관공서에서는 작업 거부가 있었다. 노동복지부 소속 PCS 조합원 약 40명도 파업을 벌였다. 한 노동자는 “우리는 뭔가 해야 한다.” 하고 말했다. “이라크인들의 일상 생활이 파괴된 마당에 우리가 평소처럼 지낼 수는 없다.”

지하철 노동자 일부도 파업에 들어갔다. 어떤 지하철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하철의 고객 안내 방송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의회 앞 시위를 알려 주었다. 그러자 지하철 안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나는 로빈 쿡이 사임했다는 소식도 방송했다.”

복스홀 자동차 공장에서도 반전 집회가 열렸다. 파업에 들어간 철도 기관사 노조(Aslef) 조합원들은 노조 깃발과 손수 만든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참가했다. 리버풀 도심에 있는 보우든 카페트 노동자들은 작업을 중단한 채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우리는 부시의 전쟁을 깔아뭉개고 싶다.”

셰필드에서는 수습 신분의 노동자들이 사무실을 나와 저녁 시위에 가담했고, 지방 자치 단체 노동자들도 한 시간 파업을 벌였다. 리버풀과 버밍엄의 우체국 노동자들도 시위를 벌였다. 파업중인 노동문제연구소 직원들은 보건안전청, 빈곤과의 전쟁(War on Want), 〈파이낸셜 타임스〉, 〈데일리 익스프레스〉 등의 노동자들과 함께 시위를 벌였다. 보건 노동자들도 병원 앞에서 중식 집회를 열었다.


이집트 - "타흐리르 인티파다"

목요일(3월 20일) 카이로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그 시위를 “타흐리르 인티파다”라고 불렀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타흐리르 광장을 가득 메운 시위대는 부시와 블레어만 반대한 것이 아니라 이집트 대통령 무바라크에도 반대했다. 그가 이라크 민중에게 자행되는 범죄들에 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대사관을 향해 행진하던 시위대는 물대포, 전기 충격봉, 경찰견을 이용한 폭력 경찰에 밀려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대규모 시위에 익숙하지 않았던 카이로 경찰은 결국 광장 중심을 시위대에게 넘겨 주었다. 몇 시간 동안 광장과 인근 거리들은 해방구가 됐다. 저녁이 되자 퇴근하던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거리의 자유를 만끽했다.

금요일에는 목요일보다 훨씬 더 많은 약 5만 명이 알 아자르에 모여서 타흐리르로 행진했다. 이번에 폭력 경찰은 처음부터 시위대를 공격했다. 경찰은 미친 듯이 폭력을 휘두르며 수백 명을 체포했다.

무바라크 정권은 ‘민간 정부’의 외양도 집어던진 채 독재 정부의 본색을 드러냈다. 시위대 차림의 보안 경찰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시위와 무관한 사람들을 포함해 젊은이 수백 명을 잡아갔다.

시위에 참가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우리 운동에 타격을 가할 수 있으며 운동을 계속 탄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버틸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또 다른 시위를 호소했다. 무바라크 정권은 전의 어느 때보다 더 취약하고 분열해 있다. 그들은 우리 운동에 불안해 하며, 전쟁과 억압에 반대하고 자유를 원하는 우리의 목소리를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가능성을 보았다. 우리는 거리를 우리 것으로 만들고 싶다.”


미국 - 경찰은 우리를 막을 수 없었다

뉴욕 시위에 참가한 9·11 희생자 유가족 일부가 들고 있는 플래카드에는 “[이번 전쟁은] 바그다드의 9·11”이라고 적혀 있었다. 행진에 참가한 리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전쟁은 순전히 거짓말에 기초한 것이다. 이번 전쟁은 석유뿐 아니라 패권을 노린 것이기도 하다. 권력자들은 그것을 유지하고 확대하고 싶어한다.”

샌프란시스코의 사회주의자 사샤 라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목요일 [샌프란시스코] 시위에서 나타난 창의성과 전투성은 모든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도로를 점거한 사람들이 건초 더미를 불태우고 쇠사슬을 이용해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는 등 주요 거리를 계속 봉쇄해 버렸다. 경찰은 24시간 동안 1천6백 명을 체포했다. 그러나 경찰의 혹독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