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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시대 북미 관계는 어디로?

이 글은 《마르크스21》 4호(겨울호)에 실린 글이다. 〈레프트21〉 독자들에게도 매우 유용할 거라 판단해 《마르크스21》 편집부의 양해를 구해 싣는다. (오바마 시대 북미 관계는 어디로? PDF 파일)

많은 이들이 오바마 정부 들어 북미 관계가 개선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런 기대와 달리, 2009년 한 해 동안 북미 관계는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2차 핵실험을 둘러싼 첨예한 긴장 속에서 살얼음판을 걸었다.

물론 이런 경색 분위기는 하반기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방북한 이후, 북미 간 대화 조짐이 나타났다. 특히 12월 8일 보즈워스 대북정책특별대표가 북한을 방문한 전후로 북미 관계 개선 기대감이 매우 높아졌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는 왜 생겼는가? 그리고 앞으로 북미 관계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부시 정부의 대북 정책에 비판적이던 오바마

북미 관계가 대화 국면으로 바뀐 것은 부시의 대북 정책 실패와 관련 있다.

부시 정부의 대북 정책은 클린턴 정부 시절 미국이 북한과 맺었던 합의들을 깡그리 무시하는 데에서 출발했다. 심지어 2002년 북한을 이란·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지목하고, 핵태세검토 보고서에서는 북한을 핵선제공격 대상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북한은 미국의 위협이 단지 말에서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여기게 됐다. 당시 미국 네오콘들은 “우리는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를 쳐부셨다. 우리는 북한군에 대해서도 똑같이 할 수 있다”는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북한 관료들이 느낀 공포심은 이라크 전쟁 직후 발표한 북한 외무성 성명에 잘 드러나 있다. “국제 여론도 유엔 헌장도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막지 못했다. … 그 어떤 첨단 무기에 의한 공격도 압도적으로 격퇴할 수 있는 막강한 군사적 억제력을 갖추어야만 전쟁을 막을 수 있다.” 심지어 북한 정권은 그동안 한결같이 요구해 오던 불가침조약에 대해서도 “미국과는 설사 불가침조약을 체결한다 하여도 전쟁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북한 당국이 말한 “막강한 군사적 억제력”은 다름 아닌 핵무기였다. 그래서 북한은 2003년 초부터 미국에 핵개발 계획을 흘리기 시작했다. 요컨대 부시 정부의 강경한 대외정책은 북한을 굴복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북한의 핵개발을 부추겼던 것이다.

부시 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한 미국 지배계급 내의 비판은 이미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 훨씬 전부터 제기됐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등 미국 지배계급 내의 전략가들 중 상당수가 이런 비판에 동참했고, 이런 비판 때문에 네오콘이 대외정책 일선에서 후퇴해야 했다. 비판의 핵심 키워드는 이라크 전쟁 실패였다. 너무나 명분도 없고 군사적으로도 실패한 전쟁이라서, 전쟁 과정에서 동맹국들과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국제적으로 위신이 추락했다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의 실패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행동을 제약하기도 했다. 부시 정부와 네오콘들은 중국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중국 봉쇄 전략을 세웠는데, 현실에서 부시 정부는 많은 문제를 두고 중국과 타협해야만 했다. 북한을 대할 때도 핵선제공격과 같은 무시무시한 엄포를 실행에 옮기기는커녕 종종 북한과 협상장에서 얼굴을 맞대야 했다. 그리고 간헐적으로 북한에 양보안도 내놓아야 했다. 이라크 전쟁 실패를 어떻게든 만회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중동 전선 밖의 문제는 크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부시 정부 하에서 북미 관계는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 북한의 행동을 단속하고 잠시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북한과의 협상에 나서곤 했지만, 부시 정부는 북한을 어떻게 대할지 분명한 전략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래서 협상과 제재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심지어 협상이 끝나자마자 약속 사항을 번복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북한은 미국이 아무리 협상장에 나섰다 해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라크 전쟁 때문에 미국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공격하기 어렵다는 점을 안 북한은 미국의 양보를 이끌어내기 위해 핵과 미사일 카드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부시 재선 후 얼마 되지 않은 2005년 2월 북한은 공식적으로 핵무장 선언을 했고, 그 해 9월 베이징에서 채택한 공동 성명을 부시가 휴지조각처럼 여기고 금융제재를 추진하자 2006년 북한은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으로 대응했다.

