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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원고》:
인간 영혼의 거대한 무덤을 고발하다

20세기의 결정적 시기에 스탈린주의는 문학과 예술에서 핵심 문제였다. 왜냐하면 잊혀진 목소리를 표현하려 한 대다수 사람들은 스탈린주의가 그 목소리를 무시했을 때조차 러시아에 일체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회적 리얼리즘과 사회적 모더니즘 시도들은 1934년 소비에트작가회의가 선전한 교리 때문에 질식사했다. 공식 용어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불렸는데, 이 용어는 수백만 명이 우크라이나 등에서 아사하고 있는데도 인민의 생활수준이 개선되고 있다는 통계 수치와 마찬가지로 거짓말이었다.

존 버거가 지적했듯이, 스탈린주의 시대에 시각 예술은 한 세기 전 궁중 회화의 전도였다. 웃고 있는 말끔한 차림의 농민과 노동자가 한때 왕과 황제에게 그랬듯이, 용맹스럽게 묘사된 당 지도자들을 경축한다.

그런 작품으로 펜과 붓을 더럽히려 하지 않은 사람들은 운 좋으면 출판사와 갤러리에서 거부당하는 정도였고 운이 나쁘면 이삭 바벨처럼 굴라크(강제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라진 원고》 (트래비스 홀랜드 지음, 정병선 옮김, 난장이, 12,000원, 384쪽) ●구입

트래비스 홀랜드의 《사라진 원고》는 이삭 바벨을 모티브로 삼은 소설이다.

이삭 바벨은 초기 소비에트 러시아 시대의 최고 작가 중 한 명이다. 1894년 흑해의 번창한 항구 오데사에서 태어나 유대인 마을(shtetl)에서 자란 바벨은 1916년에 제1차세계대전의 혼란 한복판에 있던 도시 페트로그라드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당대의 주요 좌파 작가인 막심 고리키를 만났다. 고리키는 바벨에게 글쓰기를 권했다. 고리키는 바벨의 예리하고 사실주의적인 스타일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삶에 더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바벨은 20세기 가장 참혹했던 러시아-폴란드 전쟁에 참여했다. 1920년 여름 폴란드는 제국주의 열강의 후원을 받아, 내전으로 기진맥진한 소비에트 공화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몇 달 동안 유대인 바벨은 잔인무도한 반유대주의자 카자크 병사들 속에서 살았고 글을 썼다.

바벨의 대표작 《적군 기병대》(국내에는 지만지고전천줄에서 《기병대》라는 이름으로 부분 번역했다)는 이 경험에 바탕한 것이다. 《적군 기병대》는 반쯤 자전적인 경험을 담은 단편 40개 모음집이다. 모더니즘 스타일의 이 소설은 폴란드 전쟁의 무용담보다는 전쟁의 끔찍한 참상, 약탈, 살육, 강간 등을 묵묵히 다룬다. 책은 출판 즉시 성공을 거뒀고 바벨의 명성을 널리 알렸다. 나치 시대 독일에서는 금서 목록에 올랐다.

그러나 적군 기병대의 유명한 지휘관인 부조니는 이 소설에 맹공을 퍼부었다. 다른 상급자들도 자신들을 얄팍한 인물로 묘사한 것에 화를 냈다.

스탈린 독재가 강화되자 1934년 소비에트작가회의에서 바벨은 스스로를 “[‘문학적 침묵’이라는] 장르의 대가”라고 칭했다. 그것은 체제에 대한 비판을 함축했다. 여기에 《적군 기병대》 때문에 생겨난 강력한 적들도 있었다. 결국 바벨은 1939년 5월 체포됐고, 1940년 초에 루뱐카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바벨의 작품들에는 제1차세계대전 전야, 내전, 스탈린 치하에서 질식사당한 모스크바의 혁명, 강제집산화 초기 우크라이나 등의 러시아가 있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모든 것들을 날카롭게 비판했고 환상 없이 소비에트 권력을 지지했다.

홀랜드가 이삭 바벨의 전기적 사실에 바탕해 쓴 《사라진 원고》에는 바벨이 체포당한 시기, 1939년의 모스크바가 암울하게 묘사돼 있다. 악명 높은 루뱐카 감옥, 스탈린-히틀러 불가침조약을 무비판적으로 옹호하는 신문 기사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에 침묵하는 ‘사회주의’ 언론들, 공사 기한을 맞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체포당하는 노동자 등.

그러나 스탈린 체제에 대한 조롱과 저항도 있다. 공문서 관리인인 주인공 파벨은 엄청난 개인사적 비극을 낳을지도 모를 저항, 즉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바벨의 원고를 숨겨 후대에 전하려는 시도를 한다.

이 소설을 보면서 과거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공포를 직시한다면, 그 공포는 우리 시대의 것과 너무나 흡사해 스탈린주의 러시아는 우리가 가야 할 더 나은 곳이 아님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