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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방미 - 한미 동맹은 한반도 평화를 보장하지 못한다

노무현은 5월 11일 미국을 방문해 부시를 만날 예정이다. “친미적 자주”를 하겠다던 그는 집권 한 달도 안 돼 한국군 이라크 파병안 통과를 추진하는 등 미국과 확고한 동맹 관계를 맺는 것이 좋다는 결론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한미 동맹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아 줄 수 있다는 게 그의 이유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에서 보듯이 미국은 가차없이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동아시아에서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냉전기의 한미 동맹

냉전기 때 한미 동맹이 한반도에서 전쟁 억지력 구실을 하고 원조를 통해 남한의 경제 성장을 뒷받침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전쟁 억지와 원조 때문에 미국에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미국은 남한을 자신의 대소련 전초 기지로 삼으려 했을 뿐 남한 민중을 위해 봉사한 것은 아니다.

1945년부터 1990년까지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우두머리로 하는 양대 초강대국 제국주의 체제를 이루고 있었는데, 남한과 북한은 각각 미국과 소련 진영에 속해 있었다. 당시에는 어떤 국가든 두 진영 중 하나에 포함돼야 했다.

이 시기에 엄청난 양의 군비가 축적됐지만 강대국 사이의 열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미국과 소련이 상대방과 그 동맹국을 겨냥한 어마어마한 핵무기를 갖고 있었다는 게 전쟁 억지의 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 시기 동안 국지적 전쟁은 끊이지 않았지만 미국과 소련 사이에, 또는 둘 사이의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 국가들 사이의 충돌은 억지됐다. 이 때문에 여러 나라들이 불쾌한 불평등을 감수하고라도 소련과 미국의 날개 아래로 들어가려 했다.

미국이 제공한 ‘평화’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뜻에서만 소극적 의미의 평화였다. 무장한 평화, 억압적 평화였다.

해방 직후인 1946년 6월 한국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특별 대사인 에드윈 폴리는 트루먼에게 제출한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우리의 성공 여부가 달려 있는 이데올로기 전쟁터입니다.”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 조사는 한국인 다수가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선호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지만, 미군정은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을 모두 분쇄해 버렸다. 미군정기의 참혹한 학살 끝에 미군정은 친미 독재 정권을 세울 수 있었다.

그 뒤 미국은 계속 독재 정권들을 후원했고, 남한 노동자·민중은 그 밑에서 쥐어짜이고 짓눌려 살아야 했다. 냉전이 끝날 무렵 미국의 한 기업 간부는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 [남한에] 강력한 정부가 존재하면서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을 통제해 모든 것이 꽃피고 자라, 우리가 계속 이익을 낼 수 있기를 바랐다.”

냉전 해체 이후 한미 동맹

냉전이 해체되자 자유주의자들과 중도 좌파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여건이 조성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냉전 해체 이후에 한반도는 더 불안정하고 위험한 지역이 됐다.

냉전이 해체되자 이전에 양대 제국주의 진영에 속해 있어 경쟁이 억제됐던 국가들 사이에서도 경쟁이 다각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군사적 충돌로까지 치달을 수 있는 더 불안정한 세계가 됐다. 이라크 전쟁을 둘러싸고 벌어진 미국과 프랑스 사이의 갈등은 냉전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붕괴와 함께 샴페인을 터뜨렸지만, 이내 두 진영 모두에서 고개를 들이밀고 올라오는 경쟁국들 때문에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신세가 됐다. 특히 냉전기 동안 군사비 지출 부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국가들―일본과 독일 등―의 경제는 경쟁력이 급속히 강화되고 있었다.

오늘날 부시의 세계 전략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사용함으로써 자기와 필적할 만한 경쟁국이 출현하는 것을 막고 세계 패권을 유지하자는 것이다.

동아시아는 미국에게 경제적 중요성이 나날이 커지는 지역이며, 그와 동시에 세계 강대국들이 포진돼 있는 곳이다. 미국이 여기서 패권을 확고히 해 놓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유지하고 싶다 해도 무엇을 근거로 이 지역에 미군을 온존시킬 것인가?

미군은 냉전 해체와 함께 동아시아에 있을 명분이 없어졌지만, 지금껏 10만 미군을 유지하고 있고, 1996년에 미일 안보 조약을 새로 맺었고, MD체제를 도입하려 하고 있다. 그 명분이 바로 북한의 ‘위협’이었다. 북한이 미국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북한이 군사적으로 위협적으로 보이면 보일수록, 말이 안 통하는 불량배로 보이면 보일수록 좋았다.

그래서, 북한이 체제를 보장해 달라고 해도, 세계를 향해 문을 개방하겠다고 해도 미국은 번번이 문전박대를 해 왔다. 1996년 4월 김정일의 대외 경제 협력 부문 책임자인 김정우는 워싱턴에 파견돼 외국인 투자를 강력히 호소한 바 있다.

“우리는 세계가 하나의 자본주의 시장으로 통합되어 왔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그 속으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 경제에 필요한 고도 기술과 외국의 투자 자본을 시급히 유치하기 위해 보편적인 기업 형식과 기업 양식을 전면적으로 도입하고 있습니다.”

