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트반 메자로스는 게오르그 루카치의 제자이자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그의 《마르크스의 소외론》은 세계적 명저로 손꼽힌다.

소외는 문학 창작물뿐 아니라 철학, 정치학, 심리학과 사회학 저작에서도 가장 자주 접하게 되는 개념 중 하나다. 심지어 대중 매체에서도 거의 매일 접할 수 있다.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들이 어떤 형태로든 소외를 경험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소외의 경험은 부정적이어서 사람들이 이 고통스런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무언가 하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소외에 맞서는 것은 헛된 짓처럼 느껴진다. 왜 그런가? 전지전능해 보이는 이 소외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오랫동안 모든 인류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었는가? 또 어떻게 해야 이 소외를 없앨 수 있을까?

간단히 말해, 인간의 소외란 기본적으로 ‘통제력의 상실’을 뜻한다. 개인들이 적대적이고 해로운 힘으로 직면하게 되는 외부 세력에게 통제력이 넘어가는 것을 뜻한다. 그 속에서 개인들의 목표와 의도는 무시되고, 개인들은 외부 세력의 결정에 종속되게 된다.

마르크스는 《1844년 경제·철학 수고》를 쓰면서 네 가지 소외를 제시했다. (1) 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소외, (2) 자기 생산 활동으로부터의 소외 (3) 종(種)적 존재로서의 인간으로부터의 소외 (4) 다른 인간으로부터의 소외. 마르크스는 이런 소외가 결코 ‘어쩔 수 없는 숙명’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본래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갈등인 소외를 숙명으로 잘못 이해하면, 결국 소외를 해결하기보다 가만 놔두는 오류를 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소외가 사회적·역사적 발전에서 미리 결정된 과정이 낳은 불가사의한 결과가 아니라, 역사적 과정에서 인간의 의식적 개입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계에 종속된 인간 ─ 자본주의에서 인간은 자신의 생산물에 대한 통제권을 잃고 소외를 경험한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이 문제의 중요성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오늘날 인류의 생존 자체가 인간이 낳은 군사적 충돌과 자연 파괴로 위협받고 있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 자신이 인간 스스로에게 부과한 가장 극단적 형태의 소외다.

그러나 인간 문명의 잠재적 종말을 향한 위험한 과정은 중단없이 지속되고 있다. 마치 인간 문명의 파괴를 바라는 신비롭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뒤에서 그 과정을 조종하고 있는 듯이 말이다. 긍정적 결과를 바라는 인간 주체의 노력을 무로 돌리는 것만큼 소외의 힘을 정확히 보여 주는 사례가 또 있을까?

소외는 물질적 생산에서 예술 창작까지 모든 인간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 마르크스는 소외의 중요성을 강조한 최초의 사상가는 아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소외를 사회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인식하고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소외 문제를 완전 새롭게 해석했다.

마르크스보다 앞선 시대 사람 중에서 소외 개념에 가장 큰 중요성을 부여한 사람은 헤겔이었다. 그의 거창하고 관념론적인 추상 이론에서, ‘외재화’와 ‘대상화’는 동시에 필연적으로 소외를 야기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헤겔은 소외를 상상 속의 개념적 노력을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사회계급 간 불평등 같은 ‘외재화된 소외’의 가장 고통스런 표현조차 현실에서는 그대로 남겨두었다. 비록 헤겔이 사고 속에서 그들을 ‘극복’하고 ‘화해’시켰지만 말이다.

헤겔이 긍정적인 것으로 지목한 이런 ‘소외의 소외’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는 빈민의 종교적 체험이다. 헤겔은 빈민이 현실의 고통스러운 삶을 뒤로 하고 성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즉, 빈민은 ‘소외된 사회적 존재인 자신으로부터 자기 스스로를 상상 속에서 다시 한번 소외시킴’으로써 ‘왕자와 동등해 질 수 있다.’ 물론, 빈민이 성당을 떠나 자기 오두막으로 돌아가 자신의 본래적 존재를 회복할 때까지만 말이다.

