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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 기후 변화 의심론은 무용無用하다

최근 ‘기후변화정부간패널(IPCC)’의 2007년 보고서 중 실수 하나가 전 세계적으로 크게 문제시된 이후, 하여 IPCC의 신뢰도가 땅에 떨어진 이후, 기후변화 의심론자들의 목소리와 기세가 점점 커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흔히 회자되는 기후변화 의심론이란 말은 기후변화 인간 기원설Anthropogenic Climate Change (ACC) 의심론이라는 말로 대체되는 편이 나을 성 싶다. 그들이 문제 삼는 것은 거개 인간의 온실가스 배출이 기후변화의 원인이라는 가설이지, 기후변화나 그 증후의 진위 여부 자체는 아닌 탓이다. 하여 이 글에선 이 의심론을 보다 적확한 용어인 ACC 의심론으로 칭해 보고자 한다.

ACC 의심론자들은 확증이 없는 한 섣불리 ‘방향’을 바꿔서는 안 된다며, 이제 ACC 가설이 옳을 가능성이 아니라 그를 가능성을 관련 과학자들이 연구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만약 ACC 가설이 그른 것이라는 결론이 난다면, 혹은 그것이 명백히 옳다고 말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는 판명이 난다면, 그때는 어쩔 것이냐고 목울대를 돋우며 윽박지른다. 그렇다면 온실가스 감축을 둘러싼 그 모든 거대담론들이 죄 알곡 없는 쭉정이 담론이 될 것이 아니냐, 이제까지의 그 모든 온실가스 감축 논의, 논쟁, 노력, 그 모든 호들갑이 결국 모래 위에 쌓은 성이 아니겠느냐고 은근히 암시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그들에게 되돌려줘야 할 말은 따로 있다. ‘만일 ACC 가설이 옳지 않다는 점이 명명백백해진다면, 혹은 그것이 옳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는 점이 뚜렷해진다면, 온실가스 감축 노력이 과연 무의미해지는가?’ 하는 질문, 그들이 미처 심각하게 던져 보지 않을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그들에게 (또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 봐야만 한다. 과연 ACC 가설의 진위 여부가 오늘날 녹색 운동의 대의를, 화석 연료에 의지하지 않는 새로운 에너지 문명으로 이동하자는,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의 대의를 조금이라도 손상시킬 수 있는가? 이 사람은 전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ACC 가설 의심론은 ‘더 나은 문명 만들기’라는 인간의 영원한 과제 수행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그렇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기후변화나 ACC 가설과 상관없이 화석연료 고갈이 예측된다는 점, 하여 문명의 지속을 위해서 재생가능 에너지, 대체 에너지 개발이 시급히 요청되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다는 점이겠다. 일례로 에너지 분야, 특히 석유 분야의 전문가들은 앞으로 10년 이내에 화석연료 기반 에너지 생산량이 줄어들기 시작할 것으로 예측하며, 재생가능 에너지 생산을 요청하고 있다. 물론 ‘방향 이동’을 막고자 하는 ACC 가설 의심론자는 이 예측의 근거조차 의심하고 문제 삼으려 들겠지만, 그것은 곧 그들이 맞서 싸워야 할 적은 기후변화 과학자들만이 아니라 에너지 분야 전문가들이기도 하다는 점을 말해 준다.

둘째, 지속 가능한 세계 창출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지금 주장하는 지역 먹을거리 생산·소비 촉진과 확대의 대의는 ACC 가설과는 무관하게 중요하다. 지금은 모든 일에서 에너지 효율성을 생각해 봐야 할 ‘에너지 위기의 시대’인즉, 이러한 시대에 (먹을 거리 생산지에서 소비지로의) 장거리 수송은 사태를 악화시킬 뿐, 절대 낫게 하지 못한다. 지역 먹을거리 생산·소비 운동이 곧 공동선이 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는 점이 인식돼야 한다.

셋째, 역시 에너지 효율성의 원칙을 붙들고 생각해 볼 때, 화석연료에 막대히 의존하는 화학농, 산업농 패러다임을 폐기하고 유기농과 소농 패러다임으로 이동하자는 주장 역시 ACC 가설과 무관하게 중요하다. 1950~60년대 ‘녹색 혁명’이 가져온 성과는 그간 충분히 드러났지만 그 폐해는 ‘땅의 피폐화’라는 형태로 (토양 내 소금 함유량 증가로) 이제서야 나타나고 있다. 토양 질을 살리지 못하는 것으로 판명된 농업의 양식이나 원칙은 문명을 지속 불가능하게 하며 따라서 그것은 지양, 폐기돼 마땅하다는 점이 인식돼야 하겠다. 나아가 오늘날 농업이나 대지 관리의 원칙으로 채택돼 마땅한 ‘땅의 관리인 정신’은 생산량 증대를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화학농, 산업농에서는 그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 역시 인식돼야 한다.

