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연재의 첫번째 글로, 크리스 뱀버리(영국의 반자본주의 주간지 <소셜리스트 워커> 편집자)는 노동자 투쟁과 혁명 간 관계를 고찰한다.

1930년 11월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옥중에서 당대 경제 불황의 여파와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을 분석했다.

훗날 《옥중수고》에 수록된 이 글은 과거 그람시가 창당을 도왔던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부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이었다. 

안토니오 그람시

당시 이탈리아 공산당원들은 스탈린의 노선을 추종해 1929년 월 스트리트 붕괴가 자본주의 최종 위기이고, 노동계급의 혁명적 공세가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탈리아 청년 공산당원들은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제거하기 위한 ‘대중 사업’을 시작하려고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 들어왔다. 그러나 단 몇 주만에 그들은 파시스트 비밀 경찰에 의해 일망타진됐다.

체포된 공산당원 중 몇몇은 그람시가 수감된 감옥으로 이송됐는데, 혁명이 당면 의제라는 주장을 그람시가 비판하자 그들은 격렬히 반발했다.

그람시는 ‘기동전’과 ‘진지전’이라는 유명한 [군사 전략의] 비유를 들어 자기 의견을 설명했다. 기동전은 제1차세계대전 당시 동부 전선에서 진행됐던 전격전과 유사하다. 반면에 진지전은 서부 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에서 주된 전쟁 형태였던 참호전에 비유될 수 있다.

그람시는 이 비유를 이용해 경제 위기 상황을 분석했다.

“위기 상황이라고 공격군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순식간에 대오를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위기가 자동으로 투쟁 의지를 높이지도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수비군은 아직 사기가 꺾이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 자기 힘이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잃지도 않았고, 심지어 폐허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방어 거점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덧붙여 “물론 모든 것이 그대로는 아니다. 그러나 변화가 급격히 일어나지는 않고 있다” 하고 말했다.

1929년 대공황은 지배계급과 그 아첨꾼들의 자신감에 큰 충격을 줬다. [지배자들의] 혁명에 대한 공포가 경제 위기의 해결을 둘러싼 심각한 분열과 결합됐다.

즉, [경제 위기로] 좌파와 노동자계급에게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적들이 전장에서 도망간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 독재 권력이 노동계급 반란을 분쇄하고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원들이 사회당을 파시스트만큼 나쁘다고 공격한 것을 비판하면서 사회당이나 다른 세력들과 반파시즘 동맹을 건설하는 것이 옳았을 거라고 주장했다. 그람시는 설사 무솔리니 정권이 붕괴하더라도 즉각 혁명이 발생하지는 않을 거라 경고했다.

당시 노동자 투쟁은 성장중이었지만 당장 혁명적 결론에 도달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는 않았다.

세계 곳곳의 저항에서 당면 과제는 실업자 집단의 조직이었다. 시카고 청년 공산주의자들은 잘 곳을 찾아 간이 숙소로 모인 집없는 청년 실업자들을 조직했다. 영국의 전국실업노동자운동은 “기아 행진”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실업자 가족들이 먼저 재산을 처분해야 실업수당을 받을 수 있도록 한 정부 정책에 반대했다.

1933년 1월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자, 이에 충격을 받아 반파시즘 운동이 크게 성장했다.

1934년 2월 프랑스 파시스트들이 인솔한 시위대가 의회를 공격했고, 그 결과로 중도좌파가 주도하는 정부가 물러났다. 파시즘이 다른 모든 세력을 압도하는 듯이 보였다.

프랑스 노동조합들은 하루 총파업을 호소했고, 이 총파업은 곧 노조의 틀을 뛰어넘어 확산됐다. 수십만 명이 가두 시위를 벌였고, 파시스트들은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1934년에 경기가 조금 안정됐다. 이 두 가지 변화가 결합돼 프랑스에서 대중 파업 물결이 일어났다.

미국에서 기층 노동자들이 주도한 세 파업 ― 미니아폴리스 트럭 노동자들, 샌프란시스코 항만 노동자들 파업, 톨레도 타이어 노동자들 파업 ― 은 공장 점거로 연결된 대규모 파업 물결을 낳았다. 이 파업으로 자동차·타이어·철강 기업 노동자들이 노조로 조직됐다.

영국에서는 옥스퍼드를 지나가는 기아 행진을 환영하려고 만들어진 위원회가 코울리 자동자 공장에서 노조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성과급에 반대하는 파업을 벌인 영국 여성 노동자 수십만 명은 좌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들은 함께 현장 파업위원회를 건설했다.

노동자들은 이 파업으로 노동조합 승인을 얻어냈다. 이후 파업과 노동조합 조직은 항공산업, 자동차 공장, 광산, 심지어 견습 노동자들로 확산됐다.

1934~1936년 사이에 혁명으로 도약할 가능성이 힐끗 보였다. 그러나 승리가 미리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