오바마는 부시 정부의 대북 정책에 비판적이었다. 오바마는 부시 정부가 실제로는 군사적으로 공격하지도 못할 거면서 초기에 북한에 강경한 태도를 취한 것이 북한을 자극했다고 본다. 그리고 2기 부시 정부 때 미국이 북한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긴 했지만, 정권 말기까지도 부시 정부가 뚜렷한 대북 정책 없이 북한에 끌려다녀 핵과 미사일 개발을 막지도 못하면서 미국의 체면만 구겼다고 본다. 그래서 오바마의 민주당은 대통령 선거 강령에서 이란에 대해서는 “더 강력한 제재”를 밝힌 반면 북한을 상대로는 군사적 옵션보다 “외교적 노력”을 강조했고, 심지어 이런 노력이 “뒤늦은” 것이라고 단서를 달기까지 했다.1

북한의 로켓 발사와 2차 핵실험

그럼에도 북미 관계가 처음부터 대화 국면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동안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핵실험을 둘러싼 첨예한 긴장이 지속됐다.

오바마 집권을 계기로 북한 당국은 미국의 대북 정책이 달라져 관계가 개선되기를 기대했던 듯하다. 오바마 정부도 북한과 대화에 나설 생각은 있었지만, 문제는 그보다 다급한 일들이 오바마에게 많았다는 것이다.

우선, 오바마에게는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가 파국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시급히 진화해야 한다는 과제가 있었다. 부시가 남긴 유산인 ‘테러와의 전쟁’이 위기에 처해 있는 것도 미국 지배계급에게는 커다란 문제였다. 이에 오바마는 부시와 꼭 마찬가지로 ‘테러와의 전쟁’을 대외정책의 1순위로 설정하고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결국 오바마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전선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오바마 정부에게 북한은 주된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북미 관계에서 당장은 변화보다 현상 유지를 택했다. 부시 정부 말기에 미국은 북한과 협상에 나서곤 했고 협상에서 몇몇 양보 조처를 취하면서도 여전히 압박을 병행했다. 오바마는 초기에 이런 일관성 없는 대북 정책을 그대로 유지한 셈이었다. 북한과 협상할 의향이 있다면서도, 부시 정부가 북한에 요구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 입장을 그대로 유지했고, 부시 정부가 북한에 가한 제재를 해제하지도 않았다. 북한은 2009년 3월 키 리졸브 한미 연합 군사 훈련 시행 여부를 오바마 대북 정책의 시험대로 여기겠다며 취소를 요구했지만, 오바마는 이 훈련을 그대로 강행하기도 했다.

오바마가 부시와 다른 대북 정책을 펼지 반신반의하던 북한은 미국의 대북 정책에 큰 변화가 없는 듯하자 장거리 로켓 발사를 강행했다. 지난 18년 동안 미국의 압박에 시달려 온 북한으로서는 점점 참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이제 오바마도 부시처럼 북미 관계 개선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면 북한은 미사일과 핵을 이용해 미국의 처지를 곤혹스럽게 할 것이라고 시위한 것이었다.

그 뒤 오바마는 북한 기업 3개를 상대로 제재를 추가하고 다른 강대국들까지 동원해 북한을 비난했다. 그러나 이런 비난은 명분 없는 것이었다. 북한은 자신들이 발사한 물체가 인공위성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동안 인공위성을 스타워즈 계획 등 군사적 용도로 사용해 온 미국이 북한을 비난하는 것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의 이중 잣대였다. 북한이 반발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훤한 일이었다.

실제 북한은 외무성 성명에서 밝혔듯이, 미국이 “대조선 적대시 정책에서는 조금도 변화가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는 결론을 내리고 2차 핵실험으로 대응했다. 이에 오바마가 유엔 안보리 의장 성명을 통해 제재를 추진하자 북한은 다시금 플루토늄 무기화와 우라늄 농축 선언으로 맞받아쳤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한에 대한 대화 기조는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았고, 남한에 핵우산을 비롯한 ‘확장 억지’를 제공하기로 하는 등 북한 핵실험 이후 한미 정상회담까지 오바마는 강경 기조를 버리지 않았다.

대화 국면으로 전환

이렇듯 2009년 상반기 동안 살얼음판을 걷는 듯 아슬아슬하던 북미 관계는 북한에 억류된 미국 여기자 두 명을 석방하고자 빌 클린턴이 방북한 뒤로 조금씩 변화 조짐이 생겼다. 물론 미국은 좀 더 유리한 조건에서 협상하려고 여러 구상을 재보고 동맹들을 다독이느라 실제 협상에 나서기까지 시간을 꽤 끌기는 했지만, 북미 관계가 점차 협상 국면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점은 명백한 듯했다.