다음 해인 1997년 북한은 아시아개발은행 가입을 신청했으나 2000년에 미국과 일본은 모두 거부권을 행사했다. 2001년에 북한은 하와이에서 열리는 아시아개발은행 연례 회의에 업서버로라도 참가하기를 원했으나 미국은 아예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김정일은 1997년 8월 15일에 미국이 더는 북한의 적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미국은 지금껏 ‘그래도 너희는 우리의 적이다’는 식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냉전 해체 이후에 미국은 한반도 평화를 보장하기는커녕 전쟁 억지력의 구실도 하지 못하고 한반도를 점점 더 불안정에 빠뜨리고 있다. 한반도에서 위기를 끊임없이 부추기는 게 오히려 미국의 이익이다. 이런 미국과 동맹을 굳건히 함으로써 평화를 보장받겠다는 것은 몽상일 뿐이다.

한반도 평화와 세계 체제

하지만 남한 지배계급은 미국에 대항할 만한 세력이 되지 못할 바에야 확실하게 미국에 붙는 게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경제적 이유도 있다. 전경련이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노무현 정부에 주문한 바 있다. 대미 수출은 전체 수출액의 20.7퍼센트를 차지한다. 1970년대 50퍼센트였던 것에 비하면 이 비율은 많이 줄어들었고 대신 대중국 수출이 늘어났다. 하지만 질적인 측면을 따져 보면 대미 수출의 중요성은 여전히 크다. 남한의 주요 수출품인 자동차, 무선 통신 기기, 반도체, 컴퓨터 등의 미국 시장 의존도는 25∼45퍼센트에 이른다.

한편, 중간 계급과 정부·의회의 일부는 한미 동맹이 좀더 평등하게 바뀌어야 하고 외교 관계도 다각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냉전 해체 이후의 제국주의 질서를 반영하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국정원 기조실장 내정자 후보 서동만과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 이종석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저한 책 〈한반도 평화 보고서〉에서 “탈냉전의 흐름은 기존의 한미 동맹 체제에도 원심력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복잡다단하게 경쟁이 이뤄지고 있는 세계에서 남한도 국익에 따라 대외 관계를 다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 내 이런 흐름을 경계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자인 스티브 글레인은 최근에 “남한은 북한이 아닌 잠재적 적국으로부터 방어할 능력을 강화하고 싶어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 그리고 “남한의 군사 계획 입안자들이 일본에 대한 방위를 의미하는 전방위 방어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다”고 경계했다. 미국은 남한이 북한과 독자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중국·러시아 등과 더 가까워질까 봐 걱정하고 있다.

노무현은 “친미적 자주”를 주장해 왔으나, ‘북핵’ 위기와 이라크 전쟁이라는 현실에 부딪혀 일관되지 못하고 허약하게 동요했다. 그러다가 결국 미국의 학살 동맹에 참여했고, 최근엔 한미 동맹의 사활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노무현은 남북 화해와 한미 동맹을 동시에 추구하다 진창에 빠진 김대중의 복사판이 될 수 있다. 이런 그에게 한반도 평화의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된다.

설사 전통적 한미 동맹이 약화되고 다자간 외교 관계가 진전된다 해도 이것이 한반도 평화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주한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된다 해도 한반도 평화가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만이 평화를 위협하는 전쟁광인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 열강인 일본·중국·러시아 등은 모두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고, 경쟁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군사력 사용을 마다하지 않아 왔다.

주한 미군 철수가 동아시아의 현재 세력 균형을 깨 일본이 부상하면 이것이 이번에는 중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을 부를 수 있다. 북한의 김병홍 외교부 정책기획 국장은 주한 미군의 철수가 아니라 지위 변경을 요구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한반도는 러시아, 중국, 일본 등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미군 철수가 지역 차원의 세력 균형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야 합니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철수하게 된다면 일본이 즉각 재무장에 나설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점을 남한 지배자들도 걱정한다.

서로 갈등하는 제국주의 세력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한반도 평화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구한말 상황은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대한제국은 일본과 러시아와 청나라에 의존해 이들을 견제하려 했다. 동학농민들이 반외세·반봉건을 외쳤을 때 대한제국은 농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를 끌어들였다. 그 뒤 대한제국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참화에 휘말렸고,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남한 지배 계급도 호전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 전쟁 휴전 협정을 반대하며 무력 통일을 계속 주장했다. 그 뒤 미국은 호전적인 남한 지배자들이 미국의 의사를 거슬러 전쟁을 일으킬까 봐 전시 군사작전권도 주지 않았다. 두 차례 서해 교전에서 이런 호전성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분명히 드러낸 바 있다.

소수 강대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주의 질서가 계속되는 한 남북은 전쟁의 참화에 언제든 휘말릴 수 있다. 어느 제국주의 세력에도 의존하지 않고, 제국주의 질서 자체에 도전하는 근본적인 사회 변혁을 통해서만 한반도, 나아가 세계 평화는 비로소 보장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