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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50주년:
한국 최초로 민중이 독재자를 내쫓은 혁명

“젊은 사람들은 희망을 잃고,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지고, 또 양심이란 것을 지키는 사람은 전부 소외되거나 배척되고,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만이 출세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머지 않아 한국 사회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어린 학생까지 참가한 거대한 시위는 결국 독재자를 물리쳤다.

1959년 11월 미국의 한국 전문가들이 작성해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에 제출한 〈콜론 보고서〉는 당시 한국 상황을 위와 같이 묘사했다. 이처럼 1950년대 말 한국은 정말 심각한 정치·경제 위기에 빠져 있었다.

“못살겠다. 갈아 보자”

한국전쟁 이후 한국 경제는 미국이 제공한 원조에 의존해 성장했다. 미국의 원조 비중은 1957∼1961년 기간에 국민총생산(GNP)의 13∼14퍼센트였고, 재정 규모에서는 50퍼센트를 넘나들었다.

이승만 정권은 해방 이후 정부 소유로 바뀐 일본인 재산을 헐값에 넘기고 엄청난 특혜를 주는 방식으로 자본가들을 육성하는 한편, 제분·제당·면방직 공업 등 ‘3백(白) 산업’으로 불리는 소비재 부문의 수입대체 산업화를 통해 자본을 축적했다. 이 과정에서 삼성 같은 재벌들이 성장했다. 1953년에서 1960년 사이에 15대 재벌의 자기자본은 54곱절이나 증가했다.

1950년대 말부터 미국의 원조가 급속히 줄어들면서 한국 경제는 큰 타격을 입는다. 1957년 3억 8천만 달러에 이른 미국의 원조액은 1959년 2억 2천만 달러로 줄었다.

원조 감소와 과잉투자로 공장 가동률이 낮아졌다. 1959년 ‘3백 산업’의 가동률은 제분 23.3퍼센트, 제당 26.3퍼센트, 면방직 70.8퍼센트에 그쳤다.

당연히 실업자는 급증해 1960년 총실업률이 34.2퍼센트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직업 있는 노동자들의 처지가 괜찮은 것도 아니었다. 1957년 〈동아일보〉는 노동자 평균임금이 2만 환가량으로 세대당 생계비 4만 환의 절반에 그친다고 보도했다.

민중은 이런 생활고뿐 아니라 독재 정권의 억압 정책에도 신음했다. ‘발췌개헌’, ‘사사오입개헌’ 등 민주적 절차는 무시되기 일쑤였다. 정치 깡패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이승만 비판 세력에 테러를 가했고, 중고등학생들은 툭하면 반공집회와 이승만을 지지하는 관제 행사에 강제로 동원됐다.

민주노조와 좌파 조직 들은 한국전쟁 이후 전멸했고, 대신 어용노조와 반공단체 들이 득세했다. 부정부패도 너무 만연해서 국회부의장을 포함해 사회 ‘지도층’이 포함된 비리 사건도 터져 나왔다.

민중의 고통과 환멸은 더욱 커져 갔다. 이는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못살겠다. 갈아 보자” 하는 구호로 나타났다. 당시 대선에서 진보당의 조봉암이 28퍼센트를 얻었고, 부통령 선거에서는 자유당 이기붕 후보가 떨어졌다.

“총은 쏘라고 준 것”

독재를 지속하려는 이승만은 정권을 향한 비판과 저항을 온갖 억압 정책을 동원해 억누르려 했다. 진보당을 해산했고, 당수 조봉암을 사형시켰다. 야당 의원들을 지하실에 감금한 채 국가보안법을 개악했다. 야당 목소리를 대변하던 〈경향신문〉을 강제 폐간했다.

이런 조치들은 민중의 불만을 더욱 증폭시켰다. 독재 정권은 총체적 위기에 빠졌다. 상황은 혁명 전야로 달려가고 있었다.

민심을 잃은 독재자가 이제 권력을 유지하려면 부정선거 외엔 방법이 없었다. 이승만은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4할 사전투표’, ‘공개투표’ 등 사상 유례없는 부정을 저지른다. ‘4할 사전투표’는 유권자의 40퍼센트를 자유당 표로 만들어 미리 투표함에 넣어 놓는 것이다.

야당 후보의 등록을 막기도 했다. ‘서류 미비’를 이유로 민주사회당의 후보 등록을 거부했고, 반독재민주연맹의 입후보 서류는 ‘괴한’들이 강탈해 갔다.

선거운동에서 일어난 부정은 더욱 심했다. 민주당이 유세하기로 한 공원에서 갑자기 토목 공사가 진행돼 ‘출입금지’ 조처가 내려졌다.

학생들이 민주당 유세장에 가지 못하게 하려고 학기말 시험, 토끼 사냥, 임시수업, 졸업생 송별회, 무용발표회 등 갖은 이유를 들어 일요일에도 등교하게 했다. 학생들이 분노했음은 물론이다.

야간은 물론이고 대낮에도 테러가 빈번했다. 그런데도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고 했다.

△민중이 독재자 이승만의 동상을 끌어내리고 있다.

부정행위가 너무 심해 선거일인 3월 15일 전부터 산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다.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 8백여 명은 “학교를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투표 하루 전날에는 서울, 부산, 포항, 인천, 원주, 문경 등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투표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군대에서는 유권자 수의 1백20퍼센트가 이승만에게 표를 던졌다! 독재정권은 이승만의 득표율은 80퍼센트, 이기붕은 70∼75퍼센트로 하향 조정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마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최종 결과는 이승만 88.7퍼센트, 이기붕 79퍼센트 득표로 나타났다.

