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누리꾼들에게는 열렬한 이슈가 하나 있다. 일명 ‘고대 자퇴녀’ 김예슬 양(24)이 학교 게시판에 써 붙인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글이다.

그녀는 그 글에서 당당히 선언했다. 지금 이 시대 대학생을 억압하는 야만적인 행태와 작위에서 ‘탈주’하겠다고 말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지금의 20대들은 ‘그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과 좌절감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처지다. 작금의 20대들은 수 년간 교육을 통해서 무시무시한 경쟁을 체득한 세대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는 특목고와 일반고, 인문계와 실업계의 기로에서 경쟁으로 채 걸러지며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진학할 때는 더 정교하게 수능을 통해서 19년의 가치가 평가되고 그 가치에 따라 교묘하면서도 공공연하게 학벌이란 이름으로 — 서울대생과 타대생, 국립대와 지방대생 등등 — 미래의 가치 등급이 정해진다. 그리고 해방인 줄 알았던 대학에선 또다시 ‘스펙’ 경쟁, 자격증 경쟁에 외모 시합까지 벌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놀라운 통찰력 내지 식견이 필요한 것인가? 아니다. 

김예슬 양이 깨달은 것은 이미 이 땅의 모든 대학생들이 일찍이 알고 체감하고 있는 것이다. 김예슬 양이 깨달은 결승지점 없는 경쟁 트랙, 취업 학업, 간판, 자격증 장사 브로커로 전락한 대학이라는 문제점은 대학생들 모두가 ‘의식’하고 있으며 대학교수, 임직원, 총장 들도 이미 알고 있는 바다. 심지어는 지식인과 정치인 들은 공공연히 이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며 많은 운동단체에서는 오늘날 자본이 대학을 위협하고 있다면서 열심히들 ‘외치고’ 있다. 

기실 ‘통합된 세계 자본주의(Integrated World Capitalism)’가 지배적인 흐름이 된 이후로 자본은 끊임없이 대학을 구조적으로 종속시키려 공격하며,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미명 아래 대학들은 그들 스스로 대학의 본질적인 기능인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모습을 허물고 시장 논리에 ‘충실’할 것을 강요해 왔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사실도 아니다. 물론 그러한 일들이 ‘대학 경쟁력 강화와 효율성을 위한 대학 자율성 부여’라는 그럴듯한 포장지로 감싼 채 진행돼 왔단 것도.

그럼 이 ‘고대 자퇴녀’ 사건이 가져온 ‘폭발력’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주류 언론계(라고 쓰고 ‘찌라시’라고 읽는다)는 일절 언급하지도 않으며 대학가 중국집 철가방의 신속배달은 기사화하던 곳이 이 대자보엔 침묵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시대 대학생이 이 시대의 체제를 ‘탈주’했기 때문이다. 잔인한 경쟁 트랙에서 생존하려고 열심히 뛰던 선수가 앞이 아닌 옆으로, 트랙 위가 아닌 트랙 밖으로 ‘탈주’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경쟁 트랙을 유지시켜 주던 야만스런 공포에 ‘저항’하고 그 트랙의 끔찍한 실체를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경쟁 트랙에서 어느 정도 생존한 사람이 들려주는 말이나 이론도 아니요, 그들이 후배들에게 하는 충고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요 몇 년 사이 젋고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소위 ‘20대론’을 내놓은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됐다. 그들은 각자의 명석한 판단을 통해 20대를 진단하고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며 그들에게 충고를 던졌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20대에게 ‘짱돌을 들어라’ 하고 말하는 사람도, 성공해서 이 사회 체제를 바꾸라는 사람도, 너희 20대들은 개xx라고 욕하는 사람도 모두 그 시대 경쟁 트랙의 생존자들이다. 그들은 이미 그 시대의 경쟁 트랙에서 나름의 결승점에 도착한 자들이고 보상을 받은 자들이다. 그런 생존자들이 들려주는 말이나 이론, 충고 따위를 듣는 20대들이 할 생각은 단 하나다. 

‘그런다고 달라지나? 평범하게 할 일이나 해야지’

그렇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가 우리에게 가하는 야만적 행태를 체득하고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과 좌절감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이는 마치 뫼비우스의 띄처럼 결코 끊어지지 않고 우리를 괴롭힌다. 그렇게 우리는 미래의 실업에 대한 중압감 속에, 왜 대학에서 자신의 전공을 공부해야 하는지 근본적인 반성적 성찰을 포기한 상태다. 자연스레 세상 일 무엇하나 시원한 것이 없고 불의를 봐도 가슴은 뜨거워지지 않는다. 자본은 우리에게 ‘생각대로 해 그게 답이야’라던지 ‘why not?’과 같은 같잖은 광고 카피를 들이밀지만 그마저도 환호할 수가 없다. 단지 그 누가 만들었는지, 그 누가 정했는지 모를 ‘할 일’, 경쟁 트랙에서 달리기를 할 뿐이다.

그렇기에 바로 이 ‘대학생의 탈주’는 너무나도 통쾌한 일로써 우리에게 하나의 폭발성을 가진 사건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녹록치 않다. 

단지 그녀는 ‘고대생’에서 ‘고대 자퇴생’이 되었을 뿐이지만 그 두 음절, 거기에서 오는 현실은 내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그녀의 말마따나 자본의 거대한 탑에서 돌맹이가 하나 빠졌다. 경쟁 트랙에서 선수가 한 명 이탈했다. 너무나도 작은 균열, 보이지도 않을 흔적이지만 그녀가 일으킨 ‘탈주 사건’이 이 시대 대학생에게 통쾌하게 다가오는 이상, 우리들의 ‘탈주’는 시작됐다. 

그러나 이 바람이 거대한 폭풍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지금 당장 경쟁 트랙의 야만적인 공포가 너무나 무섭다. 그 공포와 ‘탈주’ 이후의 중압감은 우리의 오금을 저리게 한다. 힘없이 다시 전진할 것을 강요한다. 그렇지만 한 번 시작된 ‘탈주’는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비록 폭풍과 같은 파괴력은 없다하더라도 바람은 멈추지 않고 불 것이다. 

물론 ‘고대 자퇴녀’와 같은 ‘대학 거부와 체제 거부’라는 시원스런 탈주가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지금 이 땅의 대학생들은 ‘탈주’를 시도할 것이라는 것을. 여기저기서 각자의 방법으로. 

그렇게 이 통쾌한 탈주자를 응원하련다. 나 역시 나만의 ‘탈주’를 시작함으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