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과학》 편집위원회는 올 여름호에서 “7대 미디어 악법이 2009년 하반기 국회에서 통과한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 ‘위로부터의 파시즘’의 등장 가능성은 이번 6월과 이후 국회에서의 악법 통과 여부에 달려 있다”(“역사적 파시즘과 ‘파시즘X’”)고 경고했다.

‘불법’ 날치기가 강행됐고, 쌍용차에선 ‘초법’적인 탄압이 자행되고 있는 요즘 과연 파시즘이 오고 있는지 묻게 된다.

지난해 촛불 항쟁 이후 인터넷에서 이명박과 파시즘을 연관 짓는 다양한 창작물들이 넘쳐났다. 주로 재기 넘치는 젊은이들이 만든 이 표현물들은, 1987년 이후 ‘민주화’ 속에서 자라난 세대에게 이명박 정부의 ‘거꾸로 가는 민주주의’가 큰 충격이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

1930년대 독일 나치 집회 파시즘을 단순히 권위주의나 독재 정부와 동일시하는 것은 그 위험성을 간과하고 올바른 대응 방안을 찾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이들의 “이명박=파시즘”론은 엄밀한 학문적 정의보다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레토릭(수사) 차원이었다. 지난해 〈한겨레21〉(725호)은 이런 분위기에서 이명박과 히틀러를 나란히 세워 놓고 ‘파시즘의 전주곡’이라는 표제를 달았다.

맞든 틀리든 ‘파시즘’ 딱지를 붙이는 것은 이명박 정부가 화해나 타협이 불가능한 정권이라는 인식을 강화한다는 장점은 있다. 이명박이 파시즘이라면 “퇴진” 외에 다른 어떤 대안이 있을 수 없다. 의회 민주주의조차 부정하는 정권과 정치 협상을 통한 해결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이광일 교수는 “이명박 정권이 합법적인 절차에 의해 선출되었기에 그것에 선택적으로 협조해야 한다는 논리는 가장 합법적이기에 가장 설득력이 없는 주장”(《문화과학》 여름호)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 퇴진 구호와 요구는 촛불 항쟁 때부터 계속 제기되고 있고 광범한 대중적 공감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장점에도 파시즘을 느슨하고 부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런 느슨하고 부정확한 정의에 따라 노무현 정부조차 공개적으로 ‘파시즘’이라고 비판 받은 적이 있다. 물론, 이런 주장들이 나왔던 2003년 부안(핵폐기장)과 2006년 평택(미군기지)은 폭압적 시위 진압이 매일 벌어졌다.

파시즘 개념을 느슨하게 사용하는 것은 대체로 ‘파시즘’을 권위주의적인 독재 체제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과 연관이 있다. 특히 언론과 인권 문제에 주목한다. EBS의 지식e-채널은 이명박의 언론 정책을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와 연관시켰다. 최근 리영희 교수가 “인권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그런 파시즘 시대의 초기에 들어서 있다”고 발언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신자유주의 파시즘”론은 느슨한 파시즘 용어법의 좌파 버전이다.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준비모임 고민택 씨는 “‘파쇼적’이라 할 때, … 그것은 자본의 문제를 끊임없이 다른 무엇으로 전가시키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문화과학》 여름호)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는 제복 입은 독재자 대신 시장이 전체주의 지배자 노릇을 한다. 이리 되면 자본주의가 바로 ‘파시즘’이다.

이런 점에서 “파시즘을 정확한 기술적 용어로 쓰지 않고 일종의 유행어로 안이하게 남발하는 것은 파시즘을 예방하기보다는 오히려 파시즘의 독성에 무감각해질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조효제 교수)는 지적은 타당하다. 따라서 우리는 파시즘을 역사적·과학적으로 분명하게 규명해야 한다.

‘역사적 파시즘’

자본주의 경제 위기는 소자산가들부터 파탄 낸다. 대자본에 맞설 권력 자원도 없고, 노동계급처럼 스스로 조직해 집단적 힘을 발휘할 처지도 안 되는 소자산가들은 자본주의에서 ‘먼지 같은 존재들’이다.

이들 중간계급이 파시즘 대중운동의 주역이다. 첨예한 위기의 시대에 몰락하는 이들 중간계급은 대자본과 노동계급을 모두 비난하며 행동한다. 그래서 이들의 초기 강령에는 ‘반(反)자본주의’와 ‘반(反)사회주의’가 섞여 있다. 그들은 소자산가가 우위에 서는 경제를 바란다.

이들의 성격 때문에 파시즘 당은 자기 힘으로(‘대중 혁명’으로) 집권할 수 없다. 스스로 세상을 주조할 수 없기에 누군가가 이들을 구원해 권력으로 ‘끌어 올려줘야’ 한다.

위기가 심각해지면 통제력을 잃어가는 자본가들이 이들을 정치적 대리인으로 택할 수 있다. 저항적 노동운동을 폭력으로 쓸어버릴 앞잡이로 말이다. 파시즘 운동은 경찰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무장하고 거리 행진과 테러를 통해 자신의 효용성을 입증해야 한다. 몰락하는 중간계급이 결국 대자본가 쪽으로 쏠리는 것은 노동계급의 해결책이 패배하거나 무기력에 빠졌을 때다.

그런데 《문화과학》에서 강내희, 박영균, 이광일 교수 등은 파시즘이 대중운동으로 집권했다는 것은 집권 이후 조작된 신화라고 주장한다. “위로부터 파시즘” 위험을 강조하다가 나온 이런 주장은 파시즘의 진짜 위험성을 간과하고 현 상황을 과장할 우려가 있다.

