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달 말 런던에서 열린 제6차 ‘역사유물론’ 학술대회에 다녀왔다. 처음에는 학술대회 발표 이외에 해외 마르크스주의 연구 흐름의 최신 동향 수집, 유명 마르크스주의 학자 인터뷰, 주요 진보 정치 단체 방문 등 다양한 스케줄을 계획했다. 하지만 애초 계획과 달리 초청 강연과 세미나 일정들이 추가되는 바람에 이번 영국 방문은 발표와 강연만 하다가 오고 말았다. 그래서 몇 가지 인상 외에 〈레프트 21〉 독자들에게 보고할 것이 별로 없는 점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역사유물론’ 대회는 같은 명칭의 마르크스주의 분야 세계 톱 저널인 《역사유물론》 편집위원회가 조직하는 마르크스주의 분야의 종합 국제학술대회인데, 2004년 1차 대회 이후 매년 가을 런던에서 개최해 왔으며, 작년부터는 북미지역 대회가 별도로 개최되고 있다(‘역사유물론’ 대회에 대한 상세한 소개로는 2007년 대회에 대한 김공회 씨의 개관 (《마르크스주의연구》 11호 게재)을 참고할 수 있다).

이번 제6차 대회는 2008~2009년 겨울 세계경제가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던 상황에서, ‘다른 세계는 필연적이다: 위기, 투쟁과 정치적 대안’이라는 공동주제 제목에서 보듯이, ‘준혁명적 상황’의 도래를 예상하며 야심차게 대규모로 준비됐다. 하지만 대회가 예정된 11월 말에 가까워지면서 세계경제 위기가 진정되자, 공동주제의 취지가 김빠지게 됐고, 그래서인지 원래 참석이 예고됐던 몇몇 좌파 거물 학자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럼에도 11월 27~29일 런던대학교 ‘동양및아프리카학대학’(SOAS)에서 열린 이번 대회에는 세계 각국에서 약 2백 명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이 참석했으며(우리 나라에서는 필자를 포함해 경상대 교수 세 명이 발표자로 참석했다), 이들이 3일간 총 97개 세션(그 중에는 피즐의 도이처상 수상 기념 강연, 《2010 소셜리스트 레지스터》 출판기념회, 프레데릭 제임슨의 특강 등 전체 세션 3개가 포함돼 있었다)에서 약 2백80편에 이르는 논문을 발표·토론해, 좌파 학술대회로서는 매머드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많이 논의된 주제는 당연히 경제 위기여서, 10개 이상의 세션에서 이 주제가 다뤄졌다. 그 중 《소셜리스트 레지스터》지가 조직한 연속 세션, ‘위기를 기록한다’(앨보, 패니치, 사드-필호, 파인, 브라이언 등이 발표자로 나섰다)에서 보듯이, 경제 위기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분석이 다수였지만, 모훈처럼 이번 경제 위기는 이미 종료됐으며 향후 ‘더블딥’ 가능성도 희박하다는 주장도 있었다.

또, 경제 위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대안을 다양한 측면에서 이론적·철학적으로 탐구하는 논문들이 약 20개 이상의 세션에서 발표됐다.

그 밖에 제국주의와 에너지·환경 문제도 각각 5개 이상의 세션에서 다뤄졌다.

이번 대회에는 지난 여름 암으로 사망한 피터 고완과 대회 개최 직전 카이로 강연에서 심장마비로 돌연 타계한 크리스 하먼을 추모하는 세션과 캘리니코스의 《제국주의와 글로벌 정치경제학》, 토마스의 《그람시적 계기》 등을 비롯한 주요 신간 마르크스주의 저작들의 출판기념회 등이 다채롭게 곁들여졌다.

하지만 필자는 유감스럽게도 다른 발표와 강연 일정으로 인해 ‘역사유물론’ 대회 세션에는 거의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대회가 마르크스주의 연구의 최근 주요 성과와 핫이슈들이 한꺼번에 집중적으로 논의된 자리였던 것은 분명하다. 또 이번 대회에서 발표된 논문들의 제목과 초록(이들은 ‘역사유물론’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을 훑어보면, 이들이 대부분 ‘구좌파’의 낡고 오래 묵은 토픽들을 21세기적 관점에서, 특히 오늘의 세계경제 위기 조건에서 다시 읽고 새롭게 조명하는 시도들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예컨대,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는 물론, 우리 나라에서는 한때 광적인 추종자들도 한물간 것으로 거들떠보지 않는 그람시와 알튀세르가 오늘날 세계경제 위기 상황과 관련해 다시 불려져 새롭게 해석되고 있었다. 이는 끊임없이 ‘포스트’를 추구하고, 새로운 외국 학자, 외국 이론을 추수하고, 따끈따끈한 신간 외국 문헌을 남들보다 먼저 인용·소개하는 것이 뭔가 새롭고 독창적인 것으로 오인되는 우리 나라 일부 진보학계가 배워야 할 점이 아닌가 한다.

