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1998년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정리해고에 맞서 7월 20일부터 8월 24일까지 36일간 공장점거 파업을 했다. 이 글은 당시에 36일간 점거에 참여한 현대자동차 한 노동자가 보내 온 투쟁 기록이다. 이 글은 너무 생생한 나머지 마치 투쟁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직접 보는 느낌이다. 이 글은 경제 위기가 다시 심화되고 있는 지금,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강요에 맞서 어떻게 싸울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훌륭한 지침서이기도 하다.

당시에 정부와 재계측이든 노동운동측이든 이 파업을 “한국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의 대리전”이라고 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 투쟁은 정리해고 시행을 둘러싸고 민주노총 쪽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대규모 충돌이었다. 사측은 “점거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협박했고, 정부는 경찰력 투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결국 살기를 띤 노동자들의 저항이 두려워 경찰을 투입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처음부터 양보교섭을 해 온 김광식 당시 위원장이 8월 21일 ‘정리해고를 최소화한다’는 안을 받아들임으로써 투쟁은 일단락됐다. 노동자들의 거센 저항이 있었으나 투쟁을 계속하지는 못했다. 1998년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점거 투쟁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완전히 성취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긴 했으나, 동시에 정리해고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36일 간의 점거 파업은 노동자들의 힘을 보여 준 위대한 투쟁이었다.


지난 1998년 고용안정 사수와 정리해고 반대를 위한 36일간의 현대자동차 공장 점거 파업은 김대중 정부에게는 정치적 파산을 의미했고, 사측에게는 수천억 원의 피해를 입혔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엄청난 단결력과 힘을 보여준 싸움이었다.   

회사측은 1998년 6월 30일 교섭을 하다가 갑자기 울산 노동부에 정리해고 명단을 접수했다. 이에 맞서 노동조합은 경고 파업에 돌입했다.

사측은 정리해고 통보서를 개인들에게 전달했다. 통보서를 받은 모든 공장의 평조합원들은 관리자들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모든 공장의 생산이 중단됐다. 1공장 조합원들은 현장 사무실 집기를 불태웠고, 특히 불만이 높았던 3공장 조합원들은 부장, 과장, 기사, 반장 할 것 없이 폭행했다.   

7월 16일 노동조합 집행부는 임금 삭감안을 제시하고, 회사측의 요구안을 수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날 아침 임시 대의원 대회 전에 조합원들은 집행부에 항의했다. 그리고 평조합원들은 대의원들에게 우리와 함께 싸우자고 호소했다. 집행부는 어쩔 수 없이 임시 대의원 대회에서 평조합원들의 투쟁 열망과 대의원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며 다시 투쟁을 결의했다.   

가족대책위 부인들이 아이들과 함께 매일 농성을 했다. 부인들은 아침마다 아이들과 함께 공장 주변을 돌면서 조합원들의 단결을 고무했다.

“우리 가족들이 이 싸움에 얼마나 열의가 있고 진지한지 경찰들은 모를 거에요. 가족들이 제일 많이 모였을 때가 3백여 명 정도였으니까요.”

“진정한 가정 파괴범은 사측이에요. 이번에 희망 퇴직한 노동자들 가운데 부인이 퇴직금을 가지고 도망간 사람도 있답니다. 그리고 어떤 부인은 먹고 살기 위해 몸까지 판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이런 사람들에게 죄를 묻겠어요? ‘희망’ 퇴직만 없었다면 이런 상황이 벌어졌겠어요? 정말 안타까울 뿐입니다.”

“가족대책위는 이렇게 절망하는 가족들을 전화로 위로하고 한번 만나자, 현장에 한번 오라며 하루에 1백 통의 전화를 한답니다. 제가 집에서 전화를 많이 했더니 전화료가 8만 원이나 나왔더라고요. 제 남편이 전화국에 가서 확인했는데 이번에 정리해고 명단을 받았던 사업부 조합원들의 집 전화번호가 나온 걸 보고는 아무말도 안 하더군요. 또 가족대책위는 MBC 방송국에 매일 3백 통의 항의 전화를 해요. 최소한 사실만이라도 보도해야 되는데, MBC는 완전히 왜곡 보도를 하더라고요. 지금껏 취재했던 건 하나도 방송에 나오지 않았어요. 다른 방송국도 마찬가지예요. 하도 열이 받아 얼마 전에는 UBC(울산방송) 방송국에 가서 난리를 쳤어요.”

활동적인 조합원들로 이루어진 ‘녹색 사수대’ 5백여 명이 공장에 진을 치고 있었다. 각 사업부 대의원들과 조합원들은 자전거와 오토바이 주차대를 끌어와 비닐을 덮어 농성장을 만들었다.