주로 퇴역 장교 등 중간계급 출신들로 구성된 나치의 돌격대(SA)나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의 거리 전투는 실질적이었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집회를 분쇄하고, 사무실을 습격했으며 활동가들을 살해했다. 이들을 본따 프랑스 파시스트들은 1934년 의회를 습격해 중도우파 내각을 붕괴시키기도 했다.

중간계급은 작업장과 지역에서 노동계급과 밀착해 존재하기 때문에 국가 탄압이라는 외부적 탄압보다 훨씬 더 용이하게 노동계급 조직과 운동을 파괴할 수 있다. 노동조합뿐 아니라 노동계급과 유기적 관계를 맺는 진보 정당, 사회단체와 소모임 등이 모두 파괴 대상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상이한 국면에서 등장한 파시즘 강령들의 진짜 핵심은 늘 ‘반(反)자본주의’나 ‘반(反)대기업’이 아니라 ‘반(反)사회주의’와 ‘반(反)노동계급’ 강령이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당명에 ‘사회주의’나 ‘노동’이라는 명칭을 넣을 때조차 그랬다.

파시즘의 야만성과 반동성은 박정희나 전두환 군사독재를 압도한다. 의회 민주주의를 파괴했던 이들 군사정권에서도, 탄압은 받았지만 노동조합이 존재했고 파업이 벌어졌다. 또한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 때 이 독재자들을 추앙하며 경찰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노동계급 조직과 운동을 파괴하려는 “대중적 열광”과 운동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조건은 이명박 정부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대중적 열광”은커녕 떨어진 지지율과 협소한 지지 기반 사이에서 탄압과 ‘떡볶이쇼’ 사이를 오가는 꾀죄죄한 신세다.

그럼에도 지난 시기 한국에선 권위주의 독재 정부를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신식민지 파시즘” 같은 잘못된 스탈린주의적 정치 분석이 유행했다. 독재정부의 능력을 과장한 이런 분석은 노동계급과 진보 진영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와 올바른 전략·전술 수립에 걸림돌이 됐다.

반(反)파시즘 투쟁은 파시즘 운동을 거리에서 행동으로 박살내야 한다. 또 앞서 살펴보았듯이 파시즘이 극단적 자본주의 구출 전략이고, 파시즘이 파괴하는 민주주의의 핵심적 내용이 노동계급의 운동과 조직이라면, 이 위험을 사전에 예방할 반(反)파시즘 전략 역시 노동계급이 주도적 구실을 하는 관점에 서야 한다.

노동계급과 민주주의

돌이켜 보면, 한국의 독립적 노조운동(민주노조운동)은 반(反)독재 민주 항쟁의 일부로 시작됐다. 1987년 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의 결과로 노동조합이 대거 결성됐다. 노동운동의 성장과 노조 조직률의 향상은 노동계급의 생활과 권리 수준을 대폭 높였다.

1996년 연말 정리해고 등 노동악법과 안기부법 날치기는 민주노총의 대중파업으로 좌절됐다. 이 성과로 민주노총이 합법화되고, 노조의 정치활동 금지가 철폐됐다. 민주노총은 자신의 당을 만들고 결국 의회로 진출시켰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민주주의 후퇴는 노동자 생존권 투쟁의 권리를 제약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운동은 두 전선 모두에서 싸우고 있다.

이것이 한국에서 노동계급이 민주주의 문제와 맺어 온 관계다. 노동계급에게 민주주의는 단순한 시민적 권리 이상을 뜻한다.

따라서 이명박의 반동에 맞서는 운동에서 노동계급의 구실과 주도권을 높이는 것이 좌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 절망과 냉소에 빠진 중간계급이 반동적인 대안에 이끌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노동계급의 주도성과 견인력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한국에서 파시즘이 도래할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여러 요인들을 종합해 보면 파시즘이 등장할 가능성이 없다거나 거꾸로 그 가능성을 과장하는 것, 둘 다 무리일 것이다.

현재 경제 위기의 수준은 역사적 파시즘이 등장했던 수준에 못 미친다.

그렇다보니, 정치적 양극화 수준도 아직 당시 만큼 심하진 않다. 올 상반기 정치 양극화의 왼쪽 초점은 노무현과 그 후계자들이었다. 그래서 지배계급은 의회 민주주의를 내팽개치기보다는 자신들이 우위를 점한 의회를 한껏 활용하길 바라며 의회에서 온갖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또 국가와 독립적인 반동적 대중운동이 등장하고 있지도 않다. 그보다는 여전히 국가 기구 자체가 반동의 무기로 이용되고 있다. 나치의 돌격대(SA)나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은 1차 대전에 참전했던 사람들이다. 한국전쟁 참전 세대인 애국행동대가 이들과 같은 구실을 하기에는 너무 노쇠해 보인다. 극우익들은 중간계급 대중 속에서 젊은 활동가들을 충원하는 데 실패하고 있고 주로 노인들을 동원하고 있다.

이런 정황들을 봤을 때, 파시즘의 맹아들은 아직 충분히 발아되지 않았다. 물론, 경제 위기와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파시즘이 발아할 조건들은 지금 서서히 발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명박의 반동 공세에 맞선 투쟁을 계속 발전시키며 미디어악법 저지 투쟁에 앞장선 언론노조나 시국 선언 릴레이에 나선 전교조처럼 노동자 투쟁과 주도성을 강화해야 한다.

파시즘은 하수구에 서식하는 쥐들과 같다. 그것은 반혁명적 절망의 몸부림이다. 따라서 쥐 사냥만으론 부족하다. 쥐의 서식처가 되는 하수구를 대청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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