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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된 침묵》

《강요된 침묵》, 엠마뉴엘 레이노, 책갈피

몇 달 전 책갈피 출판사에서 《강요된 침묵》이란 책이 나왔다. 만약 출판사의 명성만 보고 그 책을 샀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이다. 이 책은 책갈피의 다른 책들처럼 훌륭한 마르크스주의 저작이 아닐 뿐더러, 어느 정도 쓸모 있는 분석이나 자료조차 담고 있지 않다. 이 책의 저자 엠마뉴엘 레이노는 책 전체에 걸쳐 ‘모든 남성은 여성을 지배하며 그로부터 이득을 얻는다’는 얘기를 줄기차게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내놓는 근거는 너무나 빈약하다. 그는 역사를 “가부장제[여기서 가부장제는 남성 지배라는 느슨한 의미 ― 인용자]의 역사”라고 단정지으면서도, “[가부장제의] 기원을 추정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라고 말끝을 흐린다. 도리어 그는 “가부장제 권력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확인하기 위해 그 권력이 어떻게 해서 발생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정말로 필요할까?”(21쪽)라고 묻는다. 그러나 곧 다른 곳에서 그가 생각하는 가부장제의 기원을 알 수 있다. 그는 ‘남성 지배’의 원인을 타고난 생물학적 조건에서 찾고 있다. 그는 사회가 “성계급”(“남성계급”, “여성계급”)으로 나뉘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계급” 구분의 기초는 생물학적 성차다. 페니스가 “남성이라는 계급의 자격을 결정짓는 기관”(57쪽)이다. 그는 많은 얘기를 하지만 핵심은 매우 단순하다. 남성 지배나 성 차별은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싶어하기 때문이고, 남성은 그럴 능력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전유 그리고 남성간의 권력 투쟁의 역사”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순전한 상상일 뿐이다. 계급 사회 이전에는 여성이 억압받지 않고 평등했다는 증거가 많다. 많은 인류학자들이 여성이 높은 지위를 누리는 사회를 묘사했다. 한 예로 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은 캐나다의 나스카피족의 여성들이 거주지와 작업 일정을 결정할 때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데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남성들이 때로는 자기 피를 이은 자식이 누구인지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여성들이 성적 자유를 누리는 것에 대해 특히 우려했다. 엠마뉴엘 레이노는 여성 억압의 기원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계급 사회 내에서도 여성의 지위가 변해왔다는 사실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가부장제가 생겨난 이래로 여성의 지위는 아주 단순했다. 여성은 언제나 전유되어 있어서 자동적으로 노예와 마찬가지였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사회의 여성이나 중세 유럽의 여성, 자본주의 하의 여성의 지위가 모두 같다는 것은 추상적인 공론일 뿐이다. 이 책에서 모든 남성은 지배자고 모든 여성은 피지배자, 희생자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그림은 역사에서 벌어진 무수한 계급투쟁 ― 남녀는 각 계급에 포함돼 싸웠다 ― 을 설명할 수 없다. 모든 남성이 권력을 가졌다는 얘기는 노예 소유주와 노예, 귀족과 농민,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커다란 격차를 볼 때 터무니없다. 저자는 이런 모순을 논리적 일관성 없이 이리저리 땜질하는 식으로 해결한다. 그는 계급, 생산양식 같은 용어를 완전히 제멋대로 쓰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슬쩍 끼워넣는다. 성기로 계급을 계속 나누다가 어떤 논리적 설명도 없이 갑자기 “가부장제 하에서는 남성도 노예 계급으로 전락할 수 있[다]”(166쪽)고 말한다. “노예 소유주와 노예 사이의 투쟁은 남성 계급 내의 갈등뿐만 아니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의해 좌우된다”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이 책 어디를 봐도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이 역사 발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그의 논리는 전혀 일관성이 없다. 어떤 곳에서는 자본주의가 가부장제의 단순한 외피일 뿐이라고 말했다가 다른 곳에서는 가부장제는 자본주의와 별개의 생산양식이라고 말한다(왜 그것이 별개의 생산양식이고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설명도 없이). 어떤 곳에서는 모든 남성이 막강한 권력을 누리는 것처럼 말했다가, 다른 곳에서는 남성은 통제권을 한 번도 누려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어떤 곳에서는 권력이 물질적 이익과 연관돼 있다고 말했다가, 다른 곳에서는 오늘날 권력은 물질적 이득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저자는 기본으로 역사를 인간의 탐욕적 본성(권력욕)에 따른 끝없는 투쟁의 역사로 보는 부르주아 역사관을 가졌으면서도 때때로 마르크스를 차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아나키스트다. 그는 “권력 없이 살고자 하는 공통적인 바람으로 단결한 자유롭고 자주적인 개인들의 행동”을 대안으로 여긴다.

그는 대중 투쟁을 불신한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중 투쟁을 폄하하는 데 몰두한다. 이 책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 봉기, 스페인 내전, 파리 코뮌은 오직 남성 혁명가들의 여성 배제주의(“대체로 남성들은 혁명을 그들만의 문제라고 간주해 왔다”)를 입증하는 예일 뿐이다. 그래서 위대한 스파르타쿠스 봉기는 인간 해방이 아니라 여성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 지분을 되찾으려”는 남성 노예들의 투쟁이 된다. 노예들은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우리도 역시 남성이다!”라고 외쳤을 뿐이라는 것이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전국노동자연맹(CNT) 내 남성 노동자들의 성 차별주의만을 지적해 놓고는(마치 이 때문에 스페인 내전이 패배하기라도 한 양) 이렇게 말한다. “대개의 경우, 혁명가라고 자처하는 남성들은 그들의 행위와 저작에서 여전히 여성을 전유해 왔다.”(169쪽) 각각의 혁명과 반란에 대한 피상적 설명은 접어두더라도 여성들이 혁명기에도 “가부장 조직 내에서 전통적으로 부여된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은 완전한 왜곡이다. 스파르타쿠스 봉기, 스페인 내전, 파리 코뮌에서 모두 여성들은 자기 계급의 남성과 함께 목숨바쳐 싸웠다. 특히 파리 코뮌에서 여성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파리 코뮌에 적대적이었던 《더 타임》의 특파원은 “프랑스가 프랑스 여성만으로 구성됐다면, 그 나라는 얼마나 끔찍한 나라가 됐을 것인가!” 하고 개탄할 정도였다. 저자는 파리 코뮌에서 여성의 능동성은 인정하면서도 남성 혁명가들을 비꼬는 데 그치고 있다. 마치 남성 혁명가들 때문에 혁명이 패배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위대한 혁명의 순간에도 여성은 배제되거나 기껏해야 부차적 역할을 맡을 뿐이라는 얘기는 자유와 해방을 위해 싸운 평범한 남녀의 투쟁 정신을 모욕하는 것이다. 저자는 노동 대중이 투쟁에서 보여 준 단결과 해방의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여성 해방의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는 기껏해야 ‘남성’에게 ‘자신과 싸우라’고 촉구할 뿐이다. 역사에 대한 피상적 인식, 왜곡, 공상, 독설로 가득 찬 이 책에서 우리가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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