녹색 사수대

7월 31일 회사는 조합원 1천5백69명에 대해 퇴직금을 강제로 입금하고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한 조합원은 정리해고 통지서를 받고, 충격이 너무 컸던 나머지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그 조합원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때 대의원을 역임한 노동자였다. 이날 1만여 명이 모인 집회에서 그 동지의 몫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회사는 관리자들(이사, 부장, 차장과 과장)과 비조합원들 그리고 후진적인 조합원들을 동원해 각 사업부 사무실에 배치해 우리들을 자극했다.

‘녹색 사수대’ 동지들 5백여 명이 이들을 쫓아내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각 사무실로 달려갔다.

승용3공장 부서 사무실에는 관리자들 50여 명이 안에서 문을 잠그고 있었다. 한 사수대 동지는 “3분의 여유를 주겠다. 공장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그 뒤 벌어질 사태의 책임은 전적으로 사측에 있다”고 경고했다. 아무 반응이 없자 철문을 부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사 전무(현대자동차에서 제일 악질인 인력관리부 전무)를 비롯해 그들은 벌벌 떨고 있었다. 일단 전무를 끌어 내서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관리자들을 전부 공장 밖으로 밀어냈다. 공장 밖 명촌 삼거리에 있던 몇 백 명의 전경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공작사업부 관리자들도 사수대가 사무실을 한번 휘저으니까 다들 도망가 버렸다.

또 다른 사수대 일부가 사무실 2층으로 들어가서 부품사업부 관리자들을 토끼몰이식으로 내쫓았고, 나머지 사수대들은 1층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도망가는 이사급 관리자를 잡으니까 “한번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사수대가 현장을 한 바퀴 돌자 평조합원들은 많은 힘을 얻었다. 그런데 노조 집행부는 이후 제시한 행동 지침에서 사수대가 현장 순회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한 번은 정몽규 사장이 3공장에 왔을 때, 보디 가드들(태능 선수촌 3급 이하를 스카웃함)이 조합원들에게 달려들었다. 이 광경을 본 사수대는 집행부에 불만을 터뜨렸다.

여성 조합원들

식당 여성 조합원들이 노조 사무실 앞에서 천막 농성을 했고, 144명의 집단해고에 반발해 ‘여성 사수대’를 조직했다.

여성 동지들은 본관 식당을 접수해 밥도 짓고 국도 끓여 지도부와 가족대책위와 사수대 동지들에게 아침·점심·저녁 식사를 제공했다.

회사는 컨베이어 중앙 스위치와 컴퓨터를 작동시키기 위해 ‘희망’(사실은 강제) 퇴직자들을 승용1공장 현장에 투입했다. 여성 조합원들은 굴뚝에 올라간 전직 위원장들에게 아침 인사를 하러 갔다가 이들을 발견하고 천막 농성장으로 데려 왔다.

한 여성 조합원은 “우리와 함께 싸울 때만이 당신들도 일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20여 분 동안 애절하게 설득했다.

그들은 여성 조합원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농성 천막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 때 집행 간부가 나와 여성 조합원들을 만류하며 “회사 밖으로 보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참 동안 집행 간부에게 항의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성 동지들의 요구에 따라 ‘희망’ 퇴직자들은 “진짜 죄송합니다”를 열 번 외치고 공장 밖으로 나갔다.

여성 조합원들은 자신들을 집단 해고한 장본인이 복지 후생팀장임을 드러내는 문서를 입수했다.

그래서 여성 조합원들은 회사밖에 있는 문화회관으로 달려가 후생팀장과 과장을 잡아 농성장으로 끌고 왔다.

7월 31일, 국민회의(지금의 민주당) 노무현 부총재와 노사정 위원장과 경총 회장 등이 중재하러 찾아왔지만, 식당 조합원들은 “중재는 필요없다! 정리해고 철회하라!“는 항의로 답변했다.

조합원들의 단호한 의지가 경찰 투입을 막아내다

대의원들과 평조합원들은 각 공장마다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승용1공장은 대형 차체 파레트와 그랜저 수십 대를 몰고와 정문을 막았다. 그리고 조합원들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쇠파이프로 무장했다. 아침마다 출근투쟁을 조직했다.

상용4공장도 대형 파레트, 그레이스, 포터, 대형 지게차, 산소통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세웠다. 조합원 누구나 쇠파이프와 쇠를 날카롭게 갈아 몸에 간직하고 있었다. 구정문 밖 길 건너편에 있는 전경들은 조합원들을 슬슬 피하기도 했다.

승용2공장은 대형 콘테이너 2대로 단조 정문을 봉쇄했다.

