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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으로 탄생한 국가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30년 전 팔레비 왕정을 타도한 막강한 대중 항쟁으로 탄생했다.

팔레비 독재 왕정은 1953년 CIA와 영국 정보부가 조직한 쿠데타로 집권했다. 이 쿠데타는 당시 이란인들의 지지를 받던 모하마드 모사데크 총리를 몰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과 미국 지배자들은 모사데크가 당시 영국 소유의 ‘영국-이란석유회사’(지금의 BP)가 운영하던 이란 석유 산업을 국유화한 것에 크게 분노했다.

팔레비 왕정은 미국과 영국의 중요 동맹이 됐다. 팔레비의 통치 아래 엄청난 부의 집중과 끔찍한 빈곤이 공존했다. 정치적 반대파들은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1977년 석유 수입이 줄고 경제적 문제가 심각해지자 테헤란 남부에서 빈민들이 항쟁을 벌이고 임금 삭감에 반대하는 파업 물결이 시작됐다.

1978년에는 팔레비의 독재에 맞서는 저항이 매일 발생했다.

석유 기업 노동자 3만 명의 파업이 팔레비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이것이 총파업으로 확대되면서 경제를 마비시켰다.

쇼라(파업위원회)

선출된 파업위원회가 작업장 운영과 식량 분배를 통제했다.

군대의 일부도 시위에 가담했다. 1979년 1월 항쟁이 일어나 여전히 팔레비에게 충성하던 보안군을 물리쳤고, 팔레비는 결국 서방으로 망명했다.

파업위원회(쇼라)가 작업장을 운영했고 농민도 쇼라를 결성하고 토지를 점거했다.

권력은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이란 좌파는 이란에서 사회주의가 시기상조이기 때문에 ‘진보적’ 자본가와 연합해 국가를 근대화하자고 호소했다.

이것은 재앙적 결과를 초래했다.

1979년 2월 야권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망명지에서 귀국하고 자신을 나라의 최고 지도자로 선언했다.

호메이니는 쇼라를 “이슬람에 반한다”고 비난했다. 호메이니 지지자들은 질서 유지 요구와 미국 반대 캠페인 ― 미국 대사관 점거로 정점에 달했다 ― 을 결합했다.

호메이니 정부는 조금씩 자신감을 획득하면서 탄압 수위도 높였다. 미국이 이란과 전쟁을 벌이도록 이라크를 부추기자, 호메이니는 그 기회를 이용해 전권을 장악했다.

1979년의 기억 ― 대중 파업, 대중 봉기와 쇼라 ― 은 이란 지배자들을 여전히 괴롭히고 있다.

번역 김용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