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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정상 회담 - 부시와 코드를 맞춘 노무현

김하영

“이러다 지지층이 확 바뀌지 않을까 걱정이다.”(청와대 정무수석 유인태)

미국 방문중 노무현의 행태를 이처럼 잘 요약한 말도 없다. 지지층에게는 환멸을, 보수층에게는 믿음을 줬다는 얘기다.

미국 방문 기간 내내 노무현은 〈조선일보〉로부터 귀여움을 듬뿍 받았다. 이 기간 발행된 〈조선일보〉를 읽고 있으면, ‘뭐 이렇게까지…’ 하는 데스크의 너털 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한 지경이었다.

코리아 소사이어티 연례 만찬에서 노무현은 “만약 53년 전 미국이 우리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쯤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이 말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에 대한 고마움과 북한 정권에 대한 반대를 보여 준다는 해설까지 곁들여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노무현이 미국을 방문하기 전부터 ‘말을 아껴라’, ‘북한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해라’, ‘부시에게 호감을 가져라’ 하고 훈수했다.

한 기고자는 브라질 대통령 루이스 이냐시오 룰라의 미국 방문을 모델로 제시하기까지 했다. 부시를 방문한 룰라가 자신의 “비급진적 사회 정책 비전”을 설명하자 부시는 “마치 공화당원처럼 말씀하시는구려” 하고 화답했고 그 뒤 미국-브라질 정상회담은 순탄대로였다는 것이다.

언론사 외교안보 담당 논설위원들과의 오찬에서 노무현은 이런 훈수들에 대해 “연극 배우가 배역에 완전히 함몰되듯 한번 해보겠다.” 하고 화답했다. 노무현은 〈조선일보〉 각본·연출을 충실히 소화했다.

“북한을 그렇게 많이 신뢰하지 않는다.”(〈뉴욕 타임스〉 기자회견)

“올 때는 머리로 호감을 가졌는데, 이틀 지나면서 마음으로 미국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됐다.”

“부시 대통령과 제가 더욱 신뢰할 수 있게 됐다는 게 가장 중요한 소득이다.”(정상회담 뒤 기자회견)

미국 방문을 마친 노무현에게 이제 〈조선일보〉가 해주고 싶은 말은 딱 하나다. ‘그 마음 변치 말아 다오.’

노무현은 미국 방문에 나서면서 북한 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도록 부시를 설득하겠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명분 없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면서 그가 내세운 논리도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미 정상회담 공동 성명은 “평화적인 수단을 통해 북한 핵무기 프로그램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제거를 위해 노력해 나간다”는 점과 동시에, “한반도에서 평화와 안정에 대한 위협이 증대될 경우에는 추가적 조치의 검토가 이뤄지게 될 것”이라는 점을 담고 있다.

백악관 대변인 애리 플라이셔와 국가안보 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이 추가적 조치에 군사적 행동이 포함된다고 지적했다.

추가적 조치

그런데도 노무현은 “부시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준비했던 많은 얘기들을 다 할 필요가 없었다.”며 “부시 대통령은 제가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희망하는지 정확하게 미리 알고 있었다.”고 부시 비위 맞추기에만 정신을 팔았다.

애초부터 노무현은 부시에게 북한에 대한 군사적 행동 가능성을 배제하라고 설득할 의지도, 자신감도 없었다.

부시를 만나기 전부터 그는 “미국 입장에서 선택 가능한 방안[군사적 행동을 뜻함]을 봉쇄하는 합의를 해주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며 “미국의 어려움도 이해한다”고 여지를 뒀다.

하지만 “위협이 증대”될 때 군사적 행동이 취해질 수 있다면 “평화적 해결”이라는 말은 공문구일 뿐이다.

더욱이 노무현은 북한의 마약·미사일 수출 차단 움직임을 적극 돕겠다고 나섰다. 한반도 “위협 증대”를 부추길 위험천만한 미국의 계획에 동참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의 마약·미사일 수출 차단 계획은 일종의 군사 행동인 무력 봉쇄로 나타날 수도 있다. 부시는 지난해 12월 11일 스페인 해군을 동원해, 예멘행 미사일 수출 북한 선박 서산호를 나포한 바 있다. 이라크 전쟁 때 기지를 제공해 줘야 할 예멘이 반발하는 바람에 당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서산호를 풀어 주고 사태를 일단락했지만, 이것은 부시가 언제라도 북한을 무력 봉쇄할 수 있음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당시에 영국 〈가디언〉 지는 이 사건을 부시 정부가 실행한 다른 국가에 대한 선제 공격의 첫 케이스라고 규정했다.

노, ‘한미공조 예스, 남북공조 노’

노무현은 방미 기간 내내 한미 관계가 남북 관계보다 비할 데 없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한미 관계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북한에 대해서는 “많이 신뢰하지 않는다”고 한 반면, 부시에 대해서는 “더욱 신뢰하게 됐다”고 말했다.

미국 전 국무장관 키신저가 “북한이 이간시키려 하기 때문에 한미 간에 아주 긴밀하게 협조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자, 노무현은 “이간시키려는 북한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그는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대북 장기 개발 계획 참여를 요청했을 때도 “미국과 사전 조율을 하겠다”며 거절했다.