오바마로서도 북한의 로켓 발사와 핵실험에 아무런 강경 대응을 하지 않으면 ‘세계의 경찰’로서 미국의 위신이 떨어질 수 있고, 그리 되면 다른 나라들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을 용인하는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에 재빨리 비난하고 제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북한을 강경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미국이 중동 전선에 발목이 잡혀 있는 바람에 북한을 근본적으로 굴복시킬 수 있는 실질적 카드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미국은 북한을 상대로 군사적 공격을 감행할 처지가 못 된다. 중동 한 지역에서 벌이는 전쟁에서도 승기를 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전선을 확대할 여력이 없다. 심지어 주한미군조차 중동 전선으로 차출해야 할 지경이다. 설령 북한을 군사적으로 공격하더라도, “추가적인 재처리 활동이나 미사일 발사를 방지하는 효과를 낼 수는 있겠지만, 평양에 있는 비축 핵무기를 제거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군사적 공격은 상황을 악화시켜 미국의 동맹국과 그 지역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2 정권 교체나 체제 붕괴 카드도 쉽지 않다. “북한 체제를 붕괴시킨다는 것은 지정학적으로 여러 위험한 파장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3

경제적·군사적 제재는 어떠한가? 미국은 이미 부시 정부 때부터 북한을 상대로 제재를 지속하고 있었고, 북한의 로켓 발사 직후 제재를 추가했다.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미국은 유엔 안보리 의장 성명을 통해 다른 강대국들로부터 추가적인 제재 협조를 이끌어 냈다.

이명박 정부와 우파들은 북미 관계가 대화 국면으로 전환된 것이 이와 같은 강력한 제재의 효과라고 대북 강경 정책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실제 제재 효과는 미미했다. 무엇보다 북한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이 제재에 큰 열의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9년은 “북중 친선의 해”로 중국과 북한의 교역은 줄어들기는커녕 작년보다 다섯 곱절로 증가했다.

북핵 실험 초기에 중국은 북한이 자신의 앞마당에서 불안정을 키워 미국에게 개입 명분을 주는 것이 못마땅한 데다, 미국의 뜻을 정면에서 거스르는 것이 부담스러워 유엔 결의안을 지지하고 제재에 동참하는 듯했다. 그러나 북한을 미국과의 정면 충돌을 막아주는 완충지대로 여기는 중국은 취약해진 북한 체제가 제재 때문에 더 심각한 위기에 빠지는 것을 바라지 않아, 실제로는 제재에 힘을 싣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김하영이 북한 로켓 발사 직후 일찌감치 예측했듯이, 미국은 “중동에 발이 묶여 북한과 대화하는 것 말고는 별 대책이 없는 것”이었다.4 제재의 효과 덕분에 북한이 굴복한 것이 아니라, 다른 카드가 없는 오바마 정부가 결국 북한과 협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보즈워스 방북 결과

그러나 협상이 순탄히 진행될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보즈워스와 북한 당국은 방북 직후 회담이 “매우 유용했다”고 발표했지만, 6자회담을 재개하는 구체적 시점과 방식은 합의하지 않은 듯하다.

북미 관계 개선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은 이번 회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어한다. 가령 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 장창준 연구위원은 이번 회담이 “1백20퍼센트” 성과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북한과 미국이 배열하는 순서는 다르지만, 비핵화뿐 아니라 평화체제, 관계정상화, 경제지원 등에 대한 논의를 했다는 것이다. … 이것이야말로 그동안 북한과 미국이 모색해왔던 ‘돌이킬 수 없는’ 논의의 진전이라 할 수 있다.”5

그러나 북한과 미국이 “배열하는 순서”가 다르다는 것이 쟁점이다. 북한은 여전히 평화체제 이행과 관계정상화를 6자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내걸고 있고, 미국은 북한이 제시한 의제는 6자회담 틀에서만 논의할 수 있다며 ‘선 6자회담 복귀’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 6자회담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열릴지도 합의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보즈워스 방북 직후 발생한 무기 선적 화물여객기 수색 사건은 북미 관계 개선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보여 준다. 미국은 북한을 출발한 무기 선적 의심 화물여객기 정보를 태국에 넘겨 수색하게 했는데, 미국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이번 사건이 미국이 북한과 대화를 하면서도 제재 등 압박 수위를 낮추지 않겠다고 경고한 것이라고 말했다.6 이미 북한의 2차 핵실험 직후 나온 미국 신안보센터CNAS 보고서를 보면, 북한이 핵을 포기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므로 미국은 협상 와중에도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더욱 강력한 제재를 추진”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7

물론 단기적으로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 상황의 위기 때문에 북한과의 관계에서 시간 벌기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래서 지난한 협상 끝에 2005년 9·19 공동성명이나 2007년 2·13 합의와 같은 합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난 20년 간 북미 관계의 여정을 되돌아보면, 이런 합의를 “돌이킬 수 없는” 진전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경제 지원 의제는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에서, 평화체제와 관계정상화 의제는 2000년 북미 공동 코뮤니케에서 이미 다룬 적이 있지만, 미국은 얼마든지 자신의 입맛대로 이런 논의를 무시하고 합의 사항을 뒤로 돌이키곤 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이 의제들은 여전히 협상 의제로 올리느냐 마느냐 수준에서 힘겨루기 소재가 되고 있다. 이렇듯 앞으로의 북미 관계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지난 20년 간 북미 관계의 여정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클린턴 대북 정책의 양면성

