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12월 30일, 용산참사 유가족들은 기자회견에서 “시신을 냉동고에 더 이상 둘 수가 없고, 총리가 사과를 한다고 하여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너무나 억울하고 가슴이 아프다”며 또 한 번 눈물을 쏟았다. 

유가족과 용산범대위는 “장례를 치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 정부의 책임 인정 및 사과, 유족과 철거민의 생계대책 보장을 요구해 왔고, 이러한 요구가 대부분 수용되어”(용산범대위)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했다.

2009년 12월 30일 용산참사 협상 타결 기자회견

정운찬은 기자회견을 열고 “총리로서 책임을 느낀다” 며, “유가족들에게 깊은 유감”을 표했다. ‘사인(私人) 간의 문제라 나설 수 없다’며 책임을 회피하고, 유가족들의 대화 요구와 용산참사 해결을 위한 1인 시위마저 경찰력으로 짓밟았던 정부가 끈질긴 저항과 국민적 요구에 밀려 한발 물러선 것이다.

경찰청장 내정자 김석기를 사퇴시킨 사건 초기 저항 이후에도, “용산참사가 잊혀질까 봐 두려웠지만, 도와주는 분들이 늘어날 때마다 용기를 얻었다”(유가족 권명숙 씨)는 유가족의 말처럼 사람들은 용산참사를 잊지 않았다. 

교수, 종교인, 노동자, 대학생, 문화예술인 등 각계각층이 시국선언을 발표하며 정부가 나서서 용산참사를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친서민’ 쇼를 벌이던 이명박에게 사람들은 용산참사부터 해결하라고 했다. 내각의 주요 인사청문회와 국정감사에서 용산참사는 중요한 쟁점으로 다뤄져 번번이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원죄 

진실과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용산국민법정’에 무려 2만 5천 명(애초 목표 1만 명)이 기소인으로 나섰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기독교대책회의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참사 현장에서 미사와 예배를 해 왔다. 크리스마스에는 무려 1천 명이 모여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지금도 선뜻 수십~수백만 원씩 익명의 후원금을 건네는 시민들이 있을 정도다. 글, 영화, 영상, 연극, 그림, 춤과 노래 등을 통한 문화예술인들의 다양한 연대도 계속돼 왔다.

이러한 용산참사 해결을 위한 대중적 요구에 밀려 정부는 유가족에 사실상 사과하고 유가족과 용산 철거민 들의 생계 보장 요구를 어느 정도는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세종시와 4대강 논란, 아프가니스탄 파병, ‘공기업 선진화’ 등 첩첩산중인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데, 용산참사 문제까지 해를 넘겨서 끌고가는 것은 부담이 컸을 것이다. 

서울시는 용산참사에서 “남은 숙제는 없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다. 검찰은 수사기록 3천 쪽을 감추고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 아직도 죄 없는 철거민들이 ‘도심테러리스트’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고, 김석기 등 책임자들은 처벌 받지 않았다. 

용산참사가 이명박 살인정부에게 씻을 수 없는 원죄라는 사실도 변함없다. 

건설사들의 이익만 보장하고 세입자들은 거리로 내모는 막가파식 개발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제2, 제3의 용산참사는 또 언제 터질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용산참사를 낳은 이명박의 서민 짓밟기에 맞서 계속 투쟁하는 것이 용산 철거민들의 넋을 진정으로 달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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