또 하나 생각해 볼 만한 것은 화석 연료 공급과 그 연소를 통한 에너지 생산 과정에서 배출되는 에너지 산업 폐기물 그 자체의 문제다. 이 중 특히 석탄 세정 작업 중 배출되는 중금속 함유 점액질, 지하수를 오염시키는 석탄 슬러리, 사람의 폐를 병들게 하는 석탄 먼지 등 석탄 산업의 폐기물이 사람을 비롯한 생물, 생태계에 끼치는 악영향은 심각한 고려 대상이 돼야 한다. 또 화력발전소에서 배출되는 황산, 황산 수소, 이산화탄소 등 배기가스의 악영향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 단지 에너지 산업 폐기물만이 문제인가? 다른 산업 섹터에서 생산되는 폐기물은 어떠한가?

강조하건대, 설사 ACC가 그르다는 판정이 난다 할지라도, 그것이 곧 ACC 가설이 촉발시키고 또 성장시키고 있는 녹색 문명 만들기의 대의를 손상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대강의 대의는, 우리가 이미 두루 알다시피, 문명의 지속가능성은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전제로, 기반으로 해서만 실현 가능하다는 것, 하여 후자를 문명 유지 존속의 기초로 삼는 태도로 우리의 태도를 대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모든 ‘인간의 일’을 도모할 때 환경영향을 항시 엄밀히 사전조사·평가하고 그 조사·평가를 일의 추진 과정에 반영케 한다는 생태학적 원칙 혹은 사회적 기율의 껴안음을 의미한다. (이 기율이 부재한 녹색 성장 담론이 녹색 문명 만들기의 역방향 담론임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근대 문명 건설 이후 인간에 의해 새롭게 자각된 이 기율 만들기의 도정에 ACC 가설 진위 여부는 아무러한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나아가 ACC는 차치물론且置勿論하더라도, 기후변화 자체가 부정될 공산은 극히 적다는 점을 우리는 생각해 봐야만 하겠다. 그런데 말할 것도 없이, 지금 논의되는 기후변화는 더 강력해진 허리케인, 쓰나미, 폭풍, 더 빈번한 지진, 가뭄, 홍수, 해수면 상승, 대기·해수 기온 상승, 더 강한 열파·한파, 더 긴 여름과 더 긴 겨울을 가져오는 변화다. 그것이 인간 활동에 기인하든 아니든, 이러한 재난을 사람의 삶의 세계에 불러올 기후변화가 장구히 지속될 것이라는 기후 과학의 예측은 이미 광범위한 범위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합당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아니 적어도 대부분의 기후 변화 과학자들 사이에선 그러하다.

이러한 재난은 그런데 곧 농지 침식, 그로 인한 식량 생산량 감소, 기후 난민 발생, 문명의 기초가 되는 인프라 파괴로 이어질 것이 자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재난 가능성 예측을 접하매, ACC 가설 의심론은 이 재난의 타개책에 관해 대체 무엇을 말해 주는가? 어떤 비전을 제시해 주는가? 재난의 준비에 그 가능성에 대한 의심론이 하등 도움이 된 일이 역사상 있었던가? ACC 가설 의심론은 가능한 사태에 대해서도, 더 나은 미래 세계 건설에 대해서도 아무러한 비전도 우리에게 전해 주지 못하는 순 멍텅구리 담론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공공연한 반미래 담론이요, 희망을 가장한 반희망 담론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간 수백 년간의 인간 활동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는 변명, 변화는 불필요할지도 모른다는 고집 어린 희망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냉정하게 다시 보자’는 그 주장의 밑에는 화석 연료 연소로 그간 덕을 본 기업체들의 그러한 변명과 희망이 하나 그득 굼실거리고 있다. ACC 가설을 의심해 보고 검증해 보려는 노력, 그 과학적 탐구 자세 자체는 소중할 터이지만, 그 ACC 가설 의심론이 저의 막강한 우군으로 거느리고 있는 것은 과학, 철학, 이성이라기보다는 무의식적 불편감, 막연히 싫은 느낌, 거리낌, 즉 비이성인 것이다.

ACC 가설이 옳든 그르든, 지속돼야 하며, 지속될 명분이 충분한 녹색 문명 담론은 녹색과는 무관하게 살아온 사람들을 불편하게 해 왔고 불편하게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불편하게 할 것이다. 사람의 편이를 위해 자연 자원을 실컷 이용해 살아 왔고, 그렇게 계속 살고 싶은, ‘편이’와 ‘실컷’의 기율에 이미 푹 절어 버리고 만 이들의 심기를 그 담론이 크게 건드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편이’와 ‘실컷’의 기율이 곧 근대 건설, 남부끄럽지 않은 나라 건설의 기율이, 그 기율과 이어진 자긍심과 분리 불가능한 것이 됐던 우리 한국인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하여 ACC 가설 의심론과 현대 한국인은 자연 근친이다.) 그러나 기후변화는 어떤 민족이나 국민의 성과나 심리와 무관하게 발생한다. 노자가 말했듯, 자연(天地)은 불인不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