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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인권정책국장 기고:
낙태 논란 ― 여성의 삶에 대한 오만한 이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는 말해지지 않던 여성 개개인의 구체적인 삶과 삶의 모순들, 그리고 온전히 혼자만의 것인 것 같던 슬픔과 분노를 세상에 드러나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여성뿐 아니라 타자화된 모든 인간들이 함께 살아볼 만한 세상을 만드는 데 디딤돌이 되었다.

생각해보건대, 그래서 낙태에 관한 논의는 여성 개개인의 경험과 여성 개개인의 목소리에서 시작되었어야 했다.

낙태 단속 중단을 요구한 올해 3·8 세계여성의 날 집회

아들을 낳을 때까지 줄줄이 아이를 낳아야만 했을 때도, 이번 아이는 딸이니 낙태해야 한다고 강요당했을 때도,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며 국가 주도로 낙태시술이 만연했을 때도, 성폭력으로 인해 임신했더라도 결혼이 상책이라며 가해자와 결혼해야 했을 때도, 임신한 사실을 알고 애인이 떠나버렸을 때도, 그 아이를 홀로 키우면서도 손가락질 받아야만 했을 때도, 책임지지도 못할 자식 낳았다며 비난받았을 때도,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때에도 여성들은 침묵했다.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을 못 낳는 것은 칠거지악의 하나라 했고, 인구 줄여서 부자국가 만들어 다 같이 잘 살자는데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고, 혼전 순결 이데올로기는 유독 여성에게만 지독한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었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 개개인의 몸에서만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한 번도 여성의 것이었던 적이 없었다.

지난 2월 보건복지부는 ‘불법 인공임신중절 예방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과거의 산아제한 정책에 대한 일말의 반성 없이 낙태건수를 반만 줄여도 출산율 증가에 큰 도움이 된다며 ‘생명존중하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미성년 미혼모에게 월 12만 4천 원 지급’으로 대변되는 ‘불법 인공임신중절 예방 종합대책’이고, 종교계·언론계·학계·의료계·여성계 인사를 특별한 기준 없이 불러 모은 ‘불법 인공임신중절 예방 사회협의체’이다.

‘낙태’와 ‘출산율’ 그리고 ‘생명존중’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야기를 겅중겅중 뛰어넘었다. 그러나 종합대책은 시행되기도 전에 미봉책이라며 비판받았고, 사회협의체는 그 명칭과 구성부터 타당성을 의심받고 있다.

한편, 지난 3월 24일, 또 다른 편에서는 ‘2010 태아 살리기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프로라이프 의사회라는 소규모 의사집단의 주최로 ‘태아는 현재의 희망, 미래의 주인/ 낙태는 여성의 비극, 사회의 절망’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열린 이 대회에서 참가자들은 ‘낙태 근절 5대 과제 100만인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본인의 주장을 펼친다는 데 딱히 막을 이유는 없지만, 그간 낙태 반대 운동을 꾸준히 해 왔던 낙태반대운동연합이나 종교계가 아니라 일부 산부인과 의사들의 ‘자기고백’을 시발로 이런 대회가 개최되었다는 게 다소 의아하다.

갑자기 어떤 중대한 사명을 띠고 낙태 반대의 기치를 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 위기라 부르는 산부인과의 현재 문제들, 즉 낮은 의료수가, 저출산에 따른 환자 감소, 전공의 수급 문제 등이 배경이 되지 않았겠나 싶다.

문제는 ‘자정’ 차원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낙태시술 산부인과에 대한 고발이 현재 뜻하지 않은 임신 상태에 놓인 여성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실로 심각하다는 것이고,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임신과 출산의 대체할 수 없는 주체인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의 침묵은 과거의 침묵과는 다르다. 필요에 따라 여성의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국가 정책과 여성의 몸을 도구로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특정 집단의 단순한 발상에 대한 조소에 다름아니다.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혹은 이렇게 ‘해 주면’ 여성이 출산할 것이라는, 여성의 삶과 여성의 자기 결정에 대한 오만한 이해에서 출발한 그 어떤 것도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자기 삶에 대한 성찰을 하고 있는 여성 개개인의 삶의 영역에 티끌만큼의 영향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결정과 실천의 주체는 여성 자신이기 때문이다. 낙태 논쟁은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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