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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 동지 최후 진술

"지배자들의 위선과 부패와 폭력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검찰이 작성한 공소 사실에서 두 가지만 반박하는 것으로 최후진술을 대신하겠다.

검찰 공소장을 보면, 내가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노동자연대〉 신문을 판매하고 또 몇 가지 책들을 소지했다고 한다.

먼저,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가 무엇인지부터 분명히 해야겠다.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란 1848년 프랑스 혁명을 통해 얻어진 것과 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말한다. 즉,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 같은 기본적인 정치·시민적 권리들이 보장되는 사회인 것이다.

검찰의 주장대로라면 내가 이 땅의 자유 민주주의를 짓밟으려 했다는 것인데, 이처럼 큰 왜곡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자유 민주주의보다 더 높은 차원의 민주주의, 즉 노동자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사회가 대안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나라가 "자유 민주주의라도 됐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나라에는 사상의 자유는커녕 '게임의 자유'조차 보장되지 않고 있다.

최근 온라인 게임 '리니지'를 서비스하는 엔씨소프트는 '김정일 위원장', '공산당', '인민공화국' 등 '반국가적'인 게임 아이디를 삭제한다고 밝혔다. 알고 보니 국가정보원 요원들이 그 회사로 찾아가 '반국가적'인 이름의 아이디를 삭제하라고 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더 이상 살펴볼 것도 없다.

이미 서울구치소에만 양심수가 20여 명, 전국적으로 1백여 명의 양심수가 있다. 최근 노동자들이 구조조정에 반대해 투쟁하기 시작하면서 이 숫자는 점점 더 늘고 있다.

이 땅의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를 짓밟고 있는 것은 바로 검찰 자신이다. 검찰은 자유 민주주의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마치 〈조선일보〉가 '언론의 자유'를 말할 자격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 땅의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를 확립하는 유일한 길은 지금 당장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모든 양심수를 석방하는 것이다.

왜곡

검찰 공소 사실을 보면, "평소 각종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거나 소위 좌경의식화 학습을 하는 과정에서 … 폭력 혁명으로 자본가 계급을 타도한 뒤 노동자 계급 스스로 권력을 잡아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 활동해 온 자"라고 나를 소개하고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놈은 원래부터 빨갱이'라는 식이다. 이 공소장대로라면 나는 원래부터 보통 사람과는 다른, 아주 특이한 별종인 셈이다.

이 나라 검찰이나 기성 언론들은 늘 이런 식이다. 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수밖에 없는지는 숨긴 채 "나라 경제 망치는 파업"이라고 매도하기 일쑤다.

그러니 나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내가 "세상이 뭔가 잘못돼 있다"고 처음 느낀 건 1996년 봄 어느 날이었다.

그 날 서울 지역 학생들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의 불법 대선 자금 공개와 '교육 재정 GNP 대비 5퍼센트 확보' 공약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종로 거리로 나섰다.

경찰은 다연발 최루탄과 백골단을 앞세워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당시 나는 학보사 사진기자로서 단순히 시위를 취재하고 있었지만,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을 보고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날 학생 하나가 경찰에게 맞아 죽었다. 골목길로 도망치는 노수석 군을 경찰은 끝까지 쫓아가 구타했고 결국 숨지게 만들었다.

"등록금을 인상하지 말고 정부가 교육에 투자하라"는 그 학생의 주장이 그렇게 맞아 죽을 만큼 큰 잘못인가?

그것이 시작이었다. 검찰의 상상과는 달리 "좌경 의식화 학습"이 아니라, 정부의 부패와 위선, 경찰의 폭력이 내 인생을 바꿔 놓은 것이다.

지금도 그런 문제들은 전혀 해결되지 않거나 오히려 더 악화되고 있다. 정권이 바뀌어 대선 공약은 "교육 재정 GNP 대비 6퍼센트 확보"로 교육 예산이 1퍼센트 인상됐지만, 인상된 것은 단지 공약일 뿐이다. 실제 교육 재정은 약 4퍼센트로 해마다 그 비율이 줄고, 반대로 등록금은 인상되고 있다.

