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트21>이 쌍용차 파업 36일차(6월 26일) 밤에 공장 점거 현장을 찾아가 2박 3일 동안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사연을 동행취재했다.

기자가 찾아간 날, 쌍용차 평택공장은 점거 파업 이후 최고로 긴장감이 흘렀다. 회사가 고용한 용역깡패들이 비해고 노동자들을 동원해 공장 안 본관까지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날은 처음으로 경찰이 공장 안으로 들어온 날이기도 했다. 이명박은 바로 전날 ‘서민경제’, ‘중도 실용’을 말하며 이문시장에서 ‘떡볶이 쇼’를 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실용’은 노동자 죽이기라는 것이 바로 다음날 평택에서 확인됐다. 

공장 본관에는 용역깡패와 회사임원들이 동원한 비해고 노동자들이, 도장공장(차에 색소를 입히는 시설, 인화물질이 많고 진압이 쉽지 않아 노동자들이 최후의 보루로 여기는 곳)에는 파업 노동자들이 운동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었다.

공장 안으로 들어가기 어려운 조건이었지만, 파업중 〈레프트21〉을 봐 온 노동자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철조망 뚫린 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점거 장소로 가는 길에는 거대한 공장 설비들이 적막 속에 멈춰 서 있었다. 멈춘 기계들은 흡사 실패한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듯했다. 

반면, 넓은 공장을 돌아 들어간 점거농성장은 노동자들의 활력으로 가득찼다. 입구에서 규찰을 서던 노동자들은 힘들고 피곤할 텐데도 기자에게 의자를 내 주며 자신들은 바닥에 내려 앉았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비난하는 보수언론에 시달렸는지 자신들의 얘기를 바깥에 잘 전해 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그날 일간지를 장식했던 이명박의 ‘떡볶이 쇼’를 두고 한 노동자는 “이명박이 서민을 위해 움직인다고 할 때마다 오히려 서민들은 죽어 나가요” 하고 꼬집는다.

점거농성에 대한 물리적 공격이 있어서 긴장상태였지만 노동자들은 대체로 올 것이 왔다는 듯 의연했다. “오늘부터 제대로 싸우는 건데,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화려하게 싸워 봐야죠. 여기서 밀려나게 되면 나이 마흔에 어디 가서 할 것도 없고 마지막 기회죠.”

사측이 이날 제시한 ‘희망퇴직 기회 재부여, 무급휴직 후 재고용’ 등의 최종안을 노조가 왜 거부했는지 물어봤다. “말이 희망퇴직이지, 그 돈 받고 먹고 살 수 있냐. 그게 아니죠. 15년 일한 내 퇴직금 다 합쳐도 4천∼5천만 원밖에 안돼요. 서울 가면 전세값도 안돼죠. 그러니까 희망퇴직이 아니고 절망퇴직이고, 사형선고죠. 결국 파업 파괴 명분 만들기일 뿐이죠.

“제가 알기론 하루에 용역[깡패]에 들어가는 돈이 1억 원이에요. 그런데 벌써 파업한 지 30일이 넘었고 [앞으로도 계속 쓸 거예요]. 노동자들한테 그 돈을 쏟았으면 이런 배신감도 안 느끼죠.”

“대운하에 22조 쓰는데 왜 쌍용차는 못 살릴까요?” 하고 묻자, 간단명쾌한 대답이 돌아온다. “괜히 이명박이겠습니까. 삽질하고 공구리 하면[시멘트로 바르면] 다 되는 줄 알지.”

“오바마와 이명박의 공통점은 한국말을 못 알아 듣는 거죠. 대학 교수들까지 반대하는 대운하를 왜 하려는 건지 모르겠어요.”

“대운하 팔 돈을 서민들을 위해 쓰라는 말이 이명박은 이해가 안되는 거죠. 부자들한테 돈이 많이 생겨 걔네들이 주무르다가 뭔가 떨어지는 게 있으면 밑에 있는 애들이 주워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식이죠.”