많은 개혁 성향 한반도 전문가들은 오바마 정부의 대외정책 담당 각료들이 대체로 클린턴 정부와 연속성이 있다는 점 때문에, 오바마 정부를 클린턴 정부와 비교하곤 한다. 그리고 클린턴 정부 때 북미 제네바 합의와 북미 공동 코뮤니케와 같은 북미 관계 개선을 담은 중요한 합의가 있었다는 이유로 오바마 정부에서 북미 관계가 근본적으로 개선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는 북한이 핵을 동결하는 대가로 미국이 경수로 두 기 건설을 지원하고 중유를 제공하기로 한 합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를 클린턴 정부의 대북 포용 정책이 거둔 성과라고 평가했고, 지금도 바로 이런 정책이 오바마 정부의 대북 정책으로 계승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클린턴 정부가 일관되게 대북 포용 정책을 구사했다고 보는 것은 제네바 합의 직전까지 미국이 핵 위협을 빌미로 북한을 압박했고 그러한 압박이 북미 간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까지 발전했다는 점을 외면하는 것이다. 1992년부터 미국이 북한 핵 의혹을 부추기자, 이에 반발한 북한이 1993년에 핵확산방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북미 간 위기가 고조됐다. 북미 간 핵협상이 열렸지만 회담이 결렬되자 미국은 곧 북한을 군사적으로 위협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의 국방장관은 윌리엄 페리였는데, 그는 1999년 북미 협상에서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을 동결하면 단계적으로 보상한다는 ‘페리 프로세스’를 입안해 대북 포용 정책을 구현한 대표적 인물로 꼽히지만, 당시만 해도 북한을 상대로 한 전쟁 계획을 세우고 항공모함 인디펜던스호를 한반도 주변 해역에 보내도록 지시한 장본인이었다. 6월에는 주한 미군사령관과 주한 미국 대사가 한국에 거주하는 미국인 철수 계획을 실행하기로 하면서 미국의 북폭 계획이 말뿐인 엄포가 전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났다.

이 위기는 북미 제네바 합의로 몇 년 간 봉합됐다. 왜 갑자기 전쟁 위기가 회담으로 전환됐는가? 사람들은 대체로 전 대통령 카터의 방북이 전쟁을 피하게 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카터가 방북해서 6월에 회담이 재개되긴 했지만, 당시 카터의 방북에 많은 강경파들이 반발했고, 그 결과 대북 제재 국면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북미 합의가 결정적으로 진척된 이유는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과 관련 있었다.8

이미 북한은 1980년대부터 경제 위기를 겪어 1990년대 초에는 위기가 극심해졌는데, 김일성의 사망으로 미국은 북한 체제가 급속히 붕괴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하게 됐던 것이다. 미국은 북한 체제 붕괴가 남한·중국·일본 등 주변국에 끼칠 불안정과 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통제력이 위기를 맞을까 봐 우려했다. 결국 미국은 전쟁 계획 등 대북 압박을 거두고, 북한에 중유 제공 등을 약속해야 했다.

북미 제네바 합의로 북미 간 ‘유화 국면’이 몇 년 간 이어졌다. 그러나 클린턴 정부는 1998년 들어 북한에 새로운 핵 시설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이는 그 해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로 이어져 북미 미사일 위기를 낳았다. 이는 1997~98년에 있었던 여러 사건들, 즉 1997~98년 동아시아 경제 위기와 1998년 봄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실험 등과 관련 있었다. 동아시아 경제 위기는 인도네시아 혁명 등 동아시아 지역에 정치적 불안정을 낳았고,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실험은 미국의 핵 독점에 균열을 내고 있었다. 미국은 이런 사태 전개가 자신의 세계 지배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여겨, ‘북한 위협’을 카드로 미국 패권을 재천명하려 했던 것이다.

이렇듯 대북 포용 정책을 폈다고 평가되는 클린턴 정부는 실제로는 미국의 세계 패권 유지 목적에 따라 강경 정책과 유화 정책을 롤러코스터 타듯이 급격히 바꿔가며 사용했다. 그리고 이 위기는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북한을 둘러싼 위기의 배경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북한을 둘러싼 위기는 왜 지난 20년 동안 계속됐는가? 북한이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해 세계 평화를 위협해 왔기 때문인가?

물론 북한 관료들이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 사이에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자고 결심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결심의 근본 원인을 북한의 호전성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게 된 것은 냉전 해체 무렵의 세계 질서 변화와 관련 있다.

1991년까지 남한에 배치된 미국 핵무기는 수백 기에 달했고, 1976년부터는 북한과 핵전쟁을 벌일 것을 염두에 둔 ‘팀스피리트’ 한미 연합 훈련이 매년 열렸다. 계속해서 이런 공포에 시달리던 북한은 냉전이 해체되면서 더는 소련 핵우산을 믿지 못하게 됐다. 이는 북한이 자위적 무기를 개발하려는 동기로 작용했다.