경찰 폭력도 여전하다. 김대중이 "최루탄 쏘지 않는 정부"라는 허상을 유지하려는 바람에, 오히려 경찰은 곤봉과 방패, 군화발과 돌맹이 등의 더 폭력적인 수단에 더욱 의지하게 됐다. 그 결과, 사소한 충돌에도 경찰의 시위 진압은 더욱 무자비해졌다.

11월 12일 있었던 노동자 대회에서도 경찰이 던진 돌맹이에 맞아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심지어 경찰은 주변을 지나가던 행인을 집단 폭행해 중태에 빠뜨렸다.

부정부패도 그대로다. 이번에 밝혀진 정현준 게이트는 "청와대, 금융감독원, 검찰, 정치인, 벤처 사업가, 사채업자에다 폭력 조직까지 연결된 거대한 커넥션이 존재한다"던 시중의 소문이 대부분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불평등도 마찬가지다. 구치소에 가 보면 벌금 낼 돈이 없어 하루 3만 원어치씩 징역살이를 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김대중 정부는 벌금을 못 내는 평범한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라도 '죄값'을 치르게 하고야 만다.

반면, 평범한 사람들의 돈을 도둑질했던 전두환과 노태우는 3천억 원에 가까운 추징금을 아직도 내지 않았다. 그들은 국방부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골프장에 딸린 1천8백만 원짜리 전용 호화 욕조에서 목욕을 하며 인생을 즐기고 있다. '몸로비'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린다 김은 구속된 지 두 달만에 석방돼 역시 미국에서 골프를 즐기고 있다.

몸로비

김대중 정부가 벌써 3년째 추진하고 있는 '구조조정'은, 경제를 살리기는커녕 빈부격차와 사회 모순만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대우자동차 부도의 최대 책임자는 다름아닌 김우중이다. 그는 회계 장부를 분식해 수십조 원을 빼돌리고 회사 돈을 쌈짓돈처럼 쓰고 다녔다. 그런 김우중이 지금 어디 있는가?

김우중은 몇 달 전에는 베트남에서 프로 바둑 기사를 초청해서 한 달 동안 바둑을 두더니, 지금은 프랑스, 독일 등 세계 각지를 유람하며 초호화 생활을 즐기고 있다.

이런 판국에 김대중 정부는, 김우중은 그대로 둔 채 아무 죄도 없는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에게 정리해고를 수용하라고 협박하고 있다. 이미 5개월째 임금을 못 받아 막노동판을 전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최근 여성단체들은 '향락업소'가 전국적으로 30만 곳이 넘고, 여기서 일하는 여성이 자그마치 1백20만 명으로 15∼29세 여성 인구의 20퍼센트에 이른다고 밝혔다. 젊은 여성 다섯 중 한 명이 매춘이나 그와 관련된 직업에 종사한다는 얘기다. 최근에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주부들이 1998년에 이어 다시 유흥업소로 내몰리고 있어 그 수가 점점 더 늘고 있다고 한다.

반면, 동방금고 부회장 이경자의 집을 압수수색한 결과 무엇이 나왔는가? 옷이 2천 벌, 밍크코트가 7벌, 구두가 2백 켤레, 팬티가 2백50장, 브래지어가 1백80장 나왔다.

민주노동당 당원 홍세화 씨는 우리 사회를 두고 '비계덩어리 사회'라고 부른다. 또, 어떤 언론인은 "경쟁에서 탈락하는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정부는 국민에게 세금을 거둘 자격이 없다. 동물의 왕국에서 세금을 걷는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라고 개탄한다.

4년 전 노수석 씨가 죽었을 때, 그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영안실로 모여 들었던 그 날 그 때처럼 이 땅의 노동자와 학생 들은 다시 일어설 것이다. '비계덩어리 사회'나 '동물의 왕국'이 아니라 진정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위해서.

그 투쟁의 한 가운데에 그 날 그 때처럼 나도 함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