각 공장의 모든 조합원들과 사수대들은 매일 아침 7시에 기상해 노조 사무실을 중심으로 공장을 한바퀴 돌면서 구보도 하고, 서로 아침 인사를 주고 받았다. 얼마나 규율있는 모습인가! 각 사업부 평조합원들의 천막에는 뉴스를 보기 위해 TV도 있고, 냉장고를 비롯한 웬만한 시설들은 다 갖추어져 있었다. 조합원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점거 파업하면서 36일 동안 천막에서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8월 1일부터 일주일 동안 휴가가 시작됐다. 집행부는 많은 걱정을 했다. 그렇지만 사수대와 가족대책위를 포함해 평조합원들 2천5백여 명은 휴가를 가지 않고, 공장을 사수했다. 조합원들은 본관 잔디밭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우리들의 투쟁을 어떻게 조직해 나갈 것인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선착장(수출차를 싣기 위해 아주 큰배를 대는 곳)에 가서 낚시도 했다.

휴가도 가지 않고 공장을 지켰던 평조합원들이야말로 진정한 점거 파업 지도부였다.

8월 8일 검찰청 ‘공안사범 합동 수사부’(검찰·경찰·노동부 사무소)는 회사 밖에 있는 현대 A/S와 문화회관에 본부를 차리고 경찰력 투입을 결정했다.   

경찰력 투입이 초읽기에 들어갔을 때, 가족대책위의 부인들은 회사 담벼락 옆 큰 소나무 위에 올라가 매일 새벽 4시 30분까지 보초를 섰다. 가족대책위는 경찰을 투입하려던 그 날도 가족대책위 숙소 창문을 반쯤 열고 뜬 눈으로 날을 샜다.

“사수대의 호각소리에 저희 가족들은 눈을 떴어요. 이 날은 아주 차분하게 대처했어요.”

“애 엄마들은 신속하게 움직이기 위해 신발을 항상 머리맡에 놔두고 잠을 잤어요. 호각 소리에 바로 마스크를 하고 애들을 업고 침착하게 행동했지요. 애들도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울지도 않더라고요. 상황 해제가 되니까 그 때서야 울음을 터뜨리데요.”

여성 특수경찰대 6명이 우리들의 파업 현장에 투입됐다고 한 노조간부가 말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가족들은 이번 정리해고 철회 싸움에 아주 진지하고 철저하게 대처했어요. 그게 뭔가 하면, 정리해고 명단을 받았거나 2년 무급 휴가를 받은 조합원 가족들이 가족대책위에 찾아오면 먼저 남편의 사업부가 어디며, 이름은 무엇이고, 집은 어딘지를 붇습니다. 그리고 연락처를 말해 달라고 하죠. 그런 다음 명찰 뒷면에 우리만 알 수 있는 표시를 해 두죠.”

8월 18일 새벽 3시 40분경, 백골단과 전경들이 구호를 외치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수대 동지들은 “이제 진짜 한번 붙어 보자. 너희들이 죽든지 내가 죽든지” 하며, 비장한 각오로 안전모와 쇠파이프를 들었다.

현장에 들어와 있지 못했던 조합원들은 공장 담벼락을 뛰어 넘어 들어와서 결합했다. 이 광경을 본 전경들은 기겁을 했고, 담벼락을 허물기로 한 굴삭기 기사가 도망쳤다. 평조합원들은 “내가 이 공장과 함께 날려 버리면 버렸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있었다.

가족대책위는 “우리는 애들과 함께 사운다. 경찰력 투입은 제2의 광주항쟁이 될 것이다” 하고 결연한 심경을 밝혔다.

경찰은 “새벽에 있었던 일은 예행 연습일 뿐이었다”고 일종의 해명성 발표를 했다. 하지만 이 날 경찰이 투입됐더라면 그것은 김대중 정부의 정치적 파산 선고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노조 지도부, 정리해고를 받아들이다

8월 21일 저녁 8시경, 본관 정문에는 그랜저 고급 승용차, 산소 가스통, 대형 팔레트로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고, 한쪽에서는 1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집회를 열고 있었다. 연일 신문과 TV에서는 정부 중재안을 노조가 수용해 협상을 벌이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조합원들은 설마설마하며 김광식 위원장의 발표를 기다렸다. 집회 분위기가 이전과는 달랐다. 노조 간부가 구호를 외쳐도 잘 따라하지 않았다.

김광식 위원장이 “노조가 정부안을 수용해 협상에 임하고 있다”고 말하자 평조합원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조합원들의 항의가 터져나왔다.

김 위원장은 “조용히 하세요. 제 이야기 끝나고 말하세요” 하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정리해고 최소화는 인정하고 협상을 해야 한다. 정리해고 최소화의 내용은 260여 명을 정리해고하고 나머지는 순환 휴가를 하자는 것이다. 정리해고 철회가 아니라 해고 회피 노력을 다했나 하는 게 중요하다.”

