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곳은 한국만이 아니다. 제국주의 옛 식민 지배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익숙한 광경이 중국에서 펼쳐지고 있다.

“분리주의 세력의 음모”를 성토하는 식민지 총독, 현지인들을 닥치는대로 잡아들이는 점령군, 잡혀간 부모·형제·자매·친구를 돌려달라고 울부짖는 현지인들, 현지인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흉기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본토’ 이주민들….

식민지 총독을 중국 공산당 지역 서기장으로, 점령군을 중국 인민해방군으로, 현지인들을 가족이 점령군에 잡혀간 위구르족들로, 본지 이주민들을 한족 이주민으로 바꾸면 바로 지금 중국의 신장위구르 자치지구 우루무치 시(市)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정확한 묘사가 될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7월 5일 우루무치에서 수백∼수천 명의 위구르인들이 6월 26일 광동성의 한 공장에서 위구르 노동자 2명이 집단 구타당해 숨진 사건을 조사해 달라고 요구하며 평화롭게 행진을 벌인 것이었다.

그 뒤 발생한 일은 중국 정부의 정보 통제로 다소 불확실하다. 그러나 많은 목격자들은 곤봉으로 무장한 중국 경찰들이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공격했다고 증언했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위구르인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한족 이주민들과 충돌했다.

중국 정부는 이 과정에서 1백50여 명이 죽었고, 사망자의 대다수가 한족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지난해 티베트 항쟁에서 희생된 티베트인 숫자를 왜곡 발표한 중국 정부의 작태를 보면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이 비극적 유혈 사태의 책임은 군사 점령과 대규모 한족 이주 정책 등 전형적인 식민화 정책을 편 중국 정부에 있다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 - 중국 제국주의

신장 지역은 1949년 당시 거주민의 다수를 구성했던 위구르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중국 정부에 강제로 점령됐다. 이 지역을 주변국에 대한 ‘완충 지대’로 삼기 위해서였다. 점령을 공고히 하려고 한족을 대량 이주시켰고, 반발하는 위구르인들을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그들의 종교인 이슬람을 탄압했다. 그 결과, 본래 6퍼센트에 불과하던 한족 비율이 1976년에는 42퍼센트로 늘었다. 이슬람 상징물들과 모스크는 ‘봉건 악습’으로 여겨져 철저히 파괴됐다.

위구르족에 대한 억압은 1980년 개방 정책 이후 잠시 완화되는 듯 했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다시 강화되기 시작했다. 대규모 한족 이주가 재개됐고, 우루무치 시 인구의 70퍼센트가 한족이 됐다. 위구르족은 교육, 고용, 공공서비스 등 모든 분야에서 차별받았다. 신장의 대규모 유전은 한족만 고용하며, 위구르족 평균수명은 한족 이주민보다 10살이나 낮다.

이맘[이슬람 지도자]들은 중국 정부에 충성을 맹세해야만 설교 허가를 얻을 수 있었고, 설교 내용은 철저히 감시받았다. 어떤 위구르 무슬림은 ‘정부가 허가하지 않은 판본’의 쿠란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또, 1996년 이후에는 이른바 ‘분리주의’ 세력을 색출하는 군사 작전을 주기적으로 벌여 한꺼번에 ‘용의자’ 수만 명을 잡아들이고, 그들 중 1백70명을 처형했다. 그러나 이런 공식 통계는 감춰진 희생자 수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예컨대, 1997년 2월 5일, 위구르 자치지구 이리(伊犁)시에서 위구르 학생들의 시위가 발생하자 중국 정부는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상당수 인권단체는 목격자의 증언을 기초로 당시 진압, 체포, 고문으로 위구르족 1천여 명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1990년대 이후 중국 정부가 탄압의 고삐를 강하게 쥔 이유는 우선 톈안먼 항쟁과 옛 소련과 동구권이 대중 항쟁으로 붕괴하는 것을 보면서 사회 전반에 탄압의 수위를 높일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가 약화되자 자신이 중앙아시아에서 패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생각했다. 자연히 중앙아시아와 인접한 신장 지역이 군사적 요충지가 됐다.