우파들은 1991년 미국이 남한에서 핵무기를 철수한 이상 북한의 핵무장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남한 영토에서 핵무기를 철수했어도 미국의 핵우산은 남한에 계속 보장됐다. 게다가 북한은 1991년 걸프 전쟁을 보고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약소국을 군사적으로 초토화할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실제 걸프 전쟁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던 콜린 파월은 승전 직후 “나는 이제 김일성에게 가볼 생각이오” 하며 북한을 위협했고, 이듬해 미국은 핵을 빌미로 북한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런 정황이 북한으로 하여금 ‘자위력’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1990년대 초까지 북한은 핵무기가 없었던 듯하고, 1991년부터는 플루토늄을 재처리하지도 않았고 미국의 압력에 타협해 IAEA의 사찰에도 응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부분 동결 노력을 무시하고 전면 사찰을 받으라는 압력을 가했다. 이에 반발한 북한은 이듬해 NPT를 탈퇴했다. “부분적 동결은 북한이 핵무장을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의 안전 보장과 정치적·경제적 혜택을 받으려 할 수도 있다는 표시였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아무런 선물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의 선물을 제공하는 것을 내켜 하지 않았다.”9

즉, 약 20년 전부터 북한 위기가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북한보다 미국의 책임이 비할 바 없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북한을 둘러싸고 위기를 의도적으로 부추겼는가? 이는 걸프전이 발생하게 된 요인과도 연관 있다. 바로 냉전 해체 이후 더 불안정해진 세계 질서에서 미국이 패권을 유지할 방도와 관련 있었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냉전 해체로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고 봤지만, 실제로 미국은 냉전 해체 무렵 모순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미국은 소련과의 군비 경쟁에서 승리하면서 군사적으로는 유일 초강대국이 됐지만, 냉전 기간에 미국의 경제적 위상은 계속 하락했다. 반면 일본과 독일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서 엄청난 경제적 성과를 거뒀다. 그 결과 냉전 해체 무렵 미국의 지위를 넘볼 잠재적 강대국이 여럿 등장하게 됐다.

그래서 미국 지배계급은 냉전 해체 이후에도 다른 강대국들이 미국의 세계 패권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데 주력하게 됐다. 이를 위해 동아시아는 미국에게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지정학적으로 동아시아는 일본·중국·러시아 등 미국이 경계하는 강대국들이 밀집해 있는 곳인 데다, 냉전을 거치면서 세계 경제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올랐다. 동아시아가 차지하는 시장 규모는 이제 미국 경제를 추월했다.

1980년대까지 이런 경제 성장의 견인차는 바로 일본이었다. 이 때문에 냉전이 끝나갈 무렵, 미국은 일본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일본이 미국의 통제를 벗어나 부상한 경제력에 부합할 군사 대국화를 추진한다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지위를 넘볼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냉전 해체 전만 해도 소련 블록이라는 가시적 위협이 존재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을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묶어놓을 수 있었지만, 냉전이 해체된 뒤로는 이런 명분도 사라지게 됐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냉전 해체 전후로 북한의 핵무장 의도를 의심하게 된 미국은 이것이 미국 주도의 핵독점 체제에 균열을 일으킬까 봐 우려했다. 가뜩이나 냉전 기간에 경제적으로 미국을 추격하던 일본이 북핵 위협을 빌미로 독자적 핵무장에 나선다면 일본이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결국 미국은 북한을 ‘동아시아판 이라크’로 만들어 동맹을 강화할 새로운 명분으로 삼고, 북한에 강경 대처하면서 동아시아의 주변 강대국들에게 동아시아의 불안정 요소를 제거하려면 여전히 미국 군사력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을 각인시키고자 했다. 클린턴 정부가 1994년 6월 북한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 나서려 했던 것이나, 1997년 동아시아 경제 공황 직후 북한의 핵·미사일 위기를 부추긴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을 동맹으로 묶어두려는 미국의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다. 1999년 일본은 MD(미사일 방어) 체제 개발에 협력하기로 결정했는데, 이 결정은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추구하는 미국의 걱정을 덜어줬고, 그 결과 유화 국면이 조성되면서 2000년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공동 코뮤니케 등이 가능했다.[1]

그런데 최근에는 중국의 부상도 미국 지배계급에게 골칫거리다. 중국은 특히 일본이 불황의 늪으로 빠져든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매년 10퍼센트 안팎의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뤘다. 게다가 문제는 중국이 경제 성장과 함께 군사력 증강에도 사활을 걸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 중국은 해군력과 공군력을 대폭 강화하고, 미국을 겨냥한 듯이 인공위성을 격추시킬 정도로 미사일 기술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이 때문에 2000년대 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외교 전략은 중국 포위에 맞춰져 있었다.[2] 이는 동아시아에서 미일 동맹을 강화해 중국과 대립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북한의 위협”은 미국이 이런 전략을 수행하는 데서 여전히 중요한 카드로 사용될 수 있었다.