그리고 부시와의 정상회담에서 “남북 교류와 협력을 북한 핵 문제 전개 상황을 보아 가며 추진”해 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 정책은 한미 공조와 남북 화해·협력을 병행하려 노력한 점에서 모순이 있었다. 김대중이 실천상으로 역점을 둔 한미 공조가 남북 화해를 방해하는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무현은 북핵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이 둘이 병행될 수 없다는 결론을 일찍이 내리고 ‘남북 화해·협력’ 노력은 내던진 채 ‘한미 공조’ 노력만을 하기로 택한 것이다. 남북 관계 개선이라는 관점에서 노무현의 대북정책은 김대중의 그것보다 오히려 더 후퇴한 셈이다.

물론 한미 공조와 남북 화해·협력을 병행한다 해도 지지할 만하지는 않다. 우선, 이 둘의 병행은 실현 불가능하다. 미국이 동아시아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북한 위협을 명분으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둘째, 현재의 남북 관계는 순전히 당국자 주도로 이뤄지고 있는데, 김대중 정권이든 노무현 정권이든 노동자와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권들이 아니다.

이번 방미에서 분명히 드러났듯이, 노무현은 노동자와 민중의 삶을 한층 전락시킬 워싱턴 컨센서스 지지자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화해·협력을 통해 북한을 변화시키려는 방향은 북한 민중에게 지금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끔찍한 모델이다.

외교통상부 장관 윤영관은 지난해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열린 한 좌담회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 쪽에서 북한이 지향할 궁극적인 목표를 설정해 줄 필요가 있다. 경제 발전과 정치적 컨트롤을 동시에 달성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다. 이런 점에서 1960∼1970년대 박정희식 권위주의적 발전 모델이 도움이 될 것이다. 시장 경제 도입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룩하면서 정치적으로는 군부 통치를 통해 리더십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경향신문·참여연대 엮음, 《김대중 정부 5년 평가와 노무현 정부 개혁 과제》, 한울, 2003년.)

주한 미군 붙잡기

이번 방미에서 노무현이 요구를 내놓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노무현은 주한미군 제2사단의 후방 배치를 북핵 문제 해결 때까지 미뤄 달라고 요청해 부시의 약속을 일시 받아 냈다.

노무현은 그 동안 “미국에게 할 말은 하겠다”고 해 왔는데, 이번에 그 “할 말”의 실체가 드러난 셈이다. “간곡한 부탁”의 형식을 일단 제쳐 두자면, 하고 싶은 얘기인 즉 ‘왜 미국의 이익만 생각해서 주한 미군 재배치를 맘대로 결정하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제2사단 후방 배치는 전 세계에 주둔한 미 군사력을 재조정할 필요에 따른 것이다. 특히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 전략은 중국의 위협을 대비한 “미래전” 대책에 따라 바뀌고 있다. 미국은 미군 전력을 동남아시아로 확대하고, 남중국해와 동남아 지역에서 해군과 공군이 기동성 있게 움직일 수 있도록 괌을 아시아의 중추 기지로 활용하려 한다. 그래서 남한의 제2사단(보병)과 일본 오키나와의 제3해병사단의 중요성이 떨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노무현은 제2사단의 후방 배치가 안보 심리와 경제 등에 악영향을 미쳐 남한의 국익에는 해롭다는 점을 내세웠다.

노무현 정부는 “국익” 개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외교통상부 장관 윤영관은 3년 전 EBS 일요 초청 특강에 나와 “친미, 친일, 친중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다”며 “영원한 동맹도 항구적인 적도 없다. 다만 영원하고 항구적인 국가 이익만이 있을 뿐이다.”는 영국 정치인 팔머스톤의 말을 인용한 바 있다.

많은 사람들은 노무현과 그 브레인들이 내뱉는, 덜 친미종속적이고 다소 민족주의적인 발언에서 모종의 진보성을 기대해 왔다. 하지만 노무현식 ‘국익’은 평범한 사람들의 바람과는 달리 제2사단의 현상 유지 (또는 한국군 파병) 같은 것이다.

〈중앙일보〉 여론 조사 결과(2003년 2월), 국민의 56.6 퍼센트가 주한미군의 철수 또는 감축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주한미군이 남한 땅 7천4백47만 평을 공짜로 이용하고, 환경파괴·범죄 등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면서도 주둔 분담금까지 요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 북한이 전쟁을 도발하리라고 걱정하는 국민은 1992년에 69.2퍼센트에서 2000년에 32.8퍼센트로 점점 줄어들었다. 반면, 미국의 일방주의가 한반도에 전쟁 위협을 부추긴다는 의혹이 고개를 들어 왔다. 이런 마당에 안보를 위해 제2사단을 온존시켜야 한다는 노무현의 주장은 국민 의사에도 거스른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초에 3단계 평화 정착 방안을 발표했다. 1단계인 올해의 목표는 “남북 군사적 신뢰 구축”이다.(이 방안은 2단계와 3단계에 각각 “한미 동맹 관계의 변화 모색”과 “주한미군 역할 변경”을 목표로 담고 있다.)

하지만 남한 정부가 주한 미군의 전진 배치를 원하는데, 북한과 신뢰가 쌓일 턱이 있을까?

또, 노무현 정부는 “자주 군대”를 표방하며 국방비를 5조 5천억 원이나 증액해 23조 원으로 책정했다. 이것은 북한의 경계심만 자극할 뿐이다.

노무현 정부가 미국과 공조해 북핵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한반도의 평화 정착은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