이 노동자들은 평택공장 조립3팀에서 도어를 달았다. 이 노동자들의 손에서 렉스턴, 카이런, 액티언스포츠가 탄생했다. 이런 기술과 경력을 가진 노동자들이 도대체 왜 쫓겨나 거리에 나앉아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25살에 입사해 청춘을 다 바쳐서 일했어요. 중소기업과 용역업체 거쳐 정규직으로 이 회사 들어와서 ‘이제는 정년퇴임까지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이렇게 힘드네요 …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렇게 허황된 꿈이 아닌데 … ” 다른 노동자들도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정리해고 통지 1차는 노란봉투, 2차는 하얀봉투, 이제는 손해배상청구서까지 날아왔죠. 웃기죠. 내가 일하는 직장에서 내가 먹고살겠다고 싸우는데 손해배상 청구한다는 게.”

“노란봉투 받을 때 느낌? 그 날 하루 정말 착잡하더라구요. 저희 부서는 13명인데 9명 짤리고 네 명 살았어요. 이래 가지고 A/S센터가 굴러가지 않거든요. 결국 용역업체로 분사해 비정규직으로 쫓아내려는 거죠.”

“처음에 노조에서 자구안 냈을 때 ‘근로자 입장에서 최대한 양보하는 안이니까 사측도 어느 정도 생각은 해보지 않겠나’ 생각했어요. 근데 사측이 ‘검토할 가치도 없다’고 했을 때 느낀 건 ‘아 저 사람들은 회사를 살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인원정리에만 목숨을 거는구나’ 하는 거였죠.”

“내 와이프와 내 자식을 얻고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잘 하도록 도와준 게 이 직장이잖아요. 이 직장에 열의가 아직 있는데 갑자기 나가라고 하니까 서글프고 그래서 싸우는 거죠.”

월급도 못 받고 파업중인 노동자들에게 생계 문제는 턱 밑까지 다가왔다.

“지난해 11월에 애들 유치원 끊었어요. 애한테 미안하죠. 졸업사진은 다 찍었는데 한 달 남기고 관뒀다고 졸업앨범도 안 주더라고요. 마이너스 통장은 거의 다 썼고. 정리해고만이라도 피하면 못 받은 월급을 포기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정리해고 명단에 포함됐어요. 왜 포함됐냐고 물어봤는데 기준도 없어요. 누구는 혼자니까 대상자다, 누구는 임금이 많으니까 대상자다 … ”

노동자들은 이런 상황까지 온 것은 정부 책임이므로 정부가 책임지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쌍용차를 상하이차에 넘길 때 ‘먹튀’라고 얘기했지만 정부는 무시했고 결국 소귀에 경읽기밖에 안됐죠. 쌍용차가 1994년에 기술을 9천억 원에 사 왔어요. 근데 상하이차가 그때보다 더 발전된 기술을 가져가는 데 9백억 원도 안 들었어요.”

“저는 국유화를 지지합니다. 회사가 독자 생존할 수 있을 때까지는 정부가 책임져야 합니다. 기업을 싼값에 팔아 넘기기만 하면 도대체 뭐가 남습니까?”

노동자들은 파업하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도 많다고 했다. “동료들 간에 느끼는 끈끈한 것도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동료애를 많이 느꼈죠. 이 분들이 살아야지 우리도 사는구나.” 또 다른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옆에서 늘 봐 왔다며, 비정규직 문제가 “우선은 나한테 닥치지 않아도 결국은 나에게도 올” 문제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건물에서 야참으로 자장라면을 끓이던 노동자들은 기자들에게 라면 한 젓가락을 건넨다. 이 노동자들은 이날 낮에 동료가 용역깡패들한테 맞는 것을 봤다. 한 노동자가 ‘노-노 갈등’의 실체에 대해 얘기해 줬다.

