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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논쟁:
우리가 양보한다고 저들이 시혜를 베풀까

최근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와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 등은 ‘모든 진료비를 건강보험 하나로’ 추진모임을 만들고 건강보험 보장성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했다.

건강보험 보장성을 대폭 늘려야 한다는 주장은 완전히 옳다.

그래서 노동자 운동과 진보진영은 지난 20년 동안 그것을 요구해 왔다.

그런데 이상이 대표 등의 제안이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종래와 다른 방식의 실천” 때문이다.

이상이 대표 등은 “지금은 국가재정 규모가 너무 작”으니 지금 당장은 보장성 강화를 위해 건강보험료를 인상하는(!) 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한다.

이들은 현재 1인당 약 2만 9천 원(가구당 8만 2천 원)인 보험료를 38퍼센트가량 인상해 1만 1천 원(가구당 2만 8천 원)씩 보험료를 더 내면 보장성을 90퍼센트까지 확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이 보험료를 더 내면 ‘법적으로’ 기업주들도 그만큼 보험료를 더 내게 돼 있고 국고 보조도 늘어나게 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첫째, 지난 20여 년간 건강보험 재정에서 보험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가파르게 늘어났지만 건강보험 보장성은 그만큼 높아지지 않았다.

병원과 제약회사로 흘러들어 가는 돈이 그만큼 늘었기 때문이다. 보험료가 올라도 그 대부분은 약가·수가 인상분을 채우는 데 쓰였다.

38퍼센트

건강보험료가 인상되면 법적으로는 정부의 국고지원금도 증액하도록 돼 있지만 보험료가 각각 6.5퍼센트, 6.4퍼센트 오른 2007~8년에 한나라당과 민주당 국회의원들은 예산 심의에서 이를 간단히 무시해 버렸다.

둘째, 이상이 대표 등은 “우리 나라 건강보험료율은 상당히 낮은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이 보험료를 더 내지 않으면 보장성을 확대할 수 없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정부가 기본적인 책임을 다했거나, 지금이라도 충실히 이행한다면 재정적자는커녕, 오히려 대폭적인 급여확대를 통해 건강보험 보장성을 획기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민주노총)

게다가 프랑스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이 내는 보험료의 갑절 이상을 낸다. 네덜란드의 경우는 네 곱절 가까이 된다.

유럽의 일부 복지국가들에서는 노동자들의 세금 부담이 높지만 건강보험밖에 내세울 것이 없는 한국과 달리 이들 나라에서는 보장성 90퍼센트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복지 혜택이 제공된다.

그런데 이런 복지 혜택의 차이는 말하지 않고 보험료만 비교해 한국 노동자들이 유럽 노동자들처럼 보험료를 더 내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한국에서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낮은 이유는 노동자들이 보험료를 적게 내서가 아니라 결정적으로 기업주들의 보험료 부담이 형편없이 낮고, 정부의 국고 보조금은 그보다도 훨씬 적고, 정부가 의료를 시장에 내맡기려 하기 때문이다.

유럽 복지국가들을 모델로 삼겠다던 이상이 대표의 ‘역동적 복지국가’ 모델이 노동자들의 보험료를 올려 복지를 늘리겠다는 조삼모사식 정책이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실망스럽다.

이런 식이라면 2007년 대선에서 보험료 인상을 통한 보장성 강화를 공약으로 내세운 정동영의 ‘역동적 복지국가’ 제안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정동영과의 정책연대를 염두에 둔 발상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는 까닭이다.

오건호 연구실장도 그가 속한 연구소의 상급 단위인 공공노조의 입장과는 사뭇 다른 정책을 제안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낸 돈으로 운영되는 연구소의 연구실장이 노동자들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만들어 낸다면 조합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보험료 인상률이 무려 38퍼센트나 되고 그나마 노동자 보험료 인상이 보장성 강화로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는 이 방안은 지난 20여 년 동안 축적해 온 의료공공성 운동을 후퇴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무릎 꿇고 지배자들과 싸우자는 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