선거 당일,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마산에서 터져 나왔다. 경찰은 총을 쏴 7명을 살해했다.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이에 대해 “총은 쏘라고 준 것 아닙니까?” 하며 발포는 문제없다고 했다.

독재정권은 부정선거 항의 시위를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몰아갔다. 시위 체포자를 남로당원으로 조작하고 살해당한 학생 호주머니에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쓰인 전단을 넣었다. 한국전쟁 이후 “‘도전할 수 없는 원칙’의 차원으로 승격”(김동춘)된 반공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부정선거를 무마하려는 속셈이었다.

피의 화요일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교복차림의 시체가 떠올랐다.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실종 27일 만에 발견된 것이다. 최루탄 겉면에는 ‘군중을 향해 쏘지 마시오’ 하고 적혀 있었다.

사람들의 분노가 다시 타올랐다. 3만 명이 시청, 경찰서, 파출소를 습격해 기물을 부쉈다. 15만 명이 모여 시위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시위의 성격은 부정선거 규탄에서 이승만 퇴진으로 나아갔다.

투쟁의 불길은 전국으로 퍼졌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3천여 명이 마산사건 책임자 처벌, 경찰의 학원개입 중지 등을 요구하며 서울 시내에서 시위했다.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정치 깡패들이 쇠파이프, 쇠갈고리, 삽 등을 휘두르며 학생들을 습격했다. 이 소식은 다른 학생들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4월 19일, 대학생은 물론이고 고교생, 여중생까지 나서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위를 벌였다. 자유당의 나팔수 〈서울신문〉 사옥과 반공연맹, 자유당 본부 건물은 불기둥에 휩싸였다.

사람들이 이승만이 있는 경무대로 향하자 경찰은 총을 쏘기 시작했고, 이내 거리는 시체와 피로 뒤덮였다. 계엄령이 선포됐고 저녁 7시부터 통행이 금지됐다. ‘피의 화요일’ 하루 동안 경찰은 1백11명을 살해했다.

이승만은 국무위원 총사퇴(21일), 이기붕 부통령 사퇴 ‘고려’(23일), 이승만 자유당 총재 사퇴(24일), 구속 학생 전원 석방(25일) 등 일련의 양보 조처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민중의 분노를 막기엔 너무 늦었다. 25일 대학 교수 수백 명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는 펼침막을 들고 서울 시내를 행진했다. 26일 다시 10만 명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초등학생들까지 “국군 아저씨들, 부모 형제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며 참가했다.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대법원장 조용순은 “4·19 시위는 순수한 운동”이라 했으며, 계엄사령관 송요찬도 “희생자는 나라의 보배”라고 했다.

독재자를 후원해 온 미국은 이 상황에서 “데모가 민중의 분노의 반영이라고 믿는다”(미국 국무장관 허터)며 이승만 사퇴를 종용했다. 4월 26일, 압제자는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민주당의 무능

자본가 야당인 민주당이 4월 혁명 이후 어부지리로 권력을 잡았지만, 자유당 못지않은 무능과 부패를 보여 줬다.

민주당은 혁명의 성과를 발전시키기는커녕 ‘굴러들어온’ 권력을 독식하려고 심각한 내분에 빠진다. 오히려 “혁명 과업은 완수되었으니 학생들은 학원으로 돌아가라”며 투쟁의 에너지를 잠재우려 했다. 이 때문에 민중의 불만은 매우 높았다.

그런 불만들은 혁명이 국가 권력을 이완시켜 만들어 낸 공간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혁신정당 운동, 학원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 등이 생겨났다.

이 과정에서 노동운동도 탄력을 받았다. 노동자들은 노조 민주화와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싸웠다. 1960년 1월부터 4월까지 쟁의는 60여 건이었지만 4·19 이후 12월까지는 4백54건으로 크게 늘었다.

1960년 한 해 동안 노동자들은 노조를 3백88개나 새로 만들었다. 노조는 총 9백14개로 전년(5백88개)에 비해 64퍼센트 늘었다.

이런 저항과 급진화 분위기를 억누르려고 민주당 정권은 데모규제법과 반공법을 도입하려 했고, 민중은 이에 다시 저항했다.

영감과 교훈

그러나 4월 혁명의 열기와 정신은 결국 박정희가 이듬해 5월 16일에 일으킨 쿠데타에 짓밟혔다. 민주당 정권이 혁명의 요구를 철저히 배신한 상황에서 박정희는 ‘혁명을 계승한다’고 내세워 혼란을 조장하면서 반혁명을 성공시켰다.

4월 혁명은 독재정권의 폭정에 맞서 자생적으로 발생했다. 정치적 구심 구실을 하는 조직은 없었다. 더구나 자본주의 생산을 멈출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노동자들의 집단적 투쟁이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군부 쿠데타에 취약했다. 이는 노동자 대투쟁이 민주화 운동을 뒷받침한 1987년의 상황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처음으로 민중이 독재자를 내쫓은 투쟁은 위대한 역사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특히,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않은 용기는 지배자들의 뇌리에 섬뜩한 기억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경제 위기의 고통을 노동자·민중에게 떠넘기며 갖은 반민주적 정책을 밀어붙이는 이명박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반세기 전의 투쟁은 여전히 많은 영감과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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