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 엔겔하르트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의 경험과 자신과 동지들이 시작했으나 완수하지 못한 혁명의 과업에 대해 말한다. 가비 엔겔하르트는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동독의 주도적인 지하 활동가였고 현재 좌파당 디링케에서 활동하고 있다.


1989년 가을의 사건과 동독 국가의 종말의 기원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같은 해 봄과 여름에 일어난 일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연히 역사적으로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1989년 혁명은 1953년 동독, 1956년 폴란드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발생했던 반란의 전통에 서 있다.

동독에서 사람들은 서독으로 떠나는 것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했다. 1989년에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정치적 상황이 악화된 것 ― 동방블록에서 특히 심각했다 ― 이 사건의 규모를 증폭시키는 계기가 됐다.

당시 나는 우리 집과 가족과 생계를 포기한 채 동독을 떠나지 않기로 마음먹은 조직에 속해 있었다. 우리는 바로 이곳에서 변화를 일으키고 싶었다.

국제적 위기, 정치·사회적 개혁 열망에 대처할 수 없는 동독 지배자들의 무능, 중국 정부가 톈안먼 광장에서 시위대를 학살한 것을 동독 지배자들이 지지한 것 등이 모두 사건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나는 칼마르크스스타트(오늘날의 캠니츠)의 소규모 좌파 조직 ― 나중에 ‘통합좌파’로 발전했다 ― 의 회원이었다.

1981년에 평화와 인권 운동에 관심을 가진 청년이었던 나는 지역 신문사 타이피스트 일자리를 잃은 상태였다. 많은 다른 이의 삶은 훨씬 더 힘들었고 심지어 수감된 사람도 있었다.

변화의 바람

당시에 우리는 대부분 기독교인이 아니었음에도 교회에서 모임을 가져야 했다.

교회는 우리가 우리 국가나 다른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우리는 크루즈 미사일, 환경 보호와 인권 등 다양한 쟁점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톈안먼 광장의 학살을 들은 뒤에는 중국 상황을 논의하는 모임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소수의 사람이 올 것으로 예상했으나 교회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왔다. 비록 그중 절반은 동독 비밀경찰들인 것 같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저항을 하면 톈안먼 광장과 같은 일이 반복될까 두려워했다.

비밀경찰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체포를 막기 위해 모임을 끝내고 다 함께 무리를 지어 교회를 나가자고 제안했다.

1987년부터 동독은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었다. 상점에는 생필품이 모자랐고 1989년에 이르면 사람들은 더는 참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해 10월 7일 ― 동독 국가 건국 40주년 기념일 ― 에 대단히 중요한 일이 벌어졌다. 교회를 박차고 나와 거리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를 기념하는 벽화

교회 그룹에 속한 배우와 사람 들은 다른 조직들과 공동으로 경제 위기와 ‘노이에 포룸’(민권 운동)에 관한 토론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원래 이 토론회를 도심 극장에서 열려고 했으나 집권당 관료들이 불허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곳에서 모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우리가 도착하자 우비를 입은 준군사 특별수사대가 우리를 포위했다. 그들은 우리가 모이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극장에 갔던 사람들은 정부에 의해 모임이 취소됐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뭔가 하고 싶었고 행진을 시작했다. 대형 칼 마르크스 동상이 있는 도심에서 명사들이 동독 건국 축하 기념식을 열고 있었고 일부는 그곳으로 가서 시위를 벌이고 싶어 했지만 다른 이들은 충돌을 우려해 반대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톈안먼 광장의 학살 이미지가 떠올랐던 것이다.

우리는 중심가 전차 정류소까지 행진하기로 결정했다. 휴일에 그곳에 많은 사람이 모이기 때문에 안전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안전을 보장 받지 못했다. 8백여 명의 시위대 앞으로 많은 수의 경찰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 뒤로는 특별수사대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물대포로 우리를 공격했고 26명을 연행했다.

동독 국가는 그런 탄압으로 사람들이 거리에 나서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그날 도로변에 있던 보통 사람들도 공격받았던 것이다. 경찰은 ‘좋은’ 사람과 ‘악당’을 구분할 수 없었고 행인들도 연행했다.

중대한 국면

그날 시위 후 우리는 중대한 국면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친구나 친지 중에는 사병들이 꽤 있었는데, 그들의 말로는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기 일보직전이고 군인 호송 트럭이 갓길에 배치돼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 자체가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었다. 사병들이 시위대에 호의적이고 심지어 사병 자신이 시위에 참가하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과연 시위대 탄압에 군인들을 동원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독 비밀경찰 수장 에리히 미엘케는 1953년의 사태를 반복할 가능성을 계산하고 있었다. 당시에 동독 전역에서 대중 항쟁이 발생해 동독 주둔 러시아군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진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이번에는 그런 도움을 바랄 수 없을 거라고 못을 박았다. 우리는 그것에 자신감을 얻었고 한달 동안 우리 시위의 규모는 1천 명에서 5만 명 ― 캠니츠의 인구는 35만 명에 불과하다 ― 으로 늘었다.

사람들은 더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고, 그동안 쌓여 온 온갖 고통과 분노가 폭발했다. 갑자기 사방에서 정치 토론이 벌어졌다.

동시에 세 곳의 교회에서 공개 토론회가 열렸다. 한 곳만으로는 몰려드는 참가자들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문들도 비판적 논조의 기사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집권당 당원들도 개혁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했지만 때늦은 변화였다. 집권당이 사태 변화를 통제할 방법은 없었다. 혁명이 진행중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행진할 때 우리는 이렇게 소리쳤다. “우리가 인민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운동은 아직 공장으로 확산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곧 그렇게 됐다.

