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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60주년 ①: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

보수·우익 지배자들은 틈만 나면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사회통제를 강화하려 했다.

그리고 ‘북한 위협’의 ‘결정적 증거 1번’이 한국전쟁이었다. 우익은 한국전쟁을 체제에 대한 불만을 억누르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이용해 왔다. 이 때문에 한국현대사에서 해방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기간은 치열한 이데올로기 전장이기도 하다.

점령군 대장 맥아더와 친미주의자 이승만

우익은 한국전쟁이 공산 침략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방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상당수 좌파는 한국전쟁을 모종의 민족해방 전쟁이나 혁명전쟁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두 주장 모두 틀렸다. 한국전쟁은 당시 미국과 소련이 벌인 냉전 경쟁의 산물이었다. 전쟁을 벌인 두 진영 모두 자유와 인권, 또는 해방의 주체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이 우익 정권이고, 이들이 한국전쟁 60주년을 계기로 각종 안보 캠페인을 벌여 사회를 오른쪽으로 이끌려 하느니만큼, 이 글에서는 우익의 위선을 들춰내는 데 좀더 비중을 두겠다.

뉴라이트는 분단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미국이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자고 소련에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한반도 전체가 … 공산화의 운명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38도선은 단순히 한반도의 분할을 불러온 것이 아니라, 자유, 인권, 시장 등 인류 보편의 가치가 미국군을 따라 한반도에 상륙한 북방한계를 나타내는 선이었던 것이다.1)

분단 때문에 생긴 수많은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역사인식이다.

애초 소련군의 대일본전 참전을 요구한 게 미국이었다. 미국은 참전 대가로 소련에게 중국 동북부의 이권을 제공하기로 했다. 물론, 원자폭탄 개발 이후 소련에 한 약속을 후회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38선을 그어야 할 상황을 만든 것도 미국 자신인 셈이다.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을 막으려고 38선을 제안했고, 소련은 향후 일본 점령에서 지분을 얻으려고 38선 제안을 불만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한반도에서 벌어질 온갖 고통과 재앙의 씨앗이 뿌려졌다.

앞서 뉴라이트가 미군을 따라 남한에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목록 중 앞의 것 두 개 — 자유·인권 — 는 미군의 상륙 휴대품 중에는 포함되지 않았고, 나머지 한 개 — 시장 — 는 조선 민중이 바라지 않은 것이었다.

민중이 원하지 않은 분단

미국이 세운 이승만 정권은 “자유”나 “인권”과는 아무 상관 없었다. 예를 들어, 1949년 강원도에서 미국은 남한군이 공산주의자 40여 명을 살해하는 것을 목격했는데, 놀랍게도 남한군은 그들을 총검술 훈련용 표적으로 삼아 죽이고 있었다.2)

한국전쟁이 벌어지기도 전에 경찰과 군대, 우익 폭력단체들은 벌써 남한 주민 수만 명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1948년 제주항쟁에서만 3만여 명이 살해됐다. 미국은 이런 극악한 자들의 뒤를 봐줬고, 필요하다면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시장이 인류보편적 가치라는 주장을 당시 조선 민중이 들었다면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당시 여론조사를 보면, 조선 민중은 모종의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를 통해 새 국가가 건설되길 원했다.

미국이 강요한 ‘자유주의’ 경제정책은 노동자들의 민주적 자주관리 운동을 부정했고, 곡물 공급의 자유시장화는 식량배급 체계를 교란시켰다. 도시 주민은 굶주렸지만, 지주와 악덕상인은 배를 불렸다. 기아가 만연했음에도 일본으로 쌀 수출은 계속됐다.

물론, 소련이 세운 북한 체제 역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소련 역시 노동자자주관리 운동을 부정했고, 인민위원회는 자치적 성격을 잃은 채 소련 정책의 전달벨트로 전락했다. 소련의 지령에 따라 진행된 ‘인민민주주의 혁명’ 결과 북한에서는 국가가 자본축적을 관장하는 체제가 성립됐다. 식민지 시절 김일성이 민족해방 투쟁을 한 것은 맞지만, 또 다른 제국주의 세력인 소련에는 매우 의존적이었다.

두 분단 국가의 탄생은 냉전의 산물이었다. 조선 민중 누구도 이런 식의 분단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열강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이익 때문에 누구도 통일정부 수립에 열의가 없었고 대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각각의 꼭두각시들을 내세워 분단 정부 수립에 몰두했다.

남한 우익은 김일성의 호전성만 부각하지만, 사실 남·북 정권 모두 상대방을 진정 타도하고 싶어 했다.

1949년 들어 김일성은 무력으로 국토를 통일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전쟁 지원을 끊임없이 요청했다. 모택동에게는 중국군 소속 조선인 부대를 넘겨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즈음에 스탈린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이승만의 무력 통일의지 또한 김일성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이승만이 정말로 북침을 감행할까 봐 미국이 노심초사할 정도였다. 브루스 커밍스가 적절히 묘사했듯이 “이승만은 종종 주인이 줄을 잡고 있는데도 목걸이에 걸려 거의 질식할 정도로 뛰어나가려고 발버둥치는 사냥개처럼 보였다.”3)

게다가 1949년 여름까지 군사력은 남한이 우월했다.4) 이승만은 38선 도발과 더불어 (북한과 마찬가지로) 게릴라를 침투시켜 각종 암살, 파괴 행위를 저질렀다. 이 무렵 남과 북이 벌인 38선 충돌은 각각 자신의 상전에게 통일전쟁을 지원해 달라는 일종의 시위 성격이 강했다.

