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중앙위원 크리스 하먼이 다함께 주최 진보포럼 맑시즘2009에서 한 폐막 연설을 옮긴 것이다. <레프트21>은 크리스 하먼의 다른 연설들 ― 오늘의 세계경제 위기, 오늘의 제국주의, 21세기 노동계급 ― 도 차례로 연재할 예정이다.

우리는 다중적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다중적 위기라 함은 지금까지 삶이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고 믿어 온 수많은 사람들을 더는 견딜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고 있는 복수의 위기를 말합니다.

먼저 경제 위기가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IMF 위기 이후] 10년 만에 두 번째 경제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경제가 성장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말을 지겹게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1997~1998년에 여러분은 이 말이 얼마나 거짓인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2000년대 초에 한국 사람들은 ‘이제 위기는 과거지사이고 앞으로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다’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2년 전부터 미국에서 새로운 경제 위기가 발생해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로 확산됐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인 미국에서 사람들이 집과 일자리를 잃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엄청난 광경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모든 유럽 국가에서 사람들이 직장에서 쫓겨나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20년 전에 ‘이제 시장 자본주의 아래 장밋빛 미래가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던 동유럽에서는 대량 실업과 시위가 이어지고 있고 사람들이 절박한 처지로 내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또 중국 지배자들은 ‘1989년의 민주주의 운동 탄압은 이제 잊어라. 자본주의가 당신들을 부유하게 해 줄 것이다’ 하고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동부 연안의 경제 특구에서 일하던 농민공 2천만 명이 이제 경제 위기 때문에 일자리를 잃고 내륙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나라들은 그래도 비교적 부유한 나라들입니다.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남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지금 경제 위기로 인해 10억 명 이상이 기아선상에 놓이게 될 처지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언론에 나오는 경제 전문가들은 ‘걱정마라, 경제 위기는 1, 2년이면 끝날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은, 설령 이번 위기가 1, 2년 안에 끝나더라도 5년이나 7년 안에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는 점입니다.

또 하나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은 세계 각국 정부가 복지혜택과 공공부문 임금 등을 삭감하는 방식으로 이번 위기의 대가를 평범한 사람들에게 떠넘길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또한 자본주의가 더는 은퇴한 사람들을 돌볼 여력이 없다는 놀라운 말도 하고 있습니다. 지난 20년, 30년, 혹은 40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 이제 은퇴할 나이가 된 사람들이 갑자기 남은 10여 년의 인생을 빈민으로 살아가야 할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21세기의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생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 위기가 전부가 아닙니다. 지난 20년 동안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전쟁을 양산했습니다. 이라크와 이란 사이에 오랜 전쟁이 있었고, 거기서 미국은 이라크를 편들었습니다. 그랬던 미국이 1991년에는 연합군을 조직해서 이라크를 공격했습니다. 다음으로 미국은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세르비아를 공격했습니다. 이어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공격했습니다.

전쟁과 빈곤을 낳는 자본주의의 모습 미군 점령하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촌

그와 동시에 세계 각지에서 끔찍한 내전이 이어졌습니다. 옛 소련 지역에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서방 기업들의 후원을 받는 군벌들이 천연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려고 끔찍한 내전을 벌였습니다.

이 같은 내전들은 한국전쟁만큼이나 참혹했습니다. 콩고 내전으로 4백만~5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라크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심지어 파키스탄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파키스탄과 인도 둘 다 핵무장 국가이고, 5~10년에 한 번씩 핵전쟁 직전까지 가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는 경제 위기뿐만 아니라 전쟁의 공포가 인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두 가지보다 어떤 점에서는 더 심각한, 세 번째 위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바로 기후 변화입니다. 기후 변화의 근본 원인은 대기 중으로 온실가스를 내뿜는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에 있습니다. 이로 인해 지구의 기온이 계속해서 상승한다면 인류의 생활 방식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것입니다. 방대한 지역이 기후 변화의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나일강 삼각주, 방글라데시 같은 곳이 물에 잠기는 사태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기후 패턴이 바뀜에 따라 현재의 농경 지역에서 더는 농경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지배자들 자신도 기후 변화의 위험성을 인정합니다. 10년 동안 기후 변화라는 현실을 애써 부인해 온 미국 지배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막상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각국 지배자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기가 막히게도 지난 2년 동안은 세계 각국 정부가 말로는 기후 변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한층 더 높여 왔지만 경제 위기 때문에 각국 자본가들의 친환경 투자는 오히려 하락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각국 정부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조처를 일부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기후 변화로 인해 식량난이 더욱 가중될 것입니다. 그런데 기후 변화에 대한 자본주의적 해결책은 어이없게도 일부 식량을 대체 연료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옥수수의 3분의 1이 대체 연료 생산에 투입되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는 디젤 연료의 대체 연료인 팜유를 생산하기 위해 전 국토를 야자수 농장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유엔(UN) 산하 기관들이 세계 각지에서 기아 사태가 발생할 위험을 경고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자본가들의 눈먼 경쟁이 위기의 원인

