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에 폭발한 세계경제 위기는 수십억 명의 삶을 위기에 빠뜨렸다. 일자리는 줄고 임금은 삭감됐다. 돈을 내지 못한 사람들이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
지금 사람들에겐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킬 수단이 필요하다. 기본소득제도가 그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좌파들이 생겨났다. 기본소득제도는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동일한 액수의 현금을 지급하자”는 것이다.
기본소득제 요구가 지닌 혁신성 때문에 지지자가 늘고 있다. 2009년 독일 총선에서는 지역구에서 선출된 3백30명의 연방의원 중 30명이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했다. 브라질 노동자당 정부는 전 국민 대상의 기본소득제도 도입을 공약했다.
한국에서도 기본소득 이론을 소개하고 진보진영 공통의 요구로 만들려는 노력들이 몇 년 전부터 시작됐다. 그 하나로 27일과 28일에는 서강대 다산관에서 ‘모두에게 기본소득을’(27일)과 ‘글로벌 시대의 지속가능한 유토피아와 기본소득’(28일)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평일 낮인데도 2백 명 가까운 청중이 참가해 한국에서도 기본소득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걸 보여 줬다. 한편, 이 대회 조직위원회는 27일 ‘기본소득 서울선언’을 발표했다.
이번 국제학술대회에는 기본소득의 세계적 이론가인 벨기에 루뱅대학 판 빠레이스 교수와 브라질 노동자당의 수플리시 상원의원, 독일 좌파당 블라쉬케 연구위원 등이 참여해 기본소득제도의 국제적 경험과 이론적 쟁점들을 다뤘다.(〈레프트21〉은 이 행사의 의의에 공감해 공식 후원에 참여했다)
브라질에서 기본소득제 도입에 앞장서고 있는 노동자당 수플리시 상원의원은 기본소득제도의 장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누구에게나 심사나 조건 없이 지급하는 기본소득은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운영도 효율적이다.” “복지급여를 받으려고 자신의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수치스런 상황과 사회적 낙인을 없앨 수 있다.” “복지급여를 받으려 일정 수준 아래로 소득을 유지해야 하는 의존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등.
자본주의에서 적절한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따라서 경제에 충분한 일자리가 없다면 굶주림과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자들은 안정된 일자리를 지속적으로 줄여 왔고, 이 상태를 개인이 책임지라고 강요해 왔다.
자유와 존엄성
그 결과는 전 세계에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사는 사람이 30억 명에 이르고, 가난한 사람들이 갈수록 더 적은 임금의 열악한 일자리로 내몰리는 것이었다.
이들을 모두 먹여 살릴 수 있는 돈과 식량이 넘치는 세상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소득 재분배로 기본소득을 모든 이에게 지급하자는 기본소득제 요구가 정당한 이유다.
기본소득론자들은 기본소득제 도입이 “자유와 존엄성의 문제”(판 빠레이스)라고 지적한다. 개인이 극복하기 힘든 빈곤의 지속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매춘, 범죄와 같은 일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기본소득이 보장된다면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일자리를 선택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기본소득은 “공동의 부에 민주적으로 참여할 권리”(블라쉬케)이기도 하다. 소수가 부를 독점하지만, 부 자체는 혼자 일해서 생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누진세뿐 아니라 “국가 소유 부동산, 천연자원 판매 이익 등”에서 재원을 마련하자고 제안한다.
미국 알래스카 주의 사례도 소개됐다. 알래스카는 역내 천연자원을 팔아 얻는 돈의 일부를 적립해 만든 기금으로 주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한다. “미국에서 지난 몇 년간 유일하게 하위 20퍼센트 주민들의 소득(28퍼센트)이 상위 20퍼센트의 소득(7퍼센트)보다 빠르게 상승한 곳이 알래스카 주”다. 미국의 다른 주는 오히려 양극화됐다.
이번 학술대회에선 좀더 최신의 논의들도 소개됐다. 판 빠레이스 교수는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나라들에게 탄소세를 더 걷어 국제적으로 기본소득을 확산하는 재원으로 삼자”고 제안했다. 자본주의의 빈곤은 지구적 문제이므로 논의를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국제적 시야는 기존의 일국적 복지국가론자들보다 확실히 나은 점이다.
한국에서 기본소득제를 소개하고 주장하는 진보적 지식인들도 적극 참여해 주장을 폈다. 한신대 강남훈 교수는 누진세를 강화하고 주식과 토지 등 불로소득에 세금을 무겁게 매기자고 주장한다. 여기에 국방비를 줄이고 기존 복지비용을 더하면 성인 1인당 60만 원까지 기본소득 지급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청중들도 적극적으로 질문하며 논의를 더 풍성하게 했다. “기본소득제가 생태 문제에 기여할 수 있는가”, ”여성의 처지를 개선하는 데 기본소득제가 어떤 보탬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진지한 질문이 있었고, “현금 지급만으론 절름발이에 불과하다. 무상의료나 무상교육과 함께 제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판 빠레이스 교수가 지적하듯, “기본소득제도가 세상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아니다.”
그러나 기본소득 요구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 이 요구를 들고 투쟁에 나선다면 시장 논리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고, 이런 도전은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더 큰 규모의 대중행동을 고무할 수 있다.
활발해진 기본소득제 논의가 이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대중 행동의 전략과 대안 논의로 발전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