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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기 노조 투쟁 - 화물연대가 길을 보여주다

화물연대 노동자들이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첫 대규모 파업은 거의 완승을 기록했다. 노동자들은 경유값 인하와 노동자성 인정 같은 주요 요구들을 모조리 쟁취했다.

승리의 요인은 전투성과 노동자 연대였다. 포항 지부 파업에 이어 부산 지부 노동자들이 강력한 파업을 벌였다. 울산뿐 아니라 경인 내륙 컨테이너 기지의 노동자들이 동조 파업을 했다. 의왕 내륙 컨테이너 기지의 파업은 수도권 물류 운송까지 마비시킬 참이었다.

화물연대 노조원은 2만 명이다. 그러나 이들의 단결된 힘은 나머지 18만 명을 움직였다.(우리 나라의 지입제 차량은 20만 대에 육박한다.) 운송회사의 물류 담당자들의 말에 따르면 “웃돈을 주고 일을 맡기겠다 해도 노동자들은 도무지 일을 하지 않으려 했다.”

정부는 철도 수송으로 대체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철도 수송은 아예 시도조차 되지 못했다. 철도 노조는 “위험한 일을 절대로 맡을 수 없다.”며 대체 수송을 거부했다.

화물연대 파업은 하루에만 1천5백억 원 가량의 손실을 냈다. 이 사실은 이윤에 타격을 입혀 자본주의에 가장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세력이 바로 노동자 계급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월스트리트 정책

화물연대 파업은 또한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부임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파업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반응은 역대 정부와 다르지 않았다. 노무현은 “질서 유지”를 강조하며, “엄정한 법과 원칙”을 어겼다며 파업을 비난했다. 청와대와 정부 각 부처·국가정보원·검찰·경찰 등이 ‘국가위기대책회의’를 만들었다. 이것은 노무현식 ‘공안기관대책회의’였다.

그 동안 노무현은 “예방적 노사 안정 프로그램”을 말해 왔다. 그러나 화물연대의 한 노동자가 생활고 때문에 음독 자살을 했을 때도, 과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을 때도, 노무현 정부는 대화조차 거부했다. 화물연대 노동자들이 노동절 상경 투쟁을 벌이는 순간 일본에서는 긴급 항만대책회의가 열렸다. 노동자들을 깔본 노무현 정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대신 노무현은 미국 투자가들 앞에서 “규제완화,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 등 월스트리트가 바라는 개혁 정책을 펼 것”이라고 아첨하느라 분주했다.

그런데 바로 그 월스트리트 정책들 덕분에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이 열악해진 것이다. 지입차주제가 강화된 것은 바로 1997년 금융 공황 이후였다. ‘비용 절감’을 이유로 기업들이 수송과 운반을 담당하는 부서를 아웃소싱했다. 화물연대 노동자들은 대부분 당시에 기업에 직접 고용된 상태였다. 퇴직금 대신 울며 겨자 먹기로 트럭을 불하받았고 세금 부담은 고스란히 노동자들한테 떠넘겨졌다. 대신 보험료 등 기업이 부담해야 할 부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런데도 노무현은 역겹게도 화물연대 노동자들을 가리켜, “일부 노조의 특권적 이익 추구 형태에 대해 매우 실망했다”고 말했다.

노무현은 미국 투자가들한테 아양을 떨며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근로자의 권리 의무도 국제적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망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한국의 노동시장 유연화 정도는 OECD 국가 내에서 3위를 기록할 정도다. 비정규직은 전체의 60퍼센트에 육박한다. 노무현은 이것도 모자라다는 것이다.

노무현이 그 동안 강조해 온 “신노사문화”와 “화합적 노사관계”는 신자유주의를 밀어붙이기 위한 립서비스일 뿐이다.

이번 파업으로 노무현 정부의 개혁적 인사들의 본질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났다. 노조 지도자들이 노동자들을 산개시킨 뒤, 법무부 장관 강금실은 피켓팅에 참가하는 노동자들을 체포하겠다고 협박했다. “불법성이 심각해 주동자를 처벌해야 한다.”고도 했다. 미국에서 걸려온 노무현의 ‘강경 대응’ 지침의 전화를 받은 뒤였다. 즉시 지도부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특히 강금실은 화물연대 경찰력 투입의 법적 근거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는 “집단 결의에 따라 업무를 안 하는 것도 업무방해라는 대법원 판례가 있다.”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노무현 내각에서 개혁 인사의 표본처럼 돼 있는 그가 노동자 탄압의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모호하지 않은 분명한 승리

화물연대 노동자들이 거둔 통쾌한 승리는 다른 노동자 부문들에 자신감을 심어 줄 것이다. 당장에 화물연대 노동자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이 힘을 얻고 있다.

