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마르크스주의와 생태는 어울리지 않는 불편한 관계라고 여긴다. 이러한 생각은 마르크스주의를 반(反)생태적이라고 보는 세 가지 비판에서 비롯한다. 

첫째로 마르크스주의는 자연을 도구적 가치로만 인식하는 인간중심주의다. 둘째로 마르크스주의는 자연의 한계를 무시한 기술중심주의와 생산성중심주의다. 셋째로 옛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선진 자본주의보다 환경이 더 심각하게 악화했다. 

심층(근본) 생태주의는 “인류의 생활과 문화의 번영은 인구가 현재보다 현격히 감소한다고 하더라고 성취 가능하다. 동식물들의 번영을 위해서는 인구가 줄어야 한다”고 본다. 

이는 환경 문제의 주된 원인을 인구 증가에서 찾는 신맬서스주의와 유사한 주장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과잉인구는 … 역사적으로 결정되는 관계로써, 결코 추상적 숫자나 생활필수품 생산의 절대적 한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생산 조건이 부과하는 한계에 의해 결정된다”라며 맬서스의 《인구론》을 비판한 바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환경 문제를 분석한 존 벨라미 포스터는 맬서스주의의 계급적 이데올로기 측면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맬서스가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윤리(와 인종과 성 윤리)를 대변했다는 점으로 볼 때, 맬서스주의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필요물이다. 그러므로 맬서스를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맬서스를 존재하게 했고 스스로의 활동을 통해 맬서스에 대한 기억을 끊이지 않게 하는 체제에 대한 비난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무엇보다 인간과 자연을 분리해 이 둘의 관계를 인간중심주의와 생태중심주의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 방식은 외부적인 동력에 의해 서로 무관한 독립적 실체가 결합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인간에 내재된 자연, 자연에 내재된 인간이라는 상호적 관계다. 자연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인간 존재의 조건은 노동과 생산수단을 결합해 생산물을 생산하는 노동과정에 달려 있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 맺는 방식은 머릿속 사고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의식주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생산방식)에서 나온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일면적이거나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생산 활동에 따라 규정된다. 

자본주의에서는 노동과정이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라 단절되고 파괴된 관계로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계급 관계는 직접 생산자인 노동자가 생산에 필수적인 자연 조건으로부터 사회적으로 분리돼 있기 때문이다. 생산과정에서 직접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리 때문에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도 균열이 생긴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자연)와 노동자를 동시에 파괴함으로써 사회적 생산과정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노동 문제와 환경 문제가 같은 뿌리를 갖고 있음을 이해하는 데서 중요한 단초가 된다.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은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삶을 황폐화시킬 뿐만 아니라 인구의 도시 집중을 촉진하는데, 이는 인간과 토지(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를 파괴한다. “폐결핵과 폐병들이 자본의 필요조건”이듯 “토지 고갈과 자연생태계 오염” 역시 자본 축적에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다.

생산의 목적이 인간이 아니라 자본 축적이기 때문에 자본의 논리와 (자연을 포함한) 인간의 논리가 충돌한다. 인간의 필요 충족이 아니라 이윤 추구가 생산의 우선순위를 결정한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생산성 증대는 자본의 자기 증식에 따른 것이지 인간 욕망의 증대에 따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환경운동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깨진 순환 고리를 부분적으로 임기응변식으로 개선하려 할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물질대사 균열이 발생하는 조건을 변화시켜야 한다. 

순환 고리

다음으로 성장 한계론을 주장하는 환경론자들은 생산력 발전을 역사 발전의 원동력으로 설명한 마르크스주의는 환경 위기에 대처할 수 없는 이론이라고 비판한다. 

생산력주의가 필연적으로 생산 ‘지상’주의 또는 ‘나쁜’ 생산주의로 이어지거나 생산성의 지속적 발전 자체가 환경 위기를 낳는다는 주장은 생태주의자들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저성장, 제로 성장, 마이너스 성장과 결국 만나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생산력 일반과 특수한 사회 형태의 생산력을 구분하지 않은 채 생산력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어떠한 사회적 상태에서 생산력이 발전하느냐, 그 생산력이 어떻게 사용되느냐, 그 생산력을 누가 통제하느냐,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역사를 설명했다. 

반면 일국 사회주의론에 근거한 스탈린주의는 생산력 발전 단계를 도식적으로 설정해서 마르크스주의를 생산성중심주의로 곡해한다. 

따라서 레닌 사후 ‘일국 사회주의’를 추구한 스탈린주의와 국제 사회주의에 기반한 마르크스주의는 전혀 관계없다. 

스탈린주의 사회에서 발생한 심각한 환경 악화는 스탈린주의적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자연과 인간 사이의 지속가능한 발전의 단초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사회가 아님을 명확하게 증명한 것이다. 

환경 문제는 인간의 노동관계, 생산관계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해답도 생산과 사회적 관계의 재정립에서 찾아야 한다. 

계급 사회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인간 사회의 착취와 억압과 자연 황폐화를 동시에 낳는다.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철폐돼 민주적 방식을 통한 사회적 생산-소비-분배를 계획하는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 형태를 제시해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