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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노동자 투쟁과 반자본주의신당(NPA)의 성장

최근 전 프랑스 총리 도미니크 빌팽은 “프랑스에서 곧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은 과장일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 주류 언론은 빌팽을 웃음거리 삼기는커녕, 현 상황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도대체 프랑스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경제 위기와 노동자 투쟁

몇 달 전, 사르코지는 “앞으로 파업이 일어나도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 1월과 3월에 수백만 명이 하루 총파업을 벌였다. 최근에는 민간 부문에서 ‘사장 감금’과 공장점거 파업이 벌어지고 있다.

사실 사르코지 당선 직후부터 공공부문, 학생, 이주민의 저항이 끊이질 않았다. 2008년 하반기 경제 위기의 충격이 프랑스에 몰아닥치면서 이런 갈등은 더 첨예해졌다. 노동부 장관은 공식실업률이 16퍼센트에 육박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청년 실업률이 20퍼센트가 넘을 거라고 본다.

최근 노동자 투쟁은 대부분 기층이 주도해 시작한 자발적 행동이었다. 도요타에서는, 파업 참가자들이 6명당 1명씩 대의원을 뽑아 파업위원회를 만들고 파업 신문을 발행했다.

5월 1일에는 프랑스 전역에서 수백만 명이 대규모 시위를 할 것이다. 모든 노동단체가 함께 행진할 예정인데, 이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처음이다.

상당수 노동자들은 간헐적 파업과 시위로 압력을 넣는 방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기를 바란다. 실제로 3월 19일 하루 총파업 후 여론 조사를 보면, 59퍼센트가 ‘운동의 지속’을 원했고, 22퍼센트가 좀더 구체적으로 ‘전국적 총파업 투쟁을 벌여야’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연맹노조 지도자들과 사회당뿐 아니라 좀더 왼쪽에 있는 프랑스 공산당(PCF) 지도자도 무기한 파업에 반대한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투쟁 의지를 모을 수 있는 힘, 즉 민주적 리더십이다. 프랑스 반자본주의신당(NPA) 창당과 성장은 그 가능성을 보여 주는 매우 주목할만한 사건이다.

NPA 창당

NPA는 올해 2월 첫 주말, 파리에서 대의원 1천여 명이 참석한 창당대회를 열었다. 그 전날 당원 3천2백여 명을 보유한 트로츠키주의 조직 혁명적공산주의동맹(LCR)이 당을 해체하고 NPA에 결합했다. 이들이 NPA 창당에서 핵심 뼈대 구실을 했다. 그러나 당원 수(약 9천 명)에서 볼 수 있듯이, NPA는 LCR의 재판이 아니다.

NPA 강령의 핵심은 착취·소외·전쟁·환경파괴를 낳는 “자본주의와 단절”이며 “개량한 자본주의도, 옛 소련처럼 소수의 관료들이 모든 결정을 독점하는 관료 독재 사회도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사회의 부를 민주적으로 소유·통제·분배하는 사회” 건설이다.

4월 2일 NPA 주최 프랑스 식민지 과달루페 총파업 지지 토론회

그래서 “투쟁의 사회화”를 당면 과제로 내세운다. 이를 위해 “사회자유주의[신자유주의]에 투항한 프랑스 사회당에서 완전히 정치적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NPA의 인기는 지도자인 올리비에 브장스노의 인기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브장스노는 정치인에 대한 신뢰를 묻는 여론 조사에서 두 달 연속 40퍼센트 이상 지지를 받았다. 사회당 지도자는 노동자들의 분노는 이해하지만 ‘사장 감금’은 안된다고 말했다. 반면, 브장스노는 노동자들의 행동을 완전히 옹호하면서, 진정한 폭력은 노동자의 세금으로 기업을 지원하고 정리해고에는 속수무책인 정부와 기업주들이 저지른다고 비판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브장스노를 ‘자본주의 미래를 좌우할 50인’ 중 한 명으로 선택했다. 사실, 브장스노에 어울리려면 ‘자본주의 미래를 위협할 50인’으로 바꿔야 마땅할 것이다.

NPA가 부상한 배경

가장 중요한 배경은 1995년 공공부문 총파업 승리부터 2006년 최초고용계약법(CPE) 반대 투쟁까지 계급투쟁이 상승하고 새로운 투쟁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다른 한편, 1980년대 미테랑 집권 이후 시작된 이른바 ‘복수 좌파’, 또는 ‘제도 좌파’(사회당·공산당·녹색당)의 우경화, 특히 1997~2002년 집권 사회당 정부의 급속한 우경화 ― 이전 우파 정부 두 개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민영화를 추진했다 ― 로 기성 정치에 대한 환멸과 좌파의 공백이 생겨났다.

노동자투쟁(LO)과 LCR 두 트로츠키주의 극좌파 정당은 이런 왼쪽 공백을 메우려 시도했다. 2002년 대선에서 두 정당 후보들이 도합 10퍼센트를 득표한 것, 특히, 당시 27살 우체국 노동자였던 브장스노가 첫 대선 출마에서 공산당 후보를 앞지르는 성과를 거둔 것은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도 좌파’에 대한 환멸에서 가장 먼저 수혜를 입은 것은 대안세계화 운동 단체, 특히 아탁(ATTAC, 토빈세도입시민연합)이었다. 아탁의 회원수는 정점에 이른 2005년 초에 3만 5천 명이었다.