벌써부터 화물연대 승리가 “비정규직 노조 설립의 기폭제를 예고”한다는 관측이 있다.

특수고용직만이 아니다. 어느 때보다도 노사 쟁점이 많이 걸려 있는 지금, 화물연대의 승리는 올해 노동조합 운동에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미 기업주들은 “이번 사태가 끝이 아니고 앞으로 각계각층으로 집단적인 행동이 터져나올 것”이라고 걱정한다(〈매일경제신문〉 5월 14일치). “각종 이익 단체들의 요구가 이미 봇물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진보진영의 지지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화물연대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집회를 공동 개최하자는 ‘다함께’의 제안에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며 민중운동 단체들은 난색을 표했다.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 초기와 마찬가지로, 개혁론적 진보진영은 출범한 지 얼마 안 된 노무현 정부에 맞서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겼던 듯하다.

화물연대 부산 노동자들이 노조 지도부의 안을 두 번이나 부결시켰던 것도 진보진영이 난색을 표한 이유 중 하나다. 전국운송하역노조의 한 상근 간부는 연대집회가 부담스럽다는 견해를 두 번이나 표명했다. 민중운동 단체들은 이 견해를 거스르지 않았다.

만약 노동자들이 농민 등 다른 사회 세력과 전략적으로 연대해야 한다는 점을 중시하는 좌파가 있다면 이번 화물연대 파업은 그들한테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화물연대 파업은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만 잘 이루어져도 통쾌한 승리를 거둘 수 있음을 보여 주지 않았는가. 계급 동맹을 강조해 온 좌파들은 정작 화물연대 노동자 투쟁에 지지를 보내는 것은 거부했다.

언론은 “화물연대 노동자들이 통제 불가능”하다며 혀를 찼다. 그러나 화물연대 파업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협상 후 파업”이라는 노조 지도부의 안을 두 번이나 거부한 현장 노동자들의 단호함 덕분이었다.

화물연대 노동자들, 특히 부산 지부의 현장 노동자들은 지도부를 확실하게 통제했다. “화물연대 노동자들이 통제가 안 되”는 현상은 우려스런 일이 아니라 바람직하며 적극 고무되어야 할 일이었다.

그 동안 1999년 지하철 파업, 2000년 주택·국민은행 파업, 2002년 발전노조 파업을 돌이켜 보자. 그 때마다 결정적인 순간에 노조 지도부가 투쟁 수위를 조절하는 바람에 어정쩡한 수준에서 투쟁이 마무리됐다. 현장 노동자들이 여느 때처럼 지도부의 통제에 따랐다면 비슷한 결과를 남겼을 것이다.

현장 노동자들은 노조 지도부가 싸우겠다면 그들을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노조 지도부가 투쟁을 회피하면 독립적으로 투쟁해야 한다.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

대규모 파업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그림이 아니다. 국제적 반전 운동으로 곤욕을 치른 세계의 지배자들은 이제 국내 문제에서도 저항에 봉착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5월 13일 프랑스 정부의 연금제도 개혁안에 반대하는 1백만 명의 시위가 있었다. 파리에서는 25만 명의 시위가 벌어졌다. 에어 프랑스, 버스, 지하철 , 열차 등 운송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약 80개 도시의 대중교통 운행이 중단됐다.

한국에서도 이라크 전쟁 반대와 파병 반대 운동이 노무현 정부 출범 후 첫 대규모 파업으로 이어졌다. 반전 운동은 정치 지형을 왼쪽으로 옮겨 놓았다. 지금 우익이 전교조의 반전 수업을 문제 삼는 것도 왼쪽으로 이동한 이데올로기 지형을 되돌리려는 필사적인 노력의 일부다.

정치 투쟁은 경제 투쟁의 비옥한 토양이 된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분석은 세계적 반전 운동 이후 파업 물결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 딱 들어맞는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치 투쟁의 모든 활발한 공격과 승리는 경제 투쟁에 강력한 자극을 준다. 이것은 정치 투쟁의 활발한 공격과 승리가 노동자들에게 처지 개선을 위한 싸움으로 시야를 넓혀 주고 또 싸우려는 충동을 강화시킴과 아울러 노동자들의 투쟁 정신을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전국적인 정치적 동원과 그 성공에 자극받고 고무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즉각적 요구를 중심으로 지역적인 부분적 경제 투쟁들을 전개한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첫 대규모 파업이 거둔 승리는 노무현 정부 1년을 파업과 대중 시위의 한 해로 만들 또 다른 디딤돌 구실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