세계경제 위기와 ‘테러와의 전쟁’

미국 지배계급의 양대 정당 중 하나인 민주당 소속 대통령으로서 오바마도 냉전 해체 이후 미국 지배계급이 설계하는 세계 전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여기에 부시가 남긴 두 가지 유산을 더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2008년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테러와의 전쟁’이다.

먼저, 세계경제 위기가 대외정책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자. 몇 년 전에만 해도 오늘날의 세계를 미국 유일 초강대국이 지배하는 일극 체제로 보는 견해가 다수였는데, 세계경제 위기 상황이 점쳐지면서 미국 패권 몰락과 다극 체제 도래라는 화두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미 미국의 경제력은 냉전 기간 내내 쇠퇴해 왔지만,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의 여파로 미국 헤게모니 쇠퇴와 중국의 부상이 더 두드러지게 됐다.[3]

이런 변화를 두고, 많은 분석가들은 미국이 협력적 대외정책을 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가령 평화네트워크 정욱식 대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동북아에서 권력 재편이 일어나면서 어떤 나라도 질서와 규범을 강제하는 패권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반면에, 협력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 오바마는 부시처럼 제국 건설을 시도하기보다는 협력적 다자주의와 리더십 회복을 통한 세계 전략을 공언하고 있다. 이는 강대국 간의 패권 경쟁 경향이 퇴조하고 협조 체제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10

이런 분석은 특히 미중 관계를 전망하는 데 적용되곤 하는데, 경제 위기 상황에서 미국이 중국의 미국 국채 매입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 두 나라 사이에 협력적 관계를 강제한다고 본다. “금융 경제 위기는 국가 간 협력의 필요성을 크게 증진시킨다. … 경제적 상호 의존성 증대가 안보 갈등을 피하고자 하는 동기로 작용할 것임은 분명하다.”11 오바마 정부가 중국과 “전략적 동반자” 선언을 한 것은 이런 변화를 보여 준다는 것이다. 정욱식 대표를 비롯한 많은 한반도 전문가들은 이런 변화 때문에 ‘동북아 평화 체제’ 도래 가능성을 낙관적으로 점친다. 만약 정욱식 대표 분석대로 미국이 협력적 대외정책을 편다면,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패권 경쟁을 위해 ‘북한 위협’을 명분으로 삼는 일도 줄어들 것이고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평화 체제가 도래할 것이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에 의존해야 하는 정도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곧 협력 일변도로 나아가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미국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 패권 유지에 위기감을 느낄수록 겉으로는 중국 등과 협력적 제스처를 취할지라도 실제로는 더 치열하게 견제하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는 이윤 경쟁을 위한 국가 간 정치적·군사적 경쟁이 본성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체제 하에서 국가들이 영구적으로 협력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러한 경제적 상호 의존이 외교적,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군사적 충돌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인지의 문제는 남아 있다. 역사적 증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 심지어 순전히 경제적인 경쟁조차 경제 영역에만 한정될 수 없도록 만든 것은 바로 이러한 상호 의존 — 언제나 경제적 협력뿐 아니라 경제적 경쟁도 수반하는 — 이었다. 그러한 긴장들은 어느 시점에서는 국가들 사이의 갈등으로 비화했다. 제1차세계대전의 경우 전 세계 상당수 국가들이 경제 관계의 토대를 재편하기 위한 무기로 군사 행동을 선택하는 바람에 세계적 충돌이 일어났다.

중국이 공업화하고 있는 세계적 환경은 더 장기적으로는 그러한 충돌의 가능성을 더 크게 만든다. 미국이 대중국 투자와 재정 적자 해결을 위해 중국의 재원 조달에 의존하면 할수록, 미국은 이러한 경제적 생명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군사력 사용이 더욱더 절실해질 것이다.12

단기적으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는 없지만, 두 나라 사이의 경제적·외교적 갈등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11월 오바마가 아시아 순방 과정에서 위안화 절상 문제,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 등을 두고 중국·일본 등과 마찰을 빚은 것은 이런 단면을 잘 보여 줬다. 당시 오바마는 여전히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맹주로 남고자 하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는데, 만약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지위에 도전하는 듯할 때 미국은 언제든 동아시아 강대국들을 견제하기 위해 갈등을 유발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그리고 ‘북한 위협’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여전히 미국이 동아시아에 개입할 명분으로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오바마가 부시에게서 물려받은 다른 하나의 유산은 ‘테러와의 전쟁’이다. 오바마는 이미 대외정책 1순위로 ‘테러와의 전쟁’ 승리를 설정했고, 특히 아프가니스탄 전선에 집중하고 있다.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에서 겪은 위기는 부시의 대북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러한 특징은 오바마 정부에서도 재현될 가능성이 높다.

