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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새 학제개편안:
“시장이 선호하는” 대학 만들기

“비전2020은 인문학 말살 정책”

성균관대학교 곳곳에 문과대·사회과학부 교수들의 성명서가 나붙었다. 성명 발표에는 보직교수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교수들이 참여했다. 성균관대에서 문과대와 사회과학부 교수 집단성명은 20여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삼성경제연구소가 내놓은 학제개편안인 ‘비전2020’(이하 ‘2020’)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모집단위 광역화’와 ‘교수 성과주의 보상체계 도입’, ‘연구중심·대학원중심 대학’이다.

모집단위 광역화는 일부 단과대만 남기고 현재 인문사회·자연과학 단과대들을 문리대로 전부 통합해 신입생을 모집하고, 3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성균관대 당국은 모집단위 광역화가 ‘학과 간 장벽을 낮추고, 전공진입시기를 지금보다 늦춰 자신의 적성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제도라고 설명한다.

학부에서 취업과 전공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기초학문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배우고, 전공에 대한 이해가 충분한 상황에서 나중에 전공을 선택하는 것이 학생들에게 더 나을 수 있다.

비인기

그러나 그동안 학부제가 표방한 ‘학문간 상호교류를 통한 폭넓은 연구’라는 취지는 고착화된 학문 서열체제 속에서 빛이 바랬다. 기존 학부제 하에서는 대체로 취직이 잘 되는 인기 학과에 학생들이 몰리고 인문학 과들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또, 전공 인원을 제한하고 성적순으로 뽑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학생들은 기초 교양을 차근차근 쌓아 나가기보다는 인기 학과를 가기 위해 고등학고 4,5학년이나 다름없는 치열한 경쟁에 시달렸다.

그런데 ‘2020’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완화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어 문제를 답습할 공산이 크다.

뿐만 아니라, 성균관대는 ‘학문의 융복합’을 말하면서도 ‘인기학과’인 경영대는 학부 통합대상에서 제외했고, 의대와 약대도 학부에 그대로 남겼다. 그러니 ‘비인기학과’만 통폐합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을 만하다.

학교측은 “폐과는 없다”고 하지만, 동시에 “비인기학과는 과의 이름을 바꾸거나 자발적으로 통합할 수 있다”고도 했다. 이미 현행 학부제 하에서 성대 인문학 교수 숫자는 줄어들었고, 사회복지학과는 폐과 압력을 받고 있다. ‘폐과가 없다’는 말을 믿는 교수가 거의 없는 까닭이다.

교수들에게 성과주의 연봉제의 칼날을 들이대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이미 성대는 논문 개수로 교수들을 평가하고 있다. 정부와 학교가 정한 특정 학술지에 등재된 논문이 아니면 논문 취급도 받지 못하고, 영어 논문을 쓰지 않는 교수들은 살아남기 어렵다.

‘2020’ 반대 교수 성명에 동참한 사회복지학과 박승희 교수는 논문 개수로 교수를 평가하고 줄세우는 제도가 교수들의 연구력을 갉아먹었다고 주장한다.

“차분하게 이론적·사상적 통찰을 하려면 세월이 필요한데, 그게 될 수가 없어요. 선생님들이 [논문 개수를 채우는 데 급급해] 자신이 쓰고 싶은 책을 쓸 시간이 없어요. 이런 교수들은 무능 교수 취급받고 호봉에서도 차별받습니다.”

‘2020’은 교수 상대평가와 동료평가를 도입해 교수 간 경쟁을 더 강화하겠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교수들은 절대적 논문 개수에 집착해야 할 뿐 아니라, 다른 교수들보다 더 많은 논문을 써야 하는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박 교수는 교수들이 논문 점수 채우기에 몰두하는 동안 학생들에 대한 교육은 부실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 이런 상대평가 하에서는 다른 사람의 논문을 좋게 평가할수록 자신의 서열이 내려가기 때문에 공정한 동료평가가 진행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연구중심·대학원중심 대학’도 이미 김대중 정부 때부터 정부와 주요 대학들이 추진해 온 방향이다. ‘연구중심 대학’은 학부생들에 대한 교양 교육을 중심에 두는 ‘교육중심 대학’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새로운 부가가치를 생산해 기업 이윤 창출에 도움이 되는 연구 성과 위주로 대학원을 육성하는 것을 뜻해 왔다. 성대도 경쟁력 있는 10개 핵심분야를 집중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기존의 학부중심 대학이 이런 방향을 추구하면 학부 교육에 대한 투자는 약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기초교양을 탄탄히 쌓을 수 있게 하겠다는 학교측의 주장과 모순된다. 한편, 연구중심대학에서는 산학 협력이 강화돼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것이다. 그러면 기업의 입맛에 맞는 연구에 치중하게 될 것이다.

성대가 밝힌 ‘2020’의 목표 ― ‘시장이 선호하는 졸업생’, ‘기업평판도 아시아 Top10’, ‘수능 1퍼센트 학생 비중 30퍼센트’ 등 ― 는 이것이 결국 대학을 이윤 창출에 종속시키고, 대학·학문의 서열화에 적극 편승하는 새로운 이름의 대학 구조조정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2020’에 반대하는 성대 교수와 학생 들의 정당한 목소리가 경쟁지상주의 대학체제에 균열을 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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