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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신노사모델' - 이미 파탄난 네덜란드 모델

노무현의 '신노사모델' - 이미 파탄난 네덜란드 모델

정진희

청와대 정책수석 이정우가 네덜란드식 노사관계 모델을 도입할 뜻을 비치면서 노무현이 구상하는 ‘신노사모델’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7월 1일 이정우는 “노조가 임금 인상을 자제하는 대신 경영참가를 부분적으로 허용하는” ‘네덜란드 모델’을 도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 동안 네덜란드 경제 기적의 지렛대로 칭송받아 온 ‘네덜란드 모델’ 또는 ‘폴더 모델’은 국가와 기업주 대표, 노조 관료들이 조직적 협력 체제를 맺는 것을 뜻한다.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으로 곤두박질치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맺어진 1982년 바세나르 협약은 네덜란드 경제를 구한 공신으로 꼽히고 있다. 당시 네덜란드 노총은 고용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임금 억제, 노동시장 유연화, 사회보장비 축소 등에 합의했다.

〈한겨레〉 논설위원 김형배는 이런 모델이 노사 모두가 사는 “상생의 모델”이라면서 “‘실속 없이’ 과격한 모습으로 비치는 노동쟁의”를 자제하라고 노조에 충고했다(7월 8일치).

그러나 바세나르 협약으로 실속을 챙긴 것은 네덜란드 노동자들이 아니었다. 1982년 이후 노동자들은 복지비 삭감, 임금 억제, 노동시장 유연화 등으로 생활 수준이 더욱 나빠졌다. 이 때부터 전후 가장 인상 깊은 성과를 거둔 네덜란드의 복지 체계가 뒤흔들리게 됐다. 노동당과 보수당의 좌우 연정(“자줏빛 동맹”)이 노조의 협조를 얻어 복지 제도를 무자비하게 공격한 결과, 경제산출에서 보건과 교육 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이 미국보다 더 낮아졌다. 의료비 삭감으로 병원 환자 대기자 수가 늘어남에 따라 중환자실이 부족해 중환자들이 죽어가는 일이 벌어졌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호황이 찾아왔지만 빈부격차는 증대했다. 이 때부터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백만장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대한 반면, 노동자들의 임금은 물가상승을 따라잡지 못했다.

임금 억제 대신 고용이 증가했다는 얘기도 과장이다. 1982년 이후 늘어난 고용의 75퍼센트가 시간제나 임시직 고용이었다. 2001년 현재 네덜란드의 시간제 노동자 비율은 전체 노동자의 33퍼센트로,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경기 하락으로 “안정된 네덜란드”라는 신화는 이미 파탄났다. 좌우 정당이 함께 연정을 이끌면서 노사협력을 통해 국가경쟁력을 강화한다는 ‘합의 정치’는 네덜란드에서 도전받고 있다. 지난해 총선에서 극우 정당 핌포르타운당이 단숨에 제2당에 오른 사건은 네덜란드 정치의 빠른 양극화를 보여 주었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좌우 연정이 자행해 온 복지 제도 공격해 환멸을 느껴 극우에게 표를 던졌다.

네덜란드 경제는 더욱 위기로 빠져들고 있다. 지난해 네덜란드에 대한 외국인 직접 투자는 43퍼센트나 감소했다. 네덜란드 중앙은행은 올해 네덜란드 경제가 마이너스 0.4퍼센트 성장을 보일 것으로 전망했다.

네덜란드 모델도 세계적인 경제 침체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게 밝히 드러나자, 한때는 경기 회복의 원동력으로 꼽히던 네덜란드의 “화합형 노사관계”가 이제는 경기 부진의 원인으로 비난받고 있다.

네덜란드의 기업주들은 고용과 해고 시 노조와 합의를 거치게 돼 있는 구조가 손쉬운 해고를 가로막는다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파탄

이렇게 파탄나고 있는 네덜란드 모델을 노무현은 새로운 노사관계 모델로 구상중이다. 그나마 네덜란드에서조차 불만을 사고 있는 노사합의제도가 한국처럼 노사관계가 더욱 불안정한 곳에서 도입되기란 쉽지 않다. 노사 양쪽 모두 “한국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며 네덜란드 모델에 반대하고 있다.

경제 위기가 심화하면서 계급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고, 이것은 노사 간의 긴장을 높이고 있다. 비록 철도 파업이 국가의 탄압과 지도부의 항복으로 패배했지만 노동자들의 전투성은 여전히 꺾이지 않았다.

노무현 집권 초창기인 지난 상반기 동안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연대 투쟁을 조직하는 데서 매우 소극적었는데도 파업이 잇달아 터져나온 것은 현장 노동자들의 높은 불만과 자신감을 반영한다.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저하할 조짐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사회적 합의’의 성공 가능성이 불투명하다. 이런 ‘사회적 합의’에 기업주들이 크게 기댈 리 없다. 경제가 위기에 빠져들면서 기업주들은 위기의 대가를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고 싶어한다.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조건을 더욱 악화시키고 싶어하는 기업주들이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높일 것이 틀림없는 경영 참여에 우호적일 리 없다.

기업의 자금난을 덜어 주고 애사심을 부추기는 종업원지주제 같은 ‘경영 참여’ 방식은 좀 다르지만, 생산과 노동 과정에 대한 통제의 요소가 담긴 ‘경영 참여’ ― 인사위원회에 노사 동수 구성, 작업중지권, 해외투자 결정 시 노사 합의 등― 에는 적대적이다.

고용, 투자, 부서 배치 등 기업의 ‘경영’ 활동은 모두 노동자들의 고용과 노동 조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노조가 “경영 참여”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그 방식은 지금 네덜란드 모델로 언급되듯이 임금이나 노동조건의 하락과 맞바꾸는 방식이 돼서는 안 된다.

“경영 참여”는 어디까지나 현장 조합원들이 생산과 노동 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높일 때 의미가 있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현장 조합원들이 아닌 노조 관료들의 통제력 증가를 뜻할 뿐이고 결국 기업주들의 영향력 증대로 이어진다.

노동자들이 네덜란드형 노사모델을 반대하고 자신의 힘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