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일부터 12일까지 한국의 퀴어문화축제가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퀴어문화축제는 매년 전 세계적으로 6월(오스트레일리아는 2월)에 열리는 동성애자들의 축제다. 우리 나라는 올해로 11회째를 맞이했다.
퀴어문화축제를 맞이해 성 해방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살펴보는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활동가 콜린 윌슨이 러시아혁명과 성 해방의 관계를 살펴본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게이와 레즈비언의 삶을 변화시켰다. 러시아는 사상 처음으로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노동자, 가난한 사람, 억압받는 사람들의 등대가 됐다.

낡은 사회 질서를 날려버린 혁명 과정 자체가 성 해방과 진정한 평등을 가능케 했다.

혁명이 이룬 변화를 이해하려면 1917년 이전에 러시아가 어땠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수백 년 동안 대다수 사람들은 작은 마을의 농민으로 땅을 일구며 살았다. 1861년까지 대다수 농민들은 귀족 소유의 농노들이었다.

러시아는 짜르가 통치하는 독재국가였다. 짜르에 반대하는 자들은 혹한의 땅 시베리아로 유배됐다.

러시아인 가운데 극소수는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예컨대 셰레미쩨프 가문은 농노 20만 명을 거느렸고 시중드는 하인만 3백40명이었다.

성은 폭력적이고 억압적이었으며, 교회와 국가가 성적인 행동 일체를 통제했다.

동성애는 불법이었다. 동성 간에 성관계가 있었다는 증거들은 있지만, 주로 상류층 지주가 남성 하인 또는 농노와 맺은 불평등한 관계였다.

귀족 여성들은 남편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돌아다니거나, 일하거나 공부할 수 없었다. 농민들에게 결혼은 생존을 위한 방편이었다. 부인이 하는 일은 남편의 밭일을 돕고 아이들을 낳는 것이었다.

가정 폭력은 공공연했다. 러시아 속담 중에 이런 것도 있었다: “도끼 자루로 아내를 때려눕힌 뒤 아내에게 숨이 붙어 있는지 확인하라. 숨이 붙어 있다면 아내는 엄살을 피우고 있을 뿐, 사실은 더 때려주길 원하는 것이다.”

변화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 러시아 사회는 변하기 시작했다. 당시 황제였던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제를 폐지했다. 그럼에도 러시아에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없었고, 끔찍한 불평등도 여전했다. 산업화로 모스크바, 상트 페테르부르크(1914년 페트로그라드로 개칭) 같은 지역에서는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됐다.

1870년대부터 급진 운동들이 성장하면서 여성과 성에 대한 새로운 사상이 확산됐다.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는 새롭게 등장한 운동의 성경처럼 됐다. 이 소설은 부르주아 부모에게서 벗어나고자 허위 결혼을 하는 베라 빠블로브나의 이야기를 다룬다.

소설은 베라의 꿈을 독자들에게 전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더는 부와 가난이 존재하지 않고,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고, 사람들이 스스로 무슨 일을 할지, 어떤 관계를 가질지를 결정하는 이상적인 사회가 묘사된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러한 사상에서 영감을 얻었다.

도시화는 성적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도시에서는 소작농과 같은 방식의 결혼이나 가족 생활이 적합하지 않았다.

동성애 하위문화(“동성애자들의 작은 세계”라고 불린)도 생겨났다. 게이들은 공원이나 공중 화장실에서 성관계를 가졌다. 부유한 게이들은 웨이터, 하인, 군인, 공중 목욕탕의 성매매 남성 등과 은밀한 관계를 가졌다.

레즈비언들의 삶은 더 힘겨웠다. 그나마 부유한 레즈비언들은 문학 클럽 등 상류 사교 모임에 갈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그곳에서 다른 부유한 레즈비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계급 레즈비언들의 삶은 고달팠다. “코쉬키”(노동계급 레즈비언들을 폄훼하는 말로서 ‘암고양이’를 뜻한다)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사창가였다.