청년들 속에서 고조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

이번 런던 ‘역사유물론’ 대회에 참석하면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참석자들 다수가 상당히 젊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1994년 가을 뉴욕에서 열렸던 《과학과 사회》지 주최 ‘레닌’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참석자들 대부분이 꽤 늙었다는 기억과 대조되었다(물론 이와 같은 대조적 인상이 필자가 그 사이 늙은 탓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실제로 이 대규모 국제학술대회를 조직·운영하는 이들 다수는 지금 막 전임강사(lecturer)가 됐거나 아직 박사과정 재학 중인 대학원생들이었다.

이번에 필자를 초청한 《역사유물론》 편집위원 캠플링도 《역사유물론》지의 창간 주역들은 당시 중진 유명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이 아니라, 1997년 창간 당시 대학원생들이었다고 확인해 줬다. 요즘 유럽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다시 ‘회춘’하고 있다는 일각의 관찰이 그다지 틀리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늙은 유럽’에서, 특히 이번 세계경제 위기에서 한때 초토화되다시피 한 세계 금융의 중심지 런던 시티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과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가 청년들 사이에서 고조되고 있는 것을 목격한 것은 고무적이었다.

필자는 이번 방문 중 퀸마리대학 경영대학원에서 ‘발전이론과 마르크스주의’라는 제목의 특강을 했는데, 이런 마르크스주의 강좌가 런던의 유명 국립 경영대학원에 개설돼 있다는 사실, 또 이 경영대학원 교수 중 상당수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보수 우익과 황금만능주의의 독무대인 우리 나라 경영대학 교수들이 이 사실을 알면 경악할 것이다.

시차

한편, 이번 ‘역사유물론’ 대회에서 구미 좌파 학자들이 발표하고 토론한 주제들 중 대부분이 우리 나라 진보진영이 고민하는 익숙한 주제들이었다.

또 우리 나라에서 이미 모두 번역되어 좌파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지고 있는 아리기와 하비, 브레너의 책들을 구미 좌파 학자들도 현재 주된 토론거리로 올리고 있었다. 이로부터 필자는 우리 나라 진보진영과 구미 좌파 이론 진영 간의 시차가 크게 좁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이번 방문 중에 만난 SOAS의 사드-필호 교수가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한국의 경상대가 마르크스주의 연구와 교육을 특성화한 대학원 과정을 개설한 것을 두고서 세계 최초의 시도라고 높이 평가하고, 자신들도 한국의 사례를 모델로 해서 마르크스주의 전공 독립 대학원 과정을 개설할 예정이라고 밝힌 데서 보듯이, 어떤 측면에서는 우리 나라 진보진영이 구미 좌파보다 앞서 나가는 분야도 있다.

또 필자는 이번 방문 중 만난 몇몇 마르크스주의 발전이론 연구자들을 통해서,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 경험에 기초해 수립된 ‘발전국가론’(developmental state)이 이제는 중국과 인도의 고도성장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확장되고 있으며, 나아가 구소련·동유럽 및 아프리카, 서남아시아 나라들의 경제발전 모델로 제시되는 등 발전이론의 새로운 지배적 패러다임 또는 연구프로그램으로 정착되면서, 동시에 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과 논쟁이 국제적 규모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21세기 세계의 발전과 진보를 위해 우리 나라 진보진영에 주어진 당면한 긴급 과제는 다름아닌 우리 한국 사회에 대한 연구, 특히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 대안을 연구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이번 런던 방문에서 진보진영 관련 정보 자료를 많이 수집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필자 개인적으로는 마르크스가 살고 공부하고 묻힌 소호 거리와 대영박물관, 하이게이트 묘지를 둘러본 것, 무엇보다 구미의 젊은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로부터 ‘기 받고’ 온 것은 나름대로 의미 있었다고 자위하며 귀국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