아탁은 대안세계화 운동 초기의 지배적 사고인 ‘정치나 정치정당은 필요 없고 사회운동이면 충분하다’는 입장을 대표했다. 이것은 제도 좌파에 대한 실망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운동이 자생적으로 상승할 때는 상관없지만 2001년 ‘테러와의 전쟁’이 발발하고, 2002년 대선에서 나치 후보 르펜이 약진하는 등, 일관된 정치적 입장을 내놔야 하는 상황에서는 문제가 컸다. 첨예한 정치적 문제 앞에서 교육과 로비 등 비정치적 활동에만 집중하자는 주장의 약발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탁이 2006년 내부 선거 부정 스캔들로 큰 타격을 입은 후 주로 사회당 왼쪽의 좌파정당들이 주도해 공백을 메우려 했다. 당시 2005년 유럽헌법 반대 캠페인 승리의 여세를 몰아 반신자유주의 단일 후보를 내세우고 이를 기반으로 포괄적 반신자유주의정당을 조직하자는 주장이 상당히 호응을 얻었다. 투쟁의 성과를 사회당이 ‘말아먹는’ 상황을 더 이상 반복할 수 없다는 대중적 정서 덕분이었다.

그러나 단일 후보 선출 방식과 이후 방향에서 좌파 정당 사이에 상당한 입장 차이가 있었다. 사회당 좌파와 PCF는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좌파 연합 건설”을 주장했고, LCR은 단일 후보 선출 노력에는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사회자유주의 좌파와 반자본주의 좌파”로 옥석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6년 말, 두 주장이 접점을 찾지 못했고, 단일 후보 선발과 포괄적 좌파 재결집 시도는 좌절했다.

아이러니인 것은, 독자 대선 후보를 발표하고 반자본주의 원칙을 고수해 단일 후보와 좌파 재편에 걸림돌이 됐다는 비난을 받은 LCR이 2007년 대선을 기점으로 좌파 재편을 주도할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재편의 기준은 ‘반자본주의’였다.

당시 ‘차악론’ 덕분에 사회당이 좌파 표를 싹쓸이한 상황에서 유독 브장스노만 2002년 대선 때보다 득표를 늘려 1백50만표(4.3퍼센트)를 얻었다.

LCR이 가장 일관되고 진지하게 우파 정부뿐 아니라 사회당의 시장주의, 공산당의 사회당 추수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비록 LCR이 단일 후보 선발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진 않았지만 공동전선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덕분에 LO와도 차별성이 형성됐다.

최근 사회당 좌파인 멜랑숑이 사회당에서 탈당해 프랑스판 독일 디링케(좌파당)를 결성했다. 이것은 어쩌면 장래 사회당의 더 큰 분열을 예고하는 중요한 사건일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프랑스 좌파당과 멜랑숑은 LCR과 브장스노에게서 주도권을 가져오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최근 1930년대 이래 최악의 경제 위기가 발생해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이 전면에 드러난 것도 반자본주의 정치를 중심으로 한 좌파 재편 시도에 대중적 관심을 모으는데 도움이 됐다. 2008년 말 사르코지도 그런 분위기 변화를 의식해 “반자본주의는 위기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NPA의 과제

NPA가 승승장구할수록 당연히 정부, 기업, 언론은 패닉에 사로잡혀 온갖 역겨운 공격을 계속할 것이다. 운동 내 우파 지도자도 견제를 하고 있다. 민주노동동맹(CFDT) 지도자인 프랑수와 세레크는 NPA가 사업장 앞에서 무기한 총파업 선동을 하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

또, NPA로 결집한 사람들 사이에도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자인 옛 LCR 활동가들과 좌파케인스주의자인 NPA 유럽의회 선거 후보인 라울 제나르 사이에는 자본주의 위기의 성격, “자본주의와 단절”의 의미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

또, 이슬람주의에 대한 입장처럼 당장 실천에서 중요한 쟁점도 있다. 극좌파를 포함해 프랑스 좌파 다수는 2003년 공립학교 내 ‘종교상징물 착용금지법’ 논쟁 ― 사실상 히잡 착용 금지법 ― 에서 무슬림 학생의 선택권을 방어하지 않고 이 법을 지지했다. 무슬림에 대한 인종차별적 편견과 공격에 잘못 대응한 것이다.

LCR 출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논쟁들, 즉, 자본주의의 성격, 새로운 사회를 향한 투쟁과 이행 문제, 인종차별주의 등 각종 억압과 그에 맞선 투쟁 방식 등에 대한 논쟁에서 주도적 구실을 해야 한다.

또 다른 중요한 도전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지만 반자본주의로 이동하지 않은 다수 노동자·민중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다. 이를 위해서는 운동 단체뿐 아니라 다른 좌파 정당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지금 NPA의 입장은 사회당과도 공동전선에서 협력적으로 활동하지만 PCF나 좌파당이 미래에 사회당 중앙·지방 정부 참가 가능성을 가능성을 미리 배제하지 않는다면 연합을 함께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올바른 출발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동일한 출발점에서 과거 LCR은 반신자유주의 단일 후보 선발 과정에서 다른 좌파 정당과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객관적 조건 덕분에 LCR은 포괄적 반신자유주의정당은 아니지만 반자본주의자들의 성공적 결집체인 NPA를 출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비록 PCF의 득표율이 추락해 왔지만, 여전히 상당수 전투적 노조 투사는 PCF 지지자다. 또, 사회당에서 분열한 프랑스 좌파당이 사회당에 환멸을 느낀 노동자 민중이 급진화 과정에서 한번쯤 거쳐가는 중간 정거장이 될 수도 있다. 이들과의 관계 문제는 계속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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