마르크스는 다양한 형태의 소외 중에서도 노동의 소외가 가장 중요하며, 그것을 사회적 실천을 통해 해결할 수 있고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동일한 맥락에서 마르크스는 ‘외재화’(혹은 ‘삶의 발현’)와 ‘삶 활동의 소외’를 구분했다. 인간이 창조한 대상은 인간 생산 활동이 대상화·외재화한 것이며, 개인들 삶의 발현체다. 반면에 자본주의적 착취뿐 아니라 인간노동 ― 그리고 생산과정에 노동자의 능동적 참여 ― 을 통해 생산된 대상의 상품화는 삶 활동의 소외인 것이다.

자본주의 발전 과정은 보편적 판매 가능성이 일반화되는 과정이다. 심지어 예술과 문학 같은 가장 고상한 창조물을 포함해 인간노동으로 창조된 모든 대상은 판매가능한 상품으로 전화된다. 동시에, 산노동 자체도 물건, 즉 판매 가능한 상품이 돼, ‘노동시장’에서 사고 팔리게 되며, 결국 모든 인간관계가 ‘사물화’된다. 그에 따라 ‘상품 물신성’이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게 되면서, 상품 물신성 자체가 변할 수 없는 ‘자연질서’처럼 보이게 된다.

이런 인간관계의 실질적 전복(顚覆)과 ‘상품화’ 속에서, 사회적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개념들의 의미도 전복된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생산의 절대적·상대적 조건들 사이의 실제 관계도 거꾸로 뒤집힌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과 자연 전체를 연결해 주는 생산활동은 인간의 절대적 존재 조건이다. 그러나 자본이 자연의 영역을 끊임없이 침범하면서 이 연결이 약해지고 위험에 처하게 됐다.

동시에, 역사적으로 창조된(그래서 역사적으로 초월가능한) 자본주의 체제만의 부차적[상대적] 조건들이 절대화된다. 그것의 핵심 요소인 자본주의적 사유재산, 시장의 규제를 받는 교환, 구조적으로 부과된 위계적인 사회 노동 분업(지배 이데올로기는 이것과 생산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술적 노동 분업이 동일한 것처럼 말한다)과 현대 국가가 절대화, 혹은 ‘외재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 사회적·역사적 발전에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이런 실질적 소외 과정을 통해 자본 확대가 사회적 생산을 규제하고 다른 모든 것을 종속시키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 된다. 그 결과가 아무리 끔찍하더라도 말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필요를 ‘성장’과 거짓 일치시키거나, 인류 다수의 가장 기본적 욕구는 무시하면서도 이윤을 위해 ‘인공적 필요’를 창조하는 등 인간의 필요는 자본 확대의 필요성에 강제로 종속되면서 왜곡된다.

동시에 현대 국가 ― 자본주의 체제의 포괄적인 정치적 지휘통제부 ― 는 자본주의 사유재산 제도에 내재된 위계적·구조적 지배를 무력을 동원해 보호한다. 소외는 실제적 사회 과정이기 때문에, 오직 급진적이고 실천적인 대안 ― 진정한 사회주의적 전환 ― 만이 소외의 비인간적 영향을 치유할 수 있다.

우리는 사회 불평등과 소외를 ‘누진세 부과’로 ‘분배를 좀더 평등’하게 만들어 해결하려는 개혁주의 시도들이 갈수록 불평등이 심화하는 사회에서 철저히 실패하는 것을 목격했다. 또,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 때문에 그런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극소수가 생산수단을 독점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구조적으로 적대적인 사회계급으로 나뉠 수밖에 없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시도 ― 물론 개혁주의보다 좀더 고상한 의도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 로 미학적 교양을 통해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공상적 시도가 있다. 이것은 여러 형태로 시도됐지만 모두 실패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도 지적했듯이 “궁핍으로 찌든 사람은 최상의 연극을 만끽할 마음의 여유가 없고, 광물 상인은 광물에서 아름다움과 독특한 특성이 아니라 오직 상업적 가치만을 본다. 그는 광물학에는 관심이 없다.”

미학적 교양만이 아니라 교양 일반은 소외에 맞선 투쟁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급진적 사회 변화를 대체하는 공상적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그 변화와 밀접히 연관될 때만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장 급진적인 사회 변화만이 현실의 소외에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번역 차승일·김용욱
출처 : 영국 반자본주의 월간지 《소셜리스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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