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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석 영화칼럼:
스포츠 영화에 관한 단상

나는 스포츠 영화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많은 스포츠 영화들, 특히 한국의 스포츠 영화들 대부분은 어설픈 휴머니즘적 감동만 서툴게 쫓는다. 또, 스포츠 영화의 핵심인 경기 장면들은 TV 스포츠 방송중계의 보수적인 미학 - 경기에 선수로 참가한 인간들의 살벌한 경쟁을 근사하고 멋진 볼거리로만 포장하는 촬영방식 - 을 답습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 최근 개봉한 〈킹콩을 들다〉, 〈국가대표〉 등이 그런 경우다. 이 영화들은 〈말아톤〉(2005)처럼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주인공들과 비인기 종목 스포츠를 결합해 역경을 만들고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그런데 주인공 한 개인에게 깊게 집중해서 밀도 높은 드라마를 성취한 〈말아톤〉과 달리, 이 영화들의 눈물샘 공략 작전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다. 캐릭터들은 대체로 피상적이고 드라마 전개는 아주 쉽게 예측가능하며, 실화에 기초를 뒀다는 설정을 이용해 감동을 손쉽게 쥐어짜내려고만 한다.

게다가 이 영화들의 경기장면들은 경기를 근사한 볼거리로만 다루는 TV 중계 수준이다. 가령 〈국가대표〉의 경우, 높은 기술적 완성도를 자랑하며 멋진 스키 점프 장면을 보여 준다. 하지만 제 아무리 멋져도 스포츠 채널에서 흔히 보는 장면들과 다를 바 없기에 근본적으로 진부하고 식상하다.

물론 스포츠라는 소재를 통찰력 있게 다룬다면, 스포츠 영화는 케케묵은 신파적 감동과 TV 중계의 낡은 미학을 뛰어넘을 수 있다. 영화사상 가장 멋진 오프닝 장면이 담긴, 그리고 가장 위대한 스포츠 영화로 꼽히는 마틴 스콜세지의 〈분노의 주먹〉(1980)이 단적인 예다.

스포츠와 삶의 맨 얼굴

이 영화는 권투 영화지만 경기 장면들이 TV 중계처럼 관객들의 아드레날린 분비를 촉진하진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사각의 링을 삶의 지옥도로 묘사한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기는 인간들의 육체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를 통해 스포츠와 삶의 맨 얼굴, 즉 생존과 성공을 위한 참혹한 경쟁을 깊이 있게 보여 준다. (주인공 제이크로 분한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는 전설적이다. 그는 은퇴 후 쇠락한 복서의 모습을 담은 영화 후반부를 위해 촬영 도중 몸무게를 23kg이나 늘리기도 했다. 요즘 배우들이 영화나 드라마를 위해 살을 일부러 찌우거나 빼는 것은 모두 드 니로의 영향을 받아 그렇다.)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더 레슬러〉(2008) - 그의 데뷔작 〈파이(Pi)〉(1998)는 카프카의 소설들을 짙게 연상시키는 초저예산 스릴러인데 매우 탁월하다. 스릴러 팬들은 꼭 보시길 - 도 마찬가지다. 몰락한 늙은 프로 레슬러의 삶을 다룬 이 영화는 경기를 결코 볼거리로 포장하지 않는다. 대신, 한물 간 인간들이 링 위에서 벌이는 슬픈 삶의 각축장으로 경기를 묘사해 강렬한 영화적 감흥을 자아낸다. 영화는 장편 영화에서는 잘 안 쓰는 수퍼 16미리 필름으로 촬영돼, 거친 입자의 화면, 멋지진 않지만 정직한 화면의 미학을 구현하기도 했다.(주인공으로 나오는 미키 루크의 연기도 놀랍다. 그는 경기 중 면도날로 이마를 그어 피를 흘리는 장면을 위해, 특수 분장을 거부하고 자기 이마를 실제로 긋고 진짜 피를 흘렸다.)

스포츠 영화는 스포츠를 보고 즐기는 TV 시청자의 단순한 관점을 벗어나 경기를 해석할 때 새롭다. 스포츠라는 전쟁터 속의 인간들을 카메라가 좀더 솔직하게 주목할 때, TV 중계 이상의 감흥이 창조된다.

위의 두 영화와 함께, 〈지단 - 21세기의 초상〉(2006)과 〈천하장사 마돈나〉(2006)를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지단 - 21세기의 초상〉은 경기중인 축구 스타 지단을 17대의 카메라로 동시에 담았는데, 축구의 재미와 지단이라는 세계적 아이콘을 영화적으로 해체해 버린 흥미로운 실험적 다큐멘터리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여자가 되고 싶은 뚱보 소년이 성전환 수술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씨름 대회에 나가려 한다는 내용의 캐릭터 드라마인데, 따뜻하고 독특한 재미를 주는 수작이다.

우원석 : 영화감독 / 뉴욕에서 영화 공부를 했고 지금 작품을 준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