이처럼 경제 위기는 기후 변화를 막는 데 필요한 재원 투입을 축소시키고, 기후 변화는 식량난을 심화시키며, 식량난은 전쟁 위험을 증폭시키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고, 이 같은 악순환이 21세기 내내 지속될 전망입니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21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자본주의가 인류를 멸종시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이 모든 참상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세계 도처에서 자본주의는 숨 막히는 억압을 조장합니다.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수많은 사람들이 의식주도 해결되지 않고 위생도 열악한 슬럼가에서 도시 빈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여성에게는 일과 양육을 모두 책임지라는 끔찍한 압력이 가해집니다. 태국 같은 나라의 많은 여성들에게는 서구의 부유한 관광객들에게 몸을 파는 것 외에는 생계를 해결할 수단이 없습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부유한 나라로 이주해 온 노동자들은 막상 부자 나라에 가서도 인종 차별을 부추기는 언론 매체들에게 뭇매를 맞습니다. 그리고 세계 어디서나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일하지, 일하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잘 나가는 사회학자들은 이 모든 억압이 서로 별개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전쟁이 경제 위기와 무슨 상관이냐고, 기후 변화가 자본주의와 무슨 상관이냐고, 여성 억압이 계급과 무슨 상관이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 모든 억압의 배후에 서로 경쟁하는 자본가들의 눈먼 축적 경쟁과 이윤 추구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바로 이 눈먼 경쟁 때문에 자본가들은 대기 중에 독가스를 배출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눈먼 경쟁 때문에 자본가들은 국가를 이용해 서로 전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 눈먼 경쟁 때문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분열시켜 성이나 인종 등에 따라 서로 반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이 눈먼 경쟁 때문에 여성들은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 취급당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에서 저항은 필연적

자본주의에 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이것뿐이라면 정말 아무런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는 다른 측면도 하나 있습니다. 착취와 억압을 비롯한 자본주의의 폐해가 나타나는 곳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저항도 나타납니다. 마르크스는 1848년에 ‘때로는 은폐된, 그러나 때로는 공공연한’ 계급투쟁을 이야기했습니다. 지주에게 수탈당하는 농민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지주들에 대한 반감이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일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관리자들에 대한 반감이 존재합니다. 전쟁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국가가 저항을 억누르려고 경찰력을 증강하려 할 때마다 누군가는 이를 비판합니다. 이 모든 반감이 공공연한 저항으로 갑자기 분출해 나오는 경우를 우리는 거듭거듭 목격해 왔습니다.

온두라스 군부의 쿠데타에 항의하는 시위대

한 예로 중국 농민들의 저항을 들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중국에서 1년에 농민 시위만 3천~4천여 건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온두라스의 군부 쿠데타에 맞선 저항은 또 다른 사례입니다. 영국·프랑스·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해고에 맞선 투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배계급 내의 한 분파에서 시작해 학생들로, 이어서 노동자들로 번진 이란의 민주화 투쟁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야만에 맞서는 21세기의 저항은 이 다양한 투쟁들을 하나로 모으는 노력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때로는 이 일이 매우 쉬워 보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다른 사람들도 이 체제에 똑같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다 함께 투쟁에 나서는 순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그마한 불씨가 들불을 일으키는 듯한 상황 말입니다.

지난 20년 사이에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프랑스 사회를 마비시킨 1995년 11월의 공공부문 파업이 그랬고, 군부독재를 물러나게 한 1987년 남한의 대중 시위와 파업이 그랬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할 것 같았던 독재 정권들이 갑자기 무너져 내린 1989년 동유럽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동유럽 지배자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민주주의자 행세를 해야 했습니다. 그때 이후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를 행동으로 표출하면서 갑자기 자신들의 힘을 자각하게 된 사례들이 많습니다. 버마 항쟁, 이란의 민주화 시위, 4년 동안 네 개의 정부를 전복시킨 라틴아메리카의 저항 등.