조합원들이 대열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은 한 달여 동안 싸워 왔던 것은 정리해고 철회를 위해서였는데 정리해고 수용이라니 …” 하며 허탈감과 배신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현장을 나가 버렸다.

김 위원장이 이내 단상 밑으로 내려가고 민투위 5기 지도부 이상욱 씨가 단상 위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동지 여러분! 이렇게 분열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분열하게 되면 누가 제일 좋아하겠습니까? 바로 사측과 정부 아닙니까? 단결합시다. 정리해고 철회될 때까지 투쟁합시다.”

그 다음 여성 식당 조합원이 울먹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아침에 위원장님이 우리들과 간담회를 하자고 했어요. 그 전가지 정부 중재안이 어떤 것인지 우리 식당 아줌마 조합원들은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런데 위원장님이 ‘식당을 노조에서 운영하면 고용승계가 되지 않느냐?’고 했어요. ‘위로금도 2500여 만 원 정도 따내겠다’면서 말이에요. 억장이 무너지더라고요. 우리가 정리해고 수용할 수 있습니까? 수용할 수 있어요? 우리 식당 조합원들은 절대 수용 못합니다. 끝까지 투쟁하겠습니다.”

가족대책위는 가족들을 모아 노동조합 사무실로 향했다. 노조 사무실 앞에서 가족대책위 150여 명은 “정부 수용안 백지화”를 요구하는 항의 집회를 열었다. 사수대원들은 천막 농성장에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한 아줌마는 이렇게 절규했다. “저희 가족들은 위원장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정리해고 수용이라니, 이제 저희 가족들은 어떻게 합니까? 위원장님은 저희와 간담회를 하고 정부 수용안을 반드시 백지화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 가족과 남편, 아이들이 살 수 있습니다.”

저녁 9시 50분경, 사수대 250여 명과 조합원 1000여 명은 노조 사무실 앞에서 “정부 수용안 백지화”를 위한 항의 집회를 열었다. 위원장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거기에 모인 평조합원들은 정부안 수용 결정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조합원 1: “위원장님은 정부안(정리해고 최소화)을 수용해서 전체 조합원 총회에 붙이겠다고 했는데, 그러면 안 된다. 투쟁에 참여한 조합원들이 결정해야지, 총회에 붙이면 되겠는가?”

조합원 2: “나는 한 달 이 넘도록 집에도 못 가고 천막 농성을 했다. 이 와중에 우리 아기가 어떻게 된 줄 아는가? 눈이 홱 돌아가고 까물어쳤다. 이렇게까지 싸웠는데 정리해고 인정이라니. 위원장! 내일 아침까지 시간을 주겠다.”

조합원 3(식당 여성 조합원): “위원장이 얼토당토않은 정부 수용안을 내놓으면 어떻게 하는가〉 조합원들을 분열시키고 있다. 단상 위에 올라가서 ‘투쟁! 투쟁!”만을 외치는 것이라면 나도 할 수 있다. 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라. 중재안을 수용하면서 회사에 질질 끌려 다니는가? 모든 조합원이 싸우겠다는데, 왜 위원장만 힘 없이 걸어 나오는가? 회사측 인간들은 협상장에 나올 때 어깨 쭉 펴고 나오는데, 기운 빠진 걸음으로 나오지 말라. 우리의 사기가 떨어지는 행동을 제발 하지 말라.”

조합원 4: “구속·수배 철회 받아냈는가? 왜 여성 조합원들을 자르는가? 나도 집회 때마다 ‘김광식’을 연호했다. 위원장! 여성 조합원은 놔두고 나를 자르라.”

조합원 5(식당 여성 조합원): “위원장, 한번 물어 보자. 철탐에 뭐하로 올라갔는가? (두 번 물었는데도 대답이 없자) 정리해고 철회 아니었는가? 나는 위원장 삭발식 때 많이 울었다. 이번 기회를 전화위복으로 삼고, 남자답게 싸우라. 나는 죽는 게 두렵지 않다.”

조합원 6: “위원장! 차리리 정리해고 명단을 노동조합이 정해서 사측에 제시하시오. 왜 여성 조합원을, 그것도 앞장서서 가장 잘 싸운 식당 아줌마를 해고하는 데 인정하는가? 차라리 해고하려면 이번 파업 투쟁에 참여하지 않은 조장·반장을 명단에 올려 해고하시오. 아줌마 조합원들은 절대로 안 된다.”

8월 24일 오전 7시 30분경 김광식 집행부는 정부안에 잠정 합의했다. 사수대원들은 ‘녹색 사수대’ 티셔츠를 모아 노조 사무실 앞에서 불태워 버렸다. 함께 싸웠던 조합원들은 현장에 거의 없었다. 하지만 빈 천막들만 남은 현장에는 저항의 불씨가 아직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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