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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몰락 20주년:
두 얼굴의 ‘민주주의’

1989년 폴란드 민중은 민주주의를 요구했지만 20년이 흐른 지금, 폴란드 경제는 여전히 한 줌도 안되는 엘리트들이 통제하고 있다. 영국의 계간 사회주의 이론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편집자 크리스 하먼이 이러한 간극의 배경을 설명한다. 크리스 하먼은 다함께가 주최하는 진보 포럼 ‘맑시즘2009’의 주요 연사로 참가할 예정이다.

기념식이 늘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폴란드 지배자들은 지난달 그단스크시(市) 조선소 밖에서 기념식을 열고자 했다. 1989년 여름, 40여 년 만에 최초로 자유선거를 치른 폴란드와 헝가리의 정치적 변화를 기념하려는 것이었다.

그단스크는 폴란드 저항 운동의 요람 같은 곳이다. 그래서 폴란드 저항 운동의 적자를 자처하는 총리 도널드 투스크는 애초 이곳에서 기념식을 열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기념식 장소를 폴란드 영토의 반대편 끝 크라코프로 옮겨야 했다. “이 기념식이 경찰과 노조원들의 격렬한 전장으로 바뀔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폴란드 라디오는 보도했다.

그랬다면, 총리는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날 기념하려 했던 변화를 바로 그단스크 노동자들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1989년의 진정한 의미도 드러났을 것이다.

1989년 5월 1일 바르샤바에서 연대노조 깃발과 배너를 들고 행진하는 시위대

서방 언론들은 1989년을 한편에선 자유와 민주주의가 도약한 해로, 다른 한편에선 ‘사회주의’의 경제적 파산을 증명한 해로 묘사해 왔다. 헝가리 의회에 최초로 입성한 저항 운동가 GM 타마스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최근 호[123호, 2009년 여름호]에서 주장했듯이, 이것은 당시 저항 운동 지도자들 압도 다수가 받아들인 환상이기도 했다.

수많은 노동자·학생·농민·지식인 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는 중요한 문제였다. 자유와 민주주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독립노조를 통해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할 수 없었고, 지배자들의 행위에 의회 절차를 통한 제한적인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989년의 변화는 아주 제한된 형태의 자유와 민주주의만을 가져다 줬다.

표현의 자유는 있지만 그것을 행사하는 수단은 여전히 극소수 특권층이 통제하고 있다. 국영 언론이 백만장자에게 넘어갔을 뿐이다.

민주주의 제도들은 서방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협소한 의미에서 ‘정치적 문제’에 한정됐다. 대중은 자기 삶의 상당 부분을 결정하는 경제적 문제, 즉, 누가, 무엇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지를 전혀 통제할 수 없다.

개혁은 점차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다. 한편에서 대중에게 국가에 대한 통제권을 아주 조금 허용하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에서 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대중이 아니라 사적 자본가들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통제권

1989년은 동유럽과 옛 소련에서 실시된 경제 조처들이 거의 파산했다는 것이 아주 분명히 드러난 해였다.

전후 20~30년의 고성장 국면이 끝나자 위기가 다시 찾아오고 있다는 것이 갈수록 분명해졌다. 1970년에 이미 심각한 위기를 겪은 폴란드는 1970년대 말에 다시 위기를 겪었고 1980년대 초에는 심각한 경기침체에 빠졌다. 헝가리는 ‘굴라시 공산주의(소비 물자 증산과 생활 수준 향상을 강조한 헝가리 정부의 경제정책)’ 시행을 위해 서방 은행들에게서 막대한 외채를 끌어들여 처음에는 어려움들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돈을 갚아야 할 때가 되면서 헝가리 경제도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옛 소련도 경제 위기에 들어서고 있었다.

경제 위기 때문에 지배자들은 대처 방식을 둘러싸고 심각하게 분열했고, 대중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1980년, 폴란드에서는 사상 최대의 노동자 운동이 등장했다. 노동자들이 점거한 조선소와 공장에서 선출된 대의원들로 구성된 폴란드 연대노조(솔리다르노시치)는 16개월 동안이나 폴란드 국가와 거의 맞먹는 대항 권력으로 존재했다.

이 운동은 1981년 말 군사 쿠데타로 분쇄됐다. 그러나 폴란드 정부 문서를 보면, 1988년 소규모 파업이 번지기 시작하자 지배자들은 대항 권력이 다시 등장할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이들은 저항 세력들과 전례 없는 “원탁회의”를 하기로 결심했다. 정권의 상층부는 혁명을 막으려면 개혁을 허용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즉, “현상 유지를 위해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지배자들과 협상에 나선 것은 노동자들이 직접 뽑은 대표자들이 아니라 대체로 지식인들이었다. 이 지식인들은 시장과 민주주의가 번영과 자유를 약속하는 쌍둥이라며 노동자들에게 개혁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이런 주장에는 늘 결정적 문제가 있다. 동유럽의 구체제는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사회주의의 핵심이라고 생각한, 노동자들이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계획에 바탕을 둔 사회가 아니었다. 이 체제는 엄청난 특권을 가진 독단적 지배자들이 운영했고 서방 국가들과 경제적·군사적으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이것이 그 체제의 경제적 동학을 결정지었고 동유럽 경제는 갈수록 스테그네이션과 위기로 치닫는 경향을 보였다.

1989년의 변화도 이런 경향을 없애지 못했다. 세계 시장이 낳은 문제들이 세계 시장에 더 많이 노출된다고 해서 해결될 순 없었다. 경기침체를 거듭하던 동유럽과 옛 소련 경제는 결국 1990년대 초 심각한 불황에 빠졌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간간이 회복 조짐을 보이긴 했지만 오늘날 동유럽은 경제 위기에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지역이다.

동유럽 대중은 하나의 자본주의 체제를 또 다른 자본주의 체제로 바꿨지만 그것이 썩 좋은 거래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이 쓰라림이 기념의 요지다.

번역: 조명훈 기자
출처: 영국 반자본주의 월간지 《소셜리스트 리뷰》 2009년 7·8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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