성장하는 노동계급은 혁명 운동에서 핵심 구실을 했고, 여성들의 구실도 점차 커졌다.

1905년에 혁명이 일어났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1917년 혁명은 성공했고, 볼셰비키는 10월에 권력을 잡았다.

“여성 노동자들이여, 소총을 들어라”?1917년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 여성들에게 무장을 호소하는 볼셰비키 포스터.

법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평등해졌다. 누구든지 원하면 이혼할 수 있었고, 성적 행위를 교회가 통제하는 것이 폐지됐고, 낙태가 합법화됐다.

1917년 혁명은 동성애자들의 삶에도 커다란 변화를 몰고 왔다. 1922년 형사법에서 성 행위에 관한 규정은 모두 삭제됐다.

이제 성 범죄는 오직 개인의 “생명, 건강, 자유, 존엄성”을 침해하는 행위로만 규정됐다.

완전한 자유, 평등, 진정한 우정 등의 생소한 관념에 기반을 둔 인간 관계들이 곳곳에서 꽃을 피웠다.

이러한 제도적 개혁은 달라진 사회 현실을 반영했다. 소작농 여성들은 남편들이 구타하면 이혼하겠다는 내용의 노래를 불렀다. 법원은 레즈비언 커플의 결혼을 승인했다.

물론 일부 고질적인 편견과 관행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오래된 통념을 타파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여성, 동성애자, 노동자 들이 실질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분투했다.

예컨대 공동 식당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도입됐다.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는 동시에 여성들을 가사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공동 식당의 목적이었다. 내전[1918∼1921년] 기간에는 수도[페트로그라드]에 있는 모든 아이들에게 무상급식이 실시됐고, 어른들도 대부분 공동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성매매는 더는 범죄행위가 아니게 됐다. 혁명 정부는 성매매 여성들에게 생활 지원, 의료 혜택, 재취업 훈련을 제공하기 위한 협동조합을 설립했다.

‘모스크바 성 위생 협회’ 책임자 그리고리 밧키스 박사는 1923년에 소비에트 대표단을 이끌고 베를린에서 열린 ‘성적 자유를 위한 세계 연맹’ 회의에 참가했다.

밧키스는 소비에트 사회의 노선을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소비에트 법은 … 타인의 이익이 침해 당하지 않는 한, 개인의 성생활 문제에는 국가와 사회가 절대 간섭하지 않음을 선언한다.”

“동성애, 항문 성교 등 다양한 성적 욕구 충족 형태들은 유럽 국가들의 법에서는 공중도덕에 반하는 범죄로 명문화돼 있지만 소비에트 법에서는 이른바 ‘자연스러운’ 성교와 완전히 동등하게 취급된다.”

러시아 혁명이 이룩한 성과들 중 다수는 아직까지도 많은 나라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예컨데 영국은 낙태와 이혼이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 동성애는 1967년까지 불법이었고, 1993년이 돼서야 겨우 ‘정신 건강 [유해] 항목’(mental health register)에서 삭제됐다. 또한 동성애를 범죄시하는 차별적 법률들이 금세기 초까지 영국의 법령집에 많이 남아 있었다.

러시아에서 그 모든 진보가 가능했던 것은 볼셰비키의 포고령 덕분이 아니었다. 바로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대다수 사람들이 스스로 사회를 변혁했고, 스스로 사회를 운영하는 주체가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경제 발전 수준이 미약해 사회주의를 지속시키기에는 너무도 가난했다.

볼셰비키는 혁명이 선진국으로 확산하기를 기대했다. 무리한 기대는 아니었다. 1919년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는 “유럽 전체에 혁명의 기운이 가득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급진화가 혁명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더욱이,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 노동자들은 갓 태어난 사회주의 사회를 파괴하려고 작정한 차르의 추종자들과 외국 군대에 맞서 몇 년간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로 인한 희생은 엄청났다. 수많은 아이들이 집을 잃었고, 노동계급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혁명의 지연

볼셰비키는 신경제정책(NEP)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더 발달