“같은 조합원들끼리는 못 때려요. 용역들이 앞장서서 선동을 하는 거예요. 이전에 구호 한 번 외쳐본 적 없고 열심히 일만 하던 우리가 쇠파이프를 드는 이유는 같은 동료였던 사람들 때리려는 게 아니라, 박영태나 이유일 같은 관리자와 용역깡패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방어하려 하는 거죠. 비해고 노동자들은 늘 고개 푹 숙이고 ‘죄송합니다’ 하고 가요. 전화하면 미안하다고 해요. 나랑 같이 15년 근무한 형은 미리 나한테 오늘 경찰 들어갈 것 같다고 몸조심하라고 전화했어요.”

노동자들은 예전에 나사를 조이던 곳에서 이제 자고 빨래 하고 밥을 한다. 냉장고에는 시장에서 장 본 영수증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설거지도 모두 노동자들 몫이다.

노동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누리던 평화는 잠깐이었다. 새벽 3시가 되자 용역깡패들이 또다시 농성장 침탈을 시도하려 한다는 소식이 공장에 돌기 시작했다.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공장을 나와야했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른 연대단체 활동가들처럼 정문 앞 잔디밭에 비닐 한 장 덮고 누웠지만 시간이 갈수록 공장 안 남편들을 염려하는 가족대책위의 눈물어린 호소만 더 또렷이 들릴 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며 들여다 본 일간지에는 온통 이명박이 곳곳에서 서민과 전쟁을 벌이는 소식들 뿐이었다. 전교조 시국선언 참가자 전원 징계 방침, 전기요금·가스요금 인상, 공안사범 소탕 1백일 작전, 4대강 정비 사업 반대 집회 봉쇄, 비정규직법·미디어법 전쟁 ….

쌍용차 공장 앞에서도 또 하나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땡볕 아래 하루종일 파업 지지 집회와 반대 집회가 열렸다. 가족대책위가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침 기자회견에서 가족대책위 이정아 대표는 임신 5개월의 몸으로 파업에 대한 연대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호소력 짙은 연설에 어느새 가족들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파업 노동자의 아내들도 대부분 노동자였다. 어린이집 교사, 학교 방과후 교사, 조선업체 직원, 컴퓨터 프로그래머 등. 이들은 남편이 돈을 벌지 못하는 동안 갑절로 일했다. 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밤에는 파업 지원 하느라 생활은 엉망이 됐다고 한다. 그래도 남편들의 투쟁이 옳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구로 정비지회 김봉민 부지회장은 차마 아내에게 굴뚝 농성에 참가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부인 서희 씨는 나중에 TV를 통해서야 굴뚝에 올라간 남편 얼굴을 봤다고 한다.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죠.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우리 신랑이 싸우는 목적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같이 살자고 하는 건데 사측에서 계속 회유하고 협박하니까 나도 화가 나더라구요. 신랑한테 당뇨가 있어요. 멀리서 어렴풋이 볼 때 얼굴이 부은 거 같아서 걱정이에요. 벌써 45일짼데 … 나쁜 걸 보면 못 참고 색연필 하나라도 모아서 없는 아이들 갖다주는 사람이에요. 그런 착한 남편을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 ” 투쟁의 ‘투’자도 몰랐다는 그녀는 이제 공장 안까지 다 들리게 쩌렁쩌렁 선동하는, 남편의 적극적인 지지자가 됐다.

바닥에 둘러앉은 가대위 회원들에게 ‘투쟁 그만 하라고 바가지를 긁을 수도 있는데 왜 파업을 지지하냐’고 물었다. “일이년 근무한 게 아니잖아요. 십 년·이십 년·삼십 년 근속상 받았는데, 이 회사에 온 몸을 다 바쳐서 일했는데 지금 당장 나가라는 게 말이 돼요?”

