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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시위가 홍콩 정치를 바꾸고 있다

홍콩판 국가보안법인 ‘기본법 23조’에 반대하는 홍콩 대중의 대규모 시위가 입법을 연기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제 홍콩의 정치판도는 급속히 변하고 있다.

‘기본법 23조’란 중국과 통합 후 홍콩의 지역 헌법이 된 ‘기본법’ 안에 포함된 일명 ‘국가안전법’을 가리킨다. 1988년 최초로 ‘기본법’ 초안에 명시됐던 ‘국가전복죄’ 처벌 규정은 홍콩인들의 반발로 삭제된 적이 있다. 그러나 1989년 천안문 항쟁이 터지자 ‘국가전복죄’가 다시 삽입됐고 항쟁이 완전히 진압된 뒤 ‘국가 안전’과 관련된 7가지 처벌 규정이 23조 안에 정식화됐다.

2002년 9월 홍콩 자치정부는 23조 입법 방침을 정식으로 공표했다. 홍콩인들은 23조의 명백한 반인권적 내용에 분노했다. 홍콩 대중은 이러한 법의 제정을 원하지 않았다.

중국 중앙정부와 홍콩 자치정부는 7월 1일 대규모 시위로 나타난 대중의 열망을 처음에는 애써 무시하는 척했고, 나중에는 약간의 협박도 흘렸다.

7월 1일 시위를 조직한 민간인권전선이 입법회 포위 시위를 9일 개최하겠다고 발표하자, 홍콩 경찰총장은 “시위대가 6천 명 이상 참여하지 못하게 통제해 달라.…만일의 사태에는 개입할 수도 있다.” 하고 말하면서 지도부에게 압력을 넣었다.

한편 홍콩정부는 대중의 정서를 무마하기 위해 7월 7일 갑작스럽게 23조 입법 연기 결정을 발표했다. 하지만 막상 9일 저녁이 되자 경찰청장의 협박도, 정부의 연기 발표도 대중의 자신감과 분노를 조금도 꺾지 못했음이 드러났다.

평일 저녁이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직장이 끝나자마자 가족들과 함께 입법회 건물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최측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5만 명 이상이 입법회 건물을 빽빽하게 둘러쌌다. 대중의 기세에 놀란 23조 찬성파 의원들은 뒷문을 이용해 달아나야 했다.

이 날 시위는 7월 1일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분위기는 훨씬 급진적이었다. 한 집회 조직자는 홍콩인들은 이번 시위를 통해 “투표함으로 얻을 수 없던 것을 거리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고 논평했다. 홍콩 일간지 중 가장 친기업적인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마저도 “대중, 자신의 힘을 깨달으면서 즐거워하다”라는 제목을 뽑을 정도였다.

협박

확실히 이 날 이후 중국 중앙정부는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위 관료들이 홍콩으로 파견돼 수많은 홍콩 저명 인사들과 접촉했다. 그러자 중앙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 챈 일부는 시위가 계속 급진화하면 천안문식 진압을 부를 수도 있다며 사실상 협박을 하고 다녔다.

이런 협박은 운동의 중간계급 지도자 일부에게는 먹혀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대중 동원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중국 지배자들 중 “개혁파”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나 중국 중앙정부와 홍콩 자치정부는 인구 7백 만의 도시에서 50만 명이나 시위에 참가하게 만든 분노가 운동 지도부 중 일부를 회유한다고 해서 금방 수그러들지는 않을 것이란 점을 잘 알고 있었다.

7월 16일 행정장관 둥칭와[홍콩에서 쓰이는 광둥어 발음. 베이징어로는 둥젠화]를 제외하고 가장 미움을 받고 있던 두 명의 자치구 장관이 사임했다. 이것은 대중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타협책이었다.

하지만 중국 중앙정부는 이것이 타협으로 보이길 원하지 않는다. 이들은 홍콩이 대중 투쟁을 통해서 무언가를 쟁취했다는 선례를 남기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홍콩의 투쟁이 본토에 민주화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지렛대 구실을 하게 된다면 이는 중앙정부에게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 될 것이다. 이미 중국에서는 개방 정책의 희생자가 된 농민과 노동자 들의 시위가 빈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중앙정부가 바람 앞의 촛불 신세였던 둥칭와를 재신임한 것은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둥칭와는 재신임의 답례로 장관들이 사임을 발표한 그 날 23조를 반드시 입법하겠다고 다시 한 번 확인했다.

24일 보도에 따르면 입법을 위한 검토 과정은 예상보다 빠르게 9월에 시작될 예정이다. 홍콩 자치정부가 이렇게 서두르는 배경에는 중국 중앙정부의 압력이 작용한 듯하다. 〈경제통〉 23일치에 따르면 앞으로는 7명의 최고위 관료들이 홍콩의 통치 과정을 직접 감독할 것이라고 한다.

중앙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확신한 둥칭와는 약간 오만한 자세를 취해도 상관 없다고 마음먹은 모양이다. 그래서 홍콩 정부는 검토 과정에 앞서 23조에 관한 여론 조사를 별도로 하지 않겠다고 못박았다. 설상가상으로 이른바 “진보”나 “무소속” 입법의원들조차도 문제를 입법 절차에 관한 것으로 협소화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3조를 완전히 폐기할 수 있는 힘은 아래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홍콩인들은 오랜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25년에는 영국 식민당국을 뒤흔든 대규모 노동자 파업이 있었고, 1950∼60년대에는 식민지의 권위주의 정치와 저임금 착취 구조에 맞선 노동자·학생의 투쟁이 있었다. 1989년 천안문 항쟁 때는 무려 1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천안문 항쟁 지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물론 홍콩 대중만의 투쟁으로 중국 중앙정부를 이겨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중앙정부는 최근 사스 위기를 겪었는데도 아직은 꽤나 자신감에 차 있어 보인다. 이런 지배자들의 자신감을 뒤흔들 수 있는 것은 홍콩 대중과 본토 대중의 연대뿐이다. 중앙 정부는 이런 상황이 발생할까 봐 홍콩 시위 소식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그러나 본토의 많은 사람들은 이미 인터넷 등을 통해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앞으로도 홍콩 대중이 지금처럼 단호하게 싸운다면 본토 민중에게 커다란 정치적 자극을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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