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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사후 60년:
좌파의 관점에서, 좌파를 위해 글을 쓴 작가

1950년 1월 21일 조지 오웰이 사망했다. 오웰은 이튼 스쿨을 다녔고, 제1차세계대전 뒤에 버마로 가 제국 경찰이 됐다. 번듯한 이력으로 그의 앞날은 전도유망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936년에 오웰은 사회주의자가 됐다. 그 이듬해 이 전직 제국 경찰은 스페인에서 혁명적 아나키스트 의용군과 함께 소총을 들고 있었다. 오웰은 사장들의 군대를 떠나 노동자들의 군대에 합류했다. 왜?

오웰이 세상에 처음 눈을 뜬 곳은 버마였다. 그가 《제국은 없다》(서지원)에서 묘사한 식민정권은 사명감, 도덕, 이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식민정권의 목표는 조직된 약탈 그 자체였다. 오웰은 “내가 반대하는 것은 비열하게 백인의 짐이라고 그들이 말하는 협잡이오. 백인나리로 행세하는 것 말이오.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오” 하고 썼다. 지칠 대로 지친 오웰은 1927년에 추악한 사업들을 부끄러워하며 버마를 떠났다.

유럽으로 돌아온 오웰은 처음엔 서구 사회를 강하게 비판하지 않았다. 그는 버마 시절을 속죄하는 심정으로 파리와 런던에서 밑바닥 생활을 했다. 《파리·런던 방랑기》(書堂, 1933년에 첫 출판됐다)는 이때의 체험기다. 이 글에서 오웰은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어찌할 수 없는 선택 상황과 맞닥뜨린 개인들에 관심을 보였다. 이때까지 오웰은 룸펜의 눈으로 노동계급을 봤다. 그가 조직된 노동계급과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탓이다.

좌파 출판업자 빅터 골란츠가 오웰에게 영국 북부 탄광 지대의 상황을 취재해 달라고 요청했다. 1936년 봄 랭카셔와 요크셔의 탄광 지대에 가 광원들의 집에서 몇 주 동안 머물렀다. 그곳에서 오웰은 노동계급을 발견했고, 작가에서 사회주의자가 됐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한겨레출판)은 그렇게 해서 나왔다.

책의 첫 절반은 1930년대 노동계급의 처참한 빈곤, 탄갱의 끔찍하고 위험한 조건들을 묘사한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사회를 개조하고 운영할 수 있을까? 오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혁명을 일으키려는 시도는 “불필요한 살상과 잔인한 억압 정권을 낳을 수 있다.” 그래서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주로 억압을 다룰 뿐 노동자들의 투쟁과 힘을 말하지 않는다. 책의 후반부에는 사회주의에 대한 오웰의 혼란스러운 생각이 담겨 있다.

당시 오웰은 주로 독립노동당 같은 좌파 서클에 참가했다. 그러나 여전히 조직된 정치 세력과는 떨어져 있었다. 그는 당시 좌파 지식인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스탈린주의 공산당과 러시아의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거리를 뒀다. 오웰은 노동당과 함께하기에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그는 독립노동당이 노동자들의 현실과 정서에 둔감하다고 혐오했다.

우화

오웰이 혁명적 사회주의를 접한 것은 1936년 스페인 내전이 일어난 뒤였다.

오웰은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투쟁하기 위해 스페인에 갔다. 혁명 당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은 “평등의 공기 속에서 숨을 쉬었다.” “웨이터와 지배인 들은 손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동등한 입장에서 손님을 맞이했다. 굴종적인 말투나 격식을 차린 말투까지도 일시에 사라졌다.”(《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그러나 마드리드의 중앙 국가기구가 여전히 은행 신용과 군사력의 대부분을 통제했고, 곧이어 노동자들의 독립적인 의용군과 조직에 재갈을 물리기 시작했다. 두 가지 방법이 사용됐다. 첫째는 설득이었다. 부르주아 정당들, 우파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심지어 일관성 없게도 아나키스트들까지 전쟁의 승리는 외국 군대, 유능한 정규군, 전체 반파시스트 세력의 연대연합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 권력은 따라서 배제돼야 했다.

둘째는 사보타주였다. 국가는 자금, 원자재, 전투 장비 지급을 보류해 노동자 조직과 의용군의 전투력과 사기를 떨어뜨렸다. 이런 책략들 때문에 노동자들은 힘이 약해졌고, 훗날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분쇄됐다. 러시아의 총과 영국·프랑스의 공허한 약속을 받는 대가로 반파시즘의 척추와 영감이 파괴됐던 것이다.

그러나 오웰은 프랑코가 이끄는 파시스트 세력을 분쇄하려면 대지주의 토지를 공격해야 한다고 봤다. 부르주아 공화국은 감히 이를 고무할 수 없었다.

이런 주장을 폈기 때문에 오웰은 적으로 낙인찍혔다. 영국공산당 기관지 〈데일리 워커〉는 오웰을 처음엔 파시스트라고, 곧이어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오웰은 전자를 혐오했고, 후자는 실제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오웰은 사회주의 건설을 통해 파시즘을 패퇴시켜야 한다는 점, 사회주의 건설은 곧 대중 운동의 건설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자였지만 러시아와 당에 충성하는 방식으로 사회주의를 믿은 것은 아니었다.

오웰이 이론적 방법이나 러시아와 당에 충성하는 방식으로 사회주의를 믿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노동계급의 영감과 행동에서 자신의 이상을 찾았다. 그러나 운동의 붕괴와 전쟁 발발은 그의 신념에 회복할 수 없는 일격을 가했다.

그래서 《동물농장》(1945년)과 《1984》(1949년)는 그의 초기 작품과 다르다. 이 소설들은 우화, 곧 시대를 초월한 도덕적 교훈을 가진 이야기다.

《동물농장》은 평등주의적 유토피아를 언뜻 보여 준다. 이 책은 좌파, 특히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또, 러시아와 배반당한 혁명에 대한 것이었다. 오웰은 이 책의 우크라이나판 서문에서 책의 목적을 설명했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사회주의 운동의 부활을 원한다면 소비에트 신화를 반드시 깨야 한다고 확신했다. 스페인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다른 나라 언어로 쉽게 번역될 수 있는 소설을 통해 소비에트 신화를 폭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동물농장》은 당시 주요 출판사들한테 모두 출판을 거부당했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희망을 찾기는 쉽지 않다. 도처에 동물 노동자들이 있지만, 이들은 너무 어리석어 농장을 운영하거나 새로운 억압에 저항하지 못할 것이라는 게다. 물론 그런 우화를 쓴 오웰보다는 그런 현실을 만들었던 요시프 스탈린에게 비할 데 없이 큰 책임이 있지만 말이다.

《1984》는 매우 정치적인 소설이지만, 이 또한 희망이 없다. 또, “자유의 대가는 영원한 경계”라는 구절은 프롤레타리아의 것이라기보다는 자유주의자의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직후에 미국의 우파 출판업자들이 이 책을 대량 유통했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작가들은 신처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말과 스타일은 경험의 산물이다. 그의 작가 생활 대부분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절망의 시기이기도 했다. 비록 제2차세계대전 시기에 중도주의와 노동당 좌파로 넘어갔지만, 조지 오웰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부터 좌파의 관점에서, 좌파를 위해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