서로 으르렁거리던 개들의 목줄을 먼저 놓은 쪽은 스탈린이었다. 1950년 1월에 스탈린은 동아시아 정책을 더욱 공세적으로 전환했다. 스탈린은 1945년 이래 승인하지 않고 있던 베트남의 호치민 정권을 공식 승인했고, 일본공산당의 ‘평화혁명 노선’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미국에 맞서 과감하게 투쟁하라고 촉구했다.

스탈린의 이러한 전환에는 이 무렵 급격히 뜨거워진 냉전이 배경이 됐다. 소련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해 미국의 핵독점이 무너지자 미국의 소련 봉쇄정책은 더 공세적으로 됐다.

호전적인 남북정부

특히, 아시아에서 냉전은 더 뜨거워졌다. 미국은 마오쩌둥이 중국을 석권하자, 동아시아 전략의 중심을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꿨다. 미국은 소련을 무시한 채 일본과 단독강화를 추진하고, 과거 군국주의자들을 복권시키고, 일본을 재무장시키기 시작했다.

이에 대응해 소련은 1950년 2월 중소동맹을 맺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미일 단독강화]를 저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 미국은 마오쩌둥이 최종 승리하자 소련과 중국 사이를 이간질해 소련을 고립시키려는 이른바 ‘쐐기전략’을 구사했는데, 이는 오히려 스탈린의 대미 경계심을 강화해 주었다.

스탈린이 김일성의 전쟁을 승인할 즈음, 트루먼 역시 새로운 전략을 구상했다. 이에 따라 이른바 NSC 68이 등장했다. 이는 소련진영에 대한 봉쇄와 더불어 ‘롤백’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훗날 애치슨은 “한국전쟁이 우리를 구했다”고 한 적이 있는데, 한국전쟁이 미국의 군비를 대폭 증강할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미국은 소련과 본격적인 군비경쟁에 돌입했고, 서방진영을 결속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얼마 전까지 조선을 지배했던 일본을 ‘반공을 위한 동맹’이라고 선언했고, 미-소 간 3차대전을 일으켜 본토로 귀환하겠다는 망상을 품은 장제스와 함께 태평양군사동맹을 주창했다. 장제스의 핵심 측근 샤오유린은 한반도를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최적의 장소로 생각하고는 적극적으로 분쟁을 조성해야 한다고 장제스에게 권유했다. 어쨌든 맥아더는 이승만-장제스 듀엣의 ‘북벌’ 합창을 경청해 주었고,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더욱 공세적 태세를 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식으로 동북아시아에서 긴장은 급상승했다. 장군멍군 식으로 긴장이 고조되는 과정은 미국과 소련 모두에 책임이 있었다.

뜨거워진 냉전

그런데 스탈린은 이즈음 동북아시아에서 정세가 미국보다는 소련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고 생각한 듯하다. 소련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고, 결정적으로 마오쩌둥이 중국을 석권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한반도 같은 작은 땅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개입하려 할까? 장제스가 무너져 내릴 때, 미국은 개입하지 않았다.

게다가 애치슨은 남한을 자신들의 직접 방위선에서 제외한 선언을 막 발표했다. 비록, 애치슨 선언이 미국으로서는 ‘전략적 유연성’을 표명하는 것이었지만, 스탈린은 이를 미국 봉쇄선의 한계 표명으로 여긴 듯하다. 그리고 실제 남한에서 미군은 철수한 상황이었다. 혹시 미국이 개입한다 해도 소련은 미국과 직접 충돌을 피할 수 있다. 중국군이라는 보험이 생겼기 때문이다.

결국, 남한 침공은 성공 확률이 높아 보였고, 소련이 져야 할 위험부담은 크지 않아 보였다. 김일성이 성공한다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신은 크게 떨어질 것이고, 미국은 전반적으로 수세에 몰릴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전면적으로 남진했다. 남한군은 패주를 거듭했다. 미군사고문단이 보기에 “남한군은 저항 능력이나 싸우려는 의지가 없으며, 총체적인 붕괴가 임박했다.” 평소 남한군 고위 장교들은 일본도를 차고 다니면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기생집에서 허풍떠는 데는 유능했지만, 정작 북한 정규군을 저지하는 데서는 무능했다.

이승만은 “국군이 북진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몰래 야반도주했다. 서울의 고위층과 부유층은 공황에 휩싸였다. 국회는 서울 사수를 결의했지만, 국회의원들은 결의문이 낭독되기 무섭게 짐을 싸들고 도망쳤다. 심지어 이승만은 피난민들로 가득 찬 한강철교를 폭파시켜 버렸다. 수백 명이 한강에 떨어져 죽었다.

이 혼란의 와중에도 이승만은 잠재적으로 북한에 협력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치범들과 보도연맹원들을 대량 학살했다. 10만∼30만 명이 살해됐다.

북한군이 남진했을 때, 이승만을 돕기 위해 궐기한 남한 주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일부 주민들은 북한군을 적극 환영했다. 북한을 지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만불손한 독재를 자행해 온 이승만 … 이놈이 한 번 혼이 나면 얼마나 통쾌할까?”5) 하는 심정도 들었던 듯하다.

이승만이 기댈 곳은 오직 미국뿐이었다. 그리고 미국이 즉각 개입을 선언하자 그는 안도의 한숨과 더불어 북한의 침공이 어쩌면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각주

1)교과서포럼,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기파랑, 2008, p137 [본문]

2)김기진, 《한국전쟁과 집단학살》, 푸른역사, 2006, p118 참조. [본문]

3)브루스 커밍스·존 할리데이,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태암, 1989, p36. [본문]

4)정병준, 《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돌베게, 2006, p332. [본문]

5)김동춘, 《전쟁과사회》, 돌베개, 2000, p105에서 재인용. [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