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지배계급은 ‘개혁’을 도입해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로운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그 숫자는 무엇을 의미할까?

영국 금융감독청장 아데어 터너가 조세를 통해 금융 거래를 통제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언론들은 난리가 났다. 그러나 언론들은 금융 업무의 상당 부분이 “사회적으로 있으나 마나 한 것”이라는 터너의 말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영국 경제에서 금융과 기업 서비스가 제조업보다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하고 기업 총투자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이었다. 이 말대로라면 지난 15년 간 영국 경제 성장은 사실상 거의 대부분 있으나 마나 한 성장이었다. 사회적으로 유용한 물건을 생산하기보다 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도박을 벌여 이윤을 얻는 것에 더 많은 노력을 쏟은 것이다.

그러나 신노동당 정부는 경제 성장을 가져온다면서 그런 경제 구조를 낳은 ‘근대화’를 정당화했다.

있으나 마나 한 성장

다른 나라에도 비슷한 모순이 있다. 역대 인도 정부들도 경제성장률을 높여 준다며 ‘개혁’을 찬양해 왔다. 인도 정부는 경제 성장으로 수많은 사람이 빈곤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도의 급진 경제학자인 우트사 파트낙은 〈먼슬리 리뷰〉에 기고한 글에서, 최근 인도 경제가 고성장을 하는 동안 평균 식량소비량은 오히려 하락했다고 지적했다.

보통 어떤 나라의 경제적 성공은 국민총생산(GNP)이나 이와 연관된 국내총생산(GDP)으로 측정된다. 우리는 일인당 GNP가 늘어나면 우리의 삶도 더 풍요롭게 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고도의 과학을 동원하지 않고도 GNP가 우리 삶의 수준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국내생산 통계(GNP와 GDP)는 1년 동안 재화에 지불된 총액수를 뜻한다. 그러나 그 재화에는 음식, 에너지, 공산품, 의료와 교육 서비스 등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것뿐 아니라 군비, 광고, 은행가의 보너스 등도 포함돼 있다.

이렇다 보니 온갖 황당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예컨대, 엄청 빠른 차를 생산하면 GNP가 늘지만, 그와 동시에 그 차의 속도를 늦추려고 과속방지턱을 설치해도 는다. 만약 이 차 때문에 사고가 많이 나도 자동차 견인비와 장례비 지출로 GNP는 늘어난다. 수백 년 동안 살아 온 나무를 잘라 팔아도 GNP는 늘어난다. 그러나 이것은 자원 고갈을 뜻할 것이다.

자본가 계급의 기관지 〈파이낸셜 타임스〉조차 이런 점을 인정했다. “미국의 GDP는 지난 30년 동안 성장했지만, 인구 절반의 소득은 정체하거나 줄었다. … (더구나 미국 GNP 속에는) 없는 것이 더 나을 것들도 있었다. 총이나 체제의 불안정을 심화시킨 금융 상품들이 대표적 사례다.”

GNP는 실제 삶 반영 못 해

잘난 경제학자와 정치인 들도 2년 전 열린 한 회의에서 이 점을 인정한 바 있다. 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도 수상쩍은 이유로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위원장인 위원회를 꾸려 이 문제를 조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GNP와 GDP를 대체할] 경제 성장 계산 방식을 찾으려는 모든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사실, 진정으로 생산적인 부와 비생산적인 부를 구분하려는 노력은 오래됐다. 18세기 말 산업 자본주의 초기에 아담 스미스는 옛 봉건 체제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인류가 부를 생산하는 능력이 늘어난다는 이유로 자본주의를 지지했다. 그래서 스미스는 개별 자본가의 부를 늘리는 모든 경제 활동을 생산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성숙하자 새로운 부를 생산하지는 않고 이미 생산된 부를 서로 나누는 것과 연관된 경쟁적 경제 활동들이 많아졌다. 스미스가 그런 말을 한 지 90년 뒤 마르크스는 이 점을 인식했다.

개별 자본가에게 생산적이라고 해서 꼭 전체 자본주의 체제에도 생산적인 것은 아니다. 그와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에는 생산적이지만, 일하는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냐는 관점에서 보면 전혀 생산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런 모순은 그 뒤로 더 심화했을 뿐이다. 금융, 광고,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군비에 쓰는 지출은 마르크스가 상상도 못했을 정도로 커졌다. GNP로 측정된 자본주의적 경제 활동이 늘어도 대다수 사람의 생활수준은 얼마든지 나빠질 수 있게 됐다. 더구나, 오늘날의 경제 성장은 환경파괴 ― 인류의 미래가 걸린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위협하는 ― 를 수반한다.

이런 모순을 걱정하는 사람 중 하나인 OECD 수석 통계학자 엔리코 지오바니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세상의 복잡성을 숫자 하나로 표현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몇몇 숫자들 ― 이윤율의 원천인 금전 관계 ― 로 환원하는 체제다.

자본주의에서는 경제 성장이 그런 식으로 측정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금융 투기처럼 쓸데없는 활동이나 온실가스 배출 같은 파괴적 행동도 측정하듯이 말이다. 다른 한편, 공공부문 지출을 줄여 파산 은행을 구제하려 한 자들은 진정으로 유용한 일들을 ‘비생산적’이라고 비난했다.

문제는 단지 통계를 어떻게 작성할 것인가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성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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