당시 우리는 억압적 국가 관료를 제거하면 동독에 새로운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우리가 나중에 깨달았듯이 동독의 이른바 ‘사회주의’를 기초로 해서 진정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 우리에게는 이동의 자유가 민주적 권리의 상징적 요구였기 때문에 집권당이 베를린 장벽을 계속 닫아두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국경을 개방하자 위기가 심화했다. 서독 사람의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동독의 ‘사회주의’란 모든 종류의 생필품 부족과 민주적 권리의 박탈을 뜻했다. 서독 자본주의는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거리의 구호도 “우리가 인민이다”에서 독일 통일을 뜻하는 “우리는 하나의 인민이다”로 변했다. 1990년 1월에 시위대의 규모는 15만 명으로 늘었다. 이런 변화를 보면서 우리 중 일부의 사람들은 우리가 혁명을 일으켰으나 결국 우리는 패배했고 자본주의가 이겼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몇 주 후에야 나는 운동의 성격 변화를 정치적 요구가 사회경제적 요구로 변하는 과정을 반영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통일 요구는 사실 더 나은 생활수준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 운동을 두려워한 동독과 서독의 지배자들은 독일을 통일하기로 서둘러 합의했다. 그것은 위로부터의 통일이었다.

끝나지 않은 혁명

그것은 동독 좌파 지도부의 약점이 낳은 결과이기도 했다. 항쟁이 시작됐을 때 우리는 분명한 입장을 가진 집단이 아니었다. 따라서 막상 운동이 부상하자 이데올로기적으로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통일 독일 국가에서 경제 불황이 지속되자 1989년의 희망은 곧 사라졌다. 대규모 공장 폐쇄가 진행됐고 실업률이 치솟았다.

새로운 국가의 통합 지배자들은 우리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것이 더 많은 실업과 공장 폐쇄를 낳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동독의 실업자와 저임금 노동자 사이에는 과거에 대한 향수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일자리, 주택과 기초적 사회보장이 제공하는 안정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동독의 경제 위기 상황에서 그것이 계속 유지되기는 불가능했다.

오늘날 경제 불황의 여파로 서독 노동자들조차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옛날이 더 좋았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적 판단을 하고 있기도 하다.

1989년 혁명이 발생한 지 불과 2년 뒤에 우리는 다시 거리로 나섰다. 이번에는 공장 폐쇄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2004년에 정부의 사회보장 축소 시도에 맞서 다시 한 번 투쟁에 나섰다.

이 세 번의 투쟁 물결은 모두 월요일 저녁에 시작됐고 곧 ‘월요 시위’로 불리게 됐다.

지배자들은 여전히 1989년의 경험을 공포심을 가지고 회고한다. 그리고 동독과 서독의 지배자들이 더는 분리돼 있지 않은 오늘날 상황에서 우리가 단결된 투쟁을 벌일 가능성은 더 크다.

1989년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이렇다. 사회주의는 위로부터의 명령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래로부터 제기돼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왜 당시의 혁명이 원하는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혁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1989년 혁명 시간표

1980년

1980년 7월 폴란드에서 식품 가격이 급등하자 파업이 벌어졌고, 그 결과로 연대노조가 탄생했다. 연대노조는 광범한 지지를 받았고 폴란드 정권에 도전했다. 비록 연대노조는 1980년대 내내 탄압 받았지만 폴란드 정권에 대한 가장 중대한 도전이었고, 정권은 그 타격에서 회복할 수 없었다.

베를린 장벽의 보초병들

1989년

6월 4일 수년간 지속된 위기로 반체제 세력들은 폴란드 정부가 선거를 실시하도록 압력을 넣을 수 있었다. 이제 자유시장을 지지하게 된 연대노조가 선거에서 승리했다.

7월 5일 동독인 수천 명이 동독,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 소재 서독 외교 공관을 찾아가 망명 신청.

동베를린에서 벌어진 노동자 시위

8월 24일 폴란드의 타데우스 마조비에츠키가 소련 블록에서 최초의 비공산당 출신 총리가 됐다.

9월 11일 헝가리가 서독으로 향하는 국경을 개방했다. 동독 난민들의 대규모 서독 이주가 시작됐다.

10월 7일 러시아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동독 방문 중 간접적으로 개혁을 요구했다. 동독 정권에 반대하는 첫 시위가 시작됐다.

11월 4일 동독인 1백만 명이 동베를린의 중앙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11월 7~8일 동독 정부 사퇴.

11월 9일 동독 시위대 수천 명이 국경으로 몰려가 국경 개방을 요구했다. 베를린 장벽이 뚫렸고, 사람들은 축하의 의미에서 장벽을 허물었다.

11월 10일 불가리아 정부는 장기 집권한 독재자 토도르 지프코프를 권좌에서 몰아냈다.

11월 17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한 학생의 항의 행동이 경찰과 충돌을 낳고, 이것이 계기가 돼 ‘벨벳 혁명’이 시작됐다.

11월 20일 50만 명이 프라하에서 시위를 벌였다.

루마니아인들의 시위를 탄압하는 경찰들

11월 27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두 시간 총파업 발생.

12월 16일 루마니아 전역에서 시위가 발생. 독재자 니콜라이 차우셰스쿠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진압을 시도했으나, 노동자 파업과 대규모 시위로 차우셰스쿠 정권은 몰락했다.

12월 25일 차우셰스쿠와 그의 부인에 대한 사형 집행.

12월 29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공산당 41년 통치 종식.

1990년

10월 3일 동독과 서독 통일.

12월 9일 전 부두 노동자이자 연대노조 지도자인 레흐 바웬사가 폴란드의 첫 대선에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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