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7호에 대한 의견:
지난 호에 대한 독자 반응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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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6월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건설하려면’에 대해
민주당과의 전술적 제휴는 지지하면서도 전략적 동맹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지지한다.
민주당과의 ‘전략적 동맹’의 위험성과 더불어 노무현 추모 정국 직후 좀더 구체적인 ‘위험성’을 지적할 필요가 있지 않았나 싶다.
민주당은 6월 10일 대규모 집회 계획을 제시했지만 이후 “거리의 정치”보다 MB악법 저지를 명분으로 “국회의 정치”를 강조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실제 민주당 이강래 원내대표는 “6.10 기념행사가 끝나면 국회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이런 영향으로 그 시도가 먹히든 안 먹히든 거리의 운동을 국회 틀 안에서 적절히 조절하려는 시도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 즉, 민생민주국민회의 내 NGO들과 NGO를 추수하는 중도좌파 세력이 거리 투쟁보다 “정책 위주의 국회 개입”으로 투쟁을 전환하려는 개량주의적 시도가 운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MB악법 저지를 위해서라도 국회보다 “거리의 정치”가 우선돼야 한다는 분명한 주장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전주현
‘미국·일본·남한 정부는 북한 핵실험을 비난할 자격 없다’ 기사에 대해
전 세계의 핵보유 국가가 핵을 포기하도록 강제하는 국제협약이 이행되기 전까지는 일부 특정 국가만을 겨냥한 비판은 자제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나 자신도 핵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 같은 나라가 북한에 무슨 권리로 으름장을 놓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미친소
‘진보진영은 북한 핵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기사에 대해
북한 문제를 이번 신문의 주요 이슈로 다룬 것이 좋았다. 민주주의 쟁점에서는
따라서
이승현
‘진보진영의 6월 투쟁과 민주당’ 기사에 대해
민주당과 전술적으로 제휴를 맺는다는 내용이 있는데 전술이라는 용어가 좌파들 사이에서 사용하는 데 차이가 있고 불분명하게 이해될 우려가 있어서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김연오
운동이 계속 성장한다면 민주당이 운동에 얹혀 있을 수 있을까? 조직된 노동자들의 입장에선 누가 누구의 편인가에 대해서 확연하다. 대중운동이 성장한다면 민주당은
최윤진
7호에는 민주당에 대한 입장이 서너 군데에서 나온다. 1면, 논설, 13면
이명박 당선이 상당 부분 민주당과 노무현 정권에 대한 정당한 환멸
또한 논설에서 “전술적 제휴”와 “전략적 동맹”을 구분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추가 설명이 없다. 논설 지면 관계상 이를 모두 설명하기 어려운 만큼, 민주당에 관한 분석 기사에서 이러한 내용들을 다루었더라면 논설에서 말하려는 의미가
김종환
‘1989년 톈안먼 민중 항쟁의 진정한 유산’ 기사에 대해
톈안먼 항쟁에 대해 역사적 사실이나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몰랐는데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조중동에서도 한 면 정도 할애하며 중국인들이 중국의 경제 성장에 만족하며 톈안먼 항쟁에 대해 잊고 지내는 것처럼 보도하던 시점에서 적절한 기사였다.
임준형
‘“자주적 민주주의”는 계급 협력주의로 향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기사에 대해
계급 협력주의라는 것이 시기마다 사안마다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 당시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과 함께 공조하려 했던 것을 주요 사례로 들 수 있다. 자주파가 갖고 있는 전략 자체가 사회주의적 변혁을 과정에 놓고 있지 않다. 자주파들은 북한판 스탈린주의를 옹호한다. 또한 맑스나 엥겔스가 얘기한 노동자 계급 중심성보다 매판 세력을 제외한 노동자, 농민, 학생, 민족적 자본가까지 단결해야 한다는 생각 등 계급 협력주의로 나갈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김지현
민주노동당 사진 오른쪽에 있는 기사 요약 문구
김종환
‘GM 파산과 미국 자본주의의 위기’ 기사에 대해
다만 임금 수준과 복지혜택, 노동강도, 임금이 생산 비용에서 차지하는 비율 등이 다른 경쟁 업체들과 비교해서는 어떤지, 차이가 있다면 이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제시했다면 좀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보통 보수 언론도 절대치보다는 “타 기업에 비해 높다”는 논리를 많이 들이대는 것 같다.
임준형
‘예수 얘기를 통해 본 어느 좌파의 자화상’ 기사에 대해
어떤 맥락에서
이런 맥락을 소개하며 “급진적 종교 사상이 인기를 끄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게다가, 이 기사는 서평이라고 보기 힘들며
반면에 정작 14면 책 소개 기사에는 책의 가격, 페이지 수 등과 같은 정보가 없다. 무엇보다 14면의
김종환
책 리뷰인줄 알았는데 정작 책에 대한 언급은 너무 짧다. 그리고 종교에 대한 논의에 이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한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물론 작년 촛불 때에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미사로 돌파구가 마련되기도 하는 등 운동에 종교인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지만, 이 기사는 운동에 함께 하고자 하는 종교인들에게 메시지를 던져준다기보다 신학계의 최근 논의에 대한 스케치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차라리 기사 중간의 소제목 “혁명 전야, 성서에 의심을 품다”, “반자본주의 정서와 예수상”처럼 격변의 시기에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됐던 것까지 의심을 받게 된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에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는 최근의 상황과 연결시켜, 자본주의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다른 체제가 가능하다는 암시를 주는 내용과 제목으로 기사를 구성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임준형
재물을 찬양했다는 마르코의 구절이 이 부분인데요,
“나의 복음을 위하여 집과 형제, 자매…밭을 버린 사람은, 핍박과 함께 집과 형제, 자매…밭을 백 배로 받을 것이다. 오는 세대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정말 이 부분을 재물을 찬양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물질을 찬미하는 개신교 목사나 할 법한 해석이 아닐지… 바로 앞에서 버리라 하고 이어서 받을 것이라 말하는데, 당연히 전자의 버림과 후자의 받음은 다른 내용이 아닌가요?
다른 부분은 일일이 찾아보지 않았는데요. 위 구절만 가지고도, 뭐랄까… 상당히 편의적인 해석
^^
‘정부를 두렵게 하고 있는 화물연대의 파업 예고’ 기사에 대해
아직 위력적인 파업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화물연대가 정부를 두렵게 하고 있다는 기사 제목은 너무 과하다.
박용석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저항하라’ 기사에 대해
허남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