사측에서는 계속해서 ‘외부세력은 물러가라’고 선동했다. 그들이야말로 ‘외부세력’ 용역직원들을 공장 안까지 들였는데 말이다. 그쪽의 선곡은 ‘오 필승 코리아’였다. 이쪽 편의 선곡은 ‘연대투쟁가’. 아이들은 시끄러운 공방전 속에서도 새까만 팔과 다리를 내놓고 곤히 잠들곤 했다. 가족대책위 아내들은 농성장에 앉아 ‘오늘의 운세’를 펼쳐 본다.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운세가 나오자, “이건 점거 계속 유지하라는 얘기”라며 깔깔 웃는다.

파업 노동자들은 공장 옥상에 올라가 집회를 내다 봤다. 아내들이 “여보, 내 목소리 들려요? 나는 당신이 자랑스러워” 하며 팔로 하트를 그린다. 그러면 옥상의 남편들도 하트를 그린다. 

경찰은 정문 앞에서 크고 작은 실랑이가 벌어질 때마다 뛰어나와 용역깡패들을 보호했다. 경찰 헬기는 위험한 저공비행을 하며 가족대책위의 천막 농성장을 모래투성이로 만들었다. 깔아 놓은 돗자리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음식 위에, 자는 아이들의 머리 위에 온통 흙먼지가 쏟아졌다. 엄마들과 함께 모래로 뺨을 맞으며 ‘이것이 딱 이명박이 서민들을 대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대책위 한 분은 “전에는 아이들에게 ‘너희들 무슨 일 생기면 경찰 아저씨한테 가야 돼’라고 얘기했는데, 이제는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정말 암담해요” 하고 한숨을 쉰다.

공장 안에서는 오후 내내 용역직원들이 파업노동자들을 도발하면서 충돌이 벌어졌다. 양쪽 모두 부상자가 속출했다. 경찰은 다친 노동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의료진 출입조차 막았다. 그러나 길고 긴 하루는 결국 파업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용역 직원들은 모두 쫓겨나듯이 철수했다. 일당 20만 원 받고 싸우는 자들이 자신의 일생과 가족을 걸고 싸우는 이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금속노조의 연대파업 발표도 승리에 한몫 했다. 지켜야 할 것이 분명하고, 싸워야 할 이유가 분명한 노동자들은 오늘도 굳건히 파업농성장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파업에 대한 지지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는 얘기를 해 줄 때 가장 기뻐했다. 파업 지지 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경제 위기 고통전가와 노동유연화의 첫 희생양이 바로 쌍용차 노동자이고, 모두가 이들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감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선봉대 노동자가 이렇게 말했다. “상하이차에서 투자를 안 해서 문을 닫았는데, 회사는 아무 책임을 안 지고, 경영에 참여하지도 않은 노동자들한테 니들 잘못이니까 나가라는 거잖아요. 국가가 서민들을 버린 대표적인 케이스이고, 앞으로도 버리기 위해서 가장 ‘모범’이 되는 케이스가 아닌가 싶어요. [쌍용차 법정관리인] 이유일이 기자회견 할 때 그랬잖아요. ‘쌍용에서 정리해고를 못하면 현대, 기아에서도 못한다.’”

노동자들은 6월 10일 시청 광장 집회에 참가했을 때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맨첨에는 옥쇄파업이 답답했는데, 할수록 연대가 늘어나니까 되겠다 싶더라구요. 처음에 파업 2주면 망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안됐죠. 천 명에서 2백 명 빠졌다가 파업을 잘 버티고 이슈도 많이 되니까 다시 점거인원이 천 명 가까이로 늘었어요. 그 인원이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어요. 쌍용차 역사상 이렇게 오래 간 적이 없어요.”

“이명박 정권 하에서는 해고가 절대 강 건너 불이 아니라 발끝에 떨어질 불입니다. 현대, 기아, 대우 그쪽 [노동자들]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국민 여러분도 더 지지해 주시면 잘 해결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선일보〉와 강희락 경찰청장은 오늘도 ‘외부세력’ 운운하며 쌍용차 노동자들을 고립시키려 하지만, 오히려 우리 노동자·서민 모두를 위해 더 많은 ‘외부세력’이 쌍용차 노동자들과 함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