그러나 대중적인 분노가 있음에도 사람들이 자신감이 없어서 싸우지 못한 사례도 많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체제에 맞서 투쟁하려는 사람들 자신이 사기저하되기도 쉽습니다. ‘세상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체념에 빠지기도 쉽습니다. 자본주의 언론들은 언제나 이 같은 체념을 조장합니다. 만약 당신이 마르크스주의자 출신으로서 ‘세상은 바뀔 수 없다’는 주장을 한다면 주류 언론은 반드시 당신을 찾아내서 당신의 칼럼을 지면에 실어 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철학자나 사회학자로서 세상이 바뀔 수 없는 이유에 관한 두꺼운 책을 쓰기라도 한다면 당신은 대학 사회에서 승진가도를 달릴 뿐 아니라 당신의 책은 모든 학생들의 필독서로 지정될 것입니다.

반면 투쟁을 통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지식인 사회에서 괴짜 취급당하거나 최악의 경우 학교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세상은 항상 바뀝니다. 자본주의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관념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려 하지만 자본주의 자체가 항상 모든 것을 갈아엎으면서 수많은 이들의 삶에 격변을 불러옵니다.

저는 지난 6개월 간 영국에서 벌어진 두 건의 점거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과 대화를 나눠 볼 행운을 누렸습니다. 두 경우 모두 점거 파업 참가자들은 자신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번 경험을 통해 우리의 세계관이 180도 변했다’고도 말했습니다.

아마 지난해 한국에서 촛불운동에 참가했던 수많은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촛불운동처럼 큰 운동이 결국 승리하지 못하면 많은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서 사기가 떨어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더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대중 투쟁이 벌어질 것입니다. 투쟁이 어디서 분출해 나올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습니다. 수억 명의 의식 상태를 훤히 꿰뚫어 보면서 그들이 어느 시점에 분노와 좌절감을 떨쳐내고 투쟁에 나서게 될지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투쟁이 분출해 나오리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금속으로 된 물건을 부러뜨리려면 먼저 그 물건을 여러 번 구부려야 하는데, 처음에는 아무리 구부려도 부러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계속하다 보면 결국에는 부러집니다. 대중의 분노도 언젠가는 터져 나오게 돼 있습니다.

네트워크 구축의 중요성

그러나 이 대목에서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됩니다. 대중의 분노가 분출할 때마다 지배자들은 그 분노가 기존 사회 질서의 전복으로 나아가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부추깁니다. 극우 언론들은 대중의 분노가 소수 인종 집단을 향하도록 부추길 것입니다.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당신들이 화내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직접 행동에 나서지 말고 우리에게 맡겨 달라’고 할 것입니다. 아마 투쟁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 말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 손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유주의 언론도 그러한 태도를 장려할 것입니다. 평상시에 매우 우파적이었던 언론들조차 이런 때에는 운동을 지지하는 척 하면서 그러나 ‘점진적이고 평화로운 방식을 추구할 것이며 너무 나가지 말라’고 훈수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적 투쟁이 분출하기 오래 전부터 투쟁이 승리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학생과 지식인 들 사이에서 네트워크를 미리 구축해 놓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세계 어느 곳의 작업장이든 체제에 맞서 싸워야 할 필요성을 본능적으로 이해하는 소수의 노동자들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임무는 그런 사람들이 한데 모여 체제 변혁의 방법을 논의하고 과거의 체제 변혁 시도에서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그들을 규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이들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작은 투쟁들에 지도력을 제공하고, 그러한 투쟁들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작은 승리를 통해 이들은 훨씬 더 큰 투쟁이 아무도 예상치 못한 시기에 분출했을 때 그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노하우를 축적할 것입니다. 거대한 투쟁이 결국 체제에 타협하고 순응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기존 체제를 전복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승리 말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지금 상태로 계속 굴러가게 놔둬도 별 문제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본주의를 철폐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지금 이대로 계속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세계를 파멸로 몰아갈 것입니다. 폴란드계 독일인으로서 위대한 혁명가였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인류가 직면한 선택이 사회주의 아니면 야만주의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옳았음은 제1차세계대전과 1930년대의 스탈린주의와 나치즘을 통해 입증됐습니다. 오늘날의 인류도 비슷한 선택에 직면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끔찍한 독재자들과 전쟁만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 자체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녹취·번역 천경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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