또, 신장이 중국의 최대 석유 생산기지가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점에도 주목했다. 이미 신장에서 중국산 석유의 약 25퍼센트가 생산되고 있다.

결국 중국 정부는 자신의 반민주적 독재를 유지하고, 제국주의적 야욕과 자원에 대한 탐욕을 채우기 위해 위구르인들을 속죄양 삼은 것이었다. 어제와 오늘 우리가 목격한 것은 이렇게 몇십 년 간 탄압받으며 쌓인 위구르인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중국 관영언론들은 ‘위구르족 폭도들의 폭력 행위’를 집중 보도하며 한족의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하고 있다. 신장의 한족 이주민들이 위구르족을 공격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중국 정부의 책임이다.

중국 언론의 태도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과거 1950년대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알제리인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무장 투쟁을 시작했을 때, 1960년대 미국 대도시에서 흑인 소요가 발생했을 때, 오늘날 팔레스타인 가자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에 저항할 때, 서방의 주류 언론들은 수십년 동안 피억압자들이 당한 고통·학살·수모를 무시한 채 이들의 ‘폭력 행위’를 비난하기 바빴다.

그러나 이들을 비난하기 앞서 이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중무장한 제국에 맞설 수단을 고를 때 과연 얼마나 선택의 여지가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문제 발생의 책임, 즉, 진정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중국 정부의 식민지 점령을 직시하는 것이다. ?

대안 - 한족 노동자·민중의 위구르족 연대

오랜 식민 지배와 억압에 맞선 위구르인들의 투쟁은 정당하다. 중국 정부가 당장 군사 점령을 중단하고 신장 위구르인들에게 민족자결권을 보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 지배자들의 이해관계와 우월한 군사력을 고려할 때 신장 위구르족이 승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신장 위구르 민족해방 운동은 지금 중국 지배자들의 모순과 탐욕에 맞서 싸우고 있는 한족 노동자·민중 투쟁 ― 집단 시위가 2008년에 18만 건, 2009년 상반기에 6만 건이 발생했다 ― 과 결합돼야 한다. 현대 중국의 역사에서 소수민족의 자결권 문제가 최초로 진지하게 제기됐던 것은 1920년대 중국 혁명기였던 점을 떠올려 보자.

지금 중국 지배자들이 한족 민주주의를 이용하는 것을 볼 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힐끗 보여 준 최근 선례가 있다.

20년 전 5월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대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 투쟁을 시작했을 때 신장에서도 이들의 행동에 고무받아 지지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는 곧 신장 위구르족의 자결권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톈안먼 광장에서는 위구르족이 지도자 중 한 명이 됐다. 비록 중국 정부의 탄압으로 베이징과 신장의 두 운동은 실패했지만 이것은 한족 노동자·민중과 소수민족이 공동의 적에 맞서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줬다.

오늘날 한족 노동자·민중 투쟁이 1920년대나 1989년 톈안먼 항쟁 같은 대규모 투쟁으로 발전한다면 신장 위구르족 등 중국 소수민족 해방 운동에 훨씬 유리한 조건이 조성될 것이다.

미국과 서방 정부의 ‘악어의 눈물’

미국을 위시한 서방 정부와 유엔은 ‘신장 사태’에 우려를 표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자격이 없다. 중국 정부가 위구르족을 탄압할 때 사용하는 이데올로기인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한 것이 바로 미국과 서방 정부들이었고, ‘테러와의 전쟁’에 정당성의 날개를 달아준 것이 유엔이었다.

또, 2002년에는 미국과 서방 정부는 신빙성 있는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위구르족 저항 단체를 “알카에다의 지령을 받는” 국제 테러조직으로 지목했다. 이 덕분에 중국은 위구르족 탄압을 ‘극단주의 세력’에 맞서는 세계적 전쟁의 일부로 거리낌 없이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유엔의 ‘테러와의 전쟁’은 중국 정부의 위구르족 탄압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제국주의 침략 정책에 불과하며, 오늘날 오바마 정부 아래 이름만 바뀐 채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계속 진행 중이다. 미국과 서방 정부, 유엔은 ‘악어의 눈물’을 흘리며 중국 정부에 우려를 표하기 전에 자신의 악행부터 참회하고 점령 정책을 중단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