‘테러와의 전쟁’이 가져온 첫 효과는 북한을 공포에 떨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 관료들로 하여금 다시 핵무기를 자위 수단으로 삼기를 적극 검토하도록 부추겼다. 그러나 2003년 여름 무렵 이라크에서 저항이 확대되고 이로 말미암아 미국이 이라크에서 수렁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변했다. 그토록 호전적이던 부시 정부도 ‘테러와의 전쟁’에서 겪은 위기 때문에 전선을 확대할 여력이 없어, 집권 2기 들어서는 대북 협상과 제재 사이를 오락가락해야 했다.

오바마의 미국도 당분간 중동 전선에 집중해야 하므로, 단기적으로 북한을 상대로 전면적 강경책을 구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북미 관계가 마냥 순탄할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앞으로의 북미 관계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협상과 합의, 합의 파기와 강경 대응 등이 교차하는 불안정한 양상을 보일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동아시아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각축장인 데다, 미국이 냉전 해체 이후 자신의 세계 패권을 지키고자 이곳에 계속 개입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불거지는 강대국들 사이의 갈등이 앞으로도 북한 문제를 둘러싸고 표면화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만약 세계경제 위기가 지금보다 훨씬 심각해지고, 강대국들 사이의 갈등이 첨예해져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유지하는 데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된다면, 중동 전선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군사적 카드를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항구적 평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강대국들 때문에 강제로 분단되고 같은 민족끼리 끔찍한 전쟁을 치른 한반도 민중은 평화 열망이 강하다. 그러나 지난 20년 간 북미 관계는 전쟁 위기를 포함해 수많은 갈등을 겪는 등 민중의 열망과는 어긋났다. 따라서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항구적 평화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최근 이런 열망이 평화협정 체결 기대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평화협정 체결 요구는 지지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평화협정이 진정한 평화체제를 가져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 가지 이유는 북미 간이든 남북미중 4자 간이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당사자 중 하나인 미국을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오죽하면 리영희 선생은 2005년 9·19 공동성명 직후 한껏 북미 관계 개선에 기대가 부풀어 있을 때조차 이 점을 경고했다. “미국이 조약을 단 한 번도 지킨 사례가 없으므로 이 사실로부터 출발해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 문제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판단의 단서를 잡아야 한다. … 북경회담 합의문이라는 종이 조각을 토대로 해서 상황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13

사실, 미국의 북한 위협은 정전협정 체제와 같은 ‘냉전 유산’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탈냉전 이후 여러 강대국들이 미국의 지위를 넘본다는 점 때문에 미국은 동아시아 강대국들을 견제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북한 위협’을 명분으로 삼는 것뿐이다. 따라서 미국은 언제든지 평화협정에 구속되지 않고 북한을 위협하려 할 수 있다.

설령 평화협정이 ‘돌이킬 수 없는’ 협정으로 존속하더라도 과연 평화협정이 항구적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벌써부터 평화협정 문제는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쟁점화하고 있는데, 남한 외교통상부 장관 유명환은 북미 간 평화협정을 반대하면서 평화협정 논의가 주한미군 철수로 이어지면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이미 미국과 남한은 주한미군의 영구 주둔을 꾀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때 미국과 한국은 주한미군을 놓고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했는데, 이는 주한미군의 임무를 확대하고 영구 주둔의 명분을 만드는 것이었다.

전략적 유연성 합의에 의하면, 주한미군은 앞으로 단지 북한의 대남 공격에 대항하는 방어 구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중국 등 지역 강대국들을 겨냥해 동아시아 지역에 개입하고 더 나아가 ‘테러와의 전쟁’ 등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에 신속하게 개입할 수 있는 신속대응군 기지로 재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용산 미군기지를 평택 기지로 확장 이전하기로 합의했다.

사실, 북한조차 평화협정 체결 이후 주한미군이 반드시 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은 지 오래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워싱턴포스트〉에 다음과 같이 인터뷰한 바 있다. “김 위원장은 주한미군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한국의 입장을 잘 이해했다. … 한반도는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주한미군이 남아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그의 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14

주한미군의 구실 변경은 한반도 영토가 미중 간 군사적 충돌을 위한 전진기지가 되는 위험천만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런데 북미 간이든 남북미중 간이든 평화협정이 체결된다고 해서 자동으로 주한미군이 철수한다고 보기 어렵게 됐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진정한 평화체제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평화협정만으로는 부족하다.

물론 좌파 민족주의 활동가들 중 일부는 북한의 선군정치와 뛰어난 외교력이 미국을 근본적으로 굴복시킬 수 있다고 여긴다. 지금까지 미국을 협상장으로 끌어 낸 것도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와 핵실험, 그리고 ‘평화공세’였고, 앞으로도 북한이 “핵 억제력을 앞세워 대화에 나서는 이상 북미대화는 다소간 진통을 겪더라도 언젠가는 북미군축회담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게 될 전망”이라는 것이다.15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이, 미국이 북한과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는 근본적 이유는 다른 강대국들에 대한 미국 헤게모니 약화와 ‘테러와의 전쟁’이 겪는 위기 때문이다.

게다가 핵군축을 위해 핵개발을 한다는 논리는 어불성설이다. 북한의 핵개발은 미국 등 강대국들의 핵에 비하면 훨씬 작은 위험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일본과 남한 등 동아시아 주변국들의 핵 개발과 경쟁을 자극할 수 있다. 이런 핵 경쟁은 동아시아를 끔찍한 핵전쟁 공포로 몰아넣을 수 있다. 그리고 민중은 이런 끔찍한 군비 경쟁에 쏟아부을 천문학적 비용 때문에 복지 삭감 등 더한층 생존의 어려움에 내몰리게 될 것이다. 이미 북한 체제는 로켓 발사와 핵실험 등 자본주의의 군사적 경쟁 논리에 종속돼 주민들의 삶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강대국 간 경쟁이 치열한 동아시아와 한반도에서 항구적 평화가 도래하려면 근본적으로 세계 패권을 위해 강대국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체제, 즉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체제를 변혁해야 한다. 이는 패권 경쟁 당사자들의 약속으로도, 북한 당국처럼 핵과 미사일을 이용해 제국주의 강대국과의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으로도 가능하지 않다. 이런 식으로 항구적 평화가 가능하다면, 진보진영이 할 일은 그저 협상이 얼마나 순조롭게 진행되는지 지켜보며 응원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진영에게는 이런 수동적 과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체제 변혁의 씨앗은 오늘날 경제 위기와 전쟁 등 자본주의적 제국주의가 낳는 여러 실패에 맞선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저항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 진영은 이런 저항에 방향타를 제공해 이를 체제에 대한 근본적 도전으로 발전시킬 임무가 있다. 이 과제가 성공할 때만 진정한 한반도 평화도 가능할 것이다.

출처 : 《마르크스21》 4호(2009년 겨울호)

1 ‘미국 민주당 대선강령: 미국의 약속을 회복하기 위하여’, 《오바마 시대, 변화하는 미국과 한반도》, 시대의창, 2009, 279쪽. [↑본문]

2 미국 신안보센터, ‘No Illusions: Regaining the Strategic Initiative with North Korea’, 2009년 6월. 미국 신안보센터는 커트 캠벨 동아태 차관보가 소장으로 있는 연구소로 오바마 정부 들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본문]

3 같은 글. [↑본문]

4 김하영, ‘미국의 대북 적대가 키운 북한 “위협”’, 〈레프트21〉 3호(2009.4.11). [↑본문]

5 장창준, ‘보즈워스 1차 방북 1백20퍼센트 성공, 가시적 성과는 2차 방북부터 나올 것’, 〈통일뉴스〉(2009.12.14). [↑본문]

6 Thomas Fuller & David E Sanger, ‘Thais Seize Plane With Weapons From N. Korea’, 〈뉴욕타임스〉(2009.12.12). [↑본문]

7 미국 신안보센터, 앞의 글. [↑본문]

8 김하영, 《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 책벌레, 2003, 21쪽. [↑본문]

9 리언 시걸, 《미국은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사회평론, 1999, 19~20쪽. [↑본문]

10 정욱식, 《오바마의 미국과 한반도, 그리고 2012년 체제》, 레디앙, 2009, 222쪽. [↑본문]

11 같은 책, 223쪽. [↑본문]

12 존 리즈, 《새로운 제국주의와 저항》, 책갈피, 2008, 96쪽. [↑본문]

13 김하영, ‘9.19 공동성명 1년을 돌아보며’, 〈맞불〉 12호(2006.9.16). [↑본문]

14 〈워싱턴포스트〉(2008.8.30). 정욱식, 《21세기의 한미동맹은 어디로?》, 한울, 2008, 243쪽에서 재인용. [↑본문]

15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대격돌〉(2009.9.28). [↑본문]

[1] 일본의 MD 참여 이후 미일 간에는 군사적 일체화 경향이 강해졌다. 최근 일본은 해외 파병을 강화하면서 재무장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이와 같은 일본의 군국주의화는 미국의 묵인과 협력 하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근본적으로 동아시아에서 군비 경쟁을 가속화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본문]

[2] 동쪽으로는 일본과 남한과 동맹을 강화하고, 서쪽으로는 인도를 동맹으로 끌어들여 중국과 대립하게 하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통제를 강화하며, 남쪽으로는 대만과의 분쟁에 대비하는 것이다.[↑본문]

[3] 미국 패권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고 다극화 경향이 강화되고 있더라도, 온전히 수평적인 다극 체제가 도래했다고 보는 것은 과장이다. 미국 패권이 냉전 초기보다 쇠퇴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군사적으로는 당분간 미국을 따라올 강대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도, 아무리 쇠퇴했다고 해도 여전히 미국 한 나라가 세계경제의 약 20퍼센트를 떠받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세계 체제는 일극적 다극체제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