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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 한국 전쟁은 민족 해방 전쟁이 아니다

〈다함께〉 9호에 실린 ‘흡수통일은 진보 아니다’라는 기사에 한 가지 이견이 있어서 독자편지를 보낸다. 그 기사에서는 “한국 전쟁은 처음 5개월 간은 민족 해방 전쟁이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일붕 동지는 아마 한국 전쟁이 벌어진 후 중국이 개입한 11월까지 5개월 정도를 한반도 민중과 미국간의 전쟁이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은 적절치 않다.

나는 한국 전쟁의 성격을 분석하려면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세력관계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반도는 해방과 함께 북한에는 소련군이, 남한에는 미군이 점령했다. 소련과 미국은 한반도 민중의 열망인 독립국가 건설을 무시했고, 점령군 행세를 했다.

《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에서는 당시 북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매일마다 소련군 병사에 의한 협박, 약탈, 폭행, 절도, 강간과 때로는 사살 사건 등이 끊이지 않았다. … 그것은 해방군의 논리가 아니라 침략군의 논리인 것이다. … 소련군과 조선 민중의 충돌은 소련군이 진주한 지역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남한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벌어졌다. 미군의 만행과 그에 대한 남한 민중의 저항은 대다수 독자들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1948년 형식적인 독립정부를 남북한 모두 세웠고, 1949년 미소 양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했지만 여전히 식민지 상황은 유지되고 있었다. 해방 이후 5년 동안 한반도에서의 주된 문제는 새로운 충성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 것인가 모스크바인가, 워싱턴인가, 북경인가 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50년 한국 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김일성이 남침을 했건 이승만이 북침을 했건 전쟁 초기부터 양상은 남북한 지배자들 마음대로 결정되고 진행되지 않았다.

몇 년 전에 공개된 소련의 비밀문서들은 김일성이 남침을 계획했으며 스탈린과 모택동은 이 모든 사항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미국도 이승만의 북침 계획을 알고 있었다. 당시 남한에 남아 있던 미국 군사고문단의 우두머리 라버츠 장군은 “우리는 북한의 침략을 유도하고 있다. 북한군이 좋은 사격훈련감을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한국전쟁: 알려지지 않은 전쟁》).”라며 전쟁의 가능성을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실제 미국은 전쟁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한 지 몇 시간만에 전쟁 개입 의사를 분명히했다.

결국 1950년은 1949년 중국에서 민족 해방 투쟁이 성공을 거두면서 한반도에서 전쟁의 기운이 돌고 있었고, 이승만과 김일성은 각기 자신의 보호자들로부터 공격 승인을 받고자 기다림과 탐색이 계속된 시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전쟁은 초기부터 남한 정부와 북한 정부가 미국과 소련, 중국의 승인과 후원하에 진행됐다.

전쟁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한국 전쟁의 성격은 두 강대국 진영이 제3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면서 자신들의 힘을 시험한 대리전이었다.

만약 한국 전쟁에서 민족 해방적 성격을 찾는다면 미군정 시기부터 꾸준하게 저항했던 게릴라(빨치산)들이다. 한국 전쟁 초기 게릴라들은 미국에 대한 반감과 민족 통일에 대한 열망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지속되면서 후기 빨치산은 북한의 지령 하에 움직였다. 또한 10년 뒤 벌어진 베트남 전쟁에서 토착 게릴라 운동이 했던 역할과 비교해 보면 한국 전쟁에서 게릴라전은 어떠한 의미있는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만약 최일붕 동지처럼 한국 전쟁을 민족 해방 전쟁으로 분석하게 되면 당시 혁명적 좌파는 소련과 중국의 대리 정권인 김일성을 지지했어야 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식민지 하에서 민족 해방 전쟁을 한결같이 지지한다. 특히, 제국주의 열강과 벌어지는 전쟁에서는 더욱 그렇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패배는 전세계 노동자 운동(조직)에 커다란 성장과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전쟁은 제국주의 열강의 대리전이었기 때문에 혁명적 좌파는 어느 한쪽을 지지할 수 없다.

최영준


서평 ‘근본주의의 충돌’에 대한 이견

〈다함께〉 제8호에 실린 이 서평의 저자는 타리크 알리가 이란 혁명을 “역사 그 자체에 대한 저항이자 계몽주의에 대한 저항이며, ‘유럽광’, ‘서양중독증’에 대한 저항, 다시 말해 진보 그 자체에 대한 저항”으로 보고 있다는 지적을 했습니다.

하지만 위의 인용문은 1979년 2월 이란 혁명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호메이니 반혁명에 대한 언급입니다. 위의 인용문(245쪽)이 있는 앞 두 몇 쪽의 글을 읽어 보면 타리크 알리가 이란 혁명에 대한 진심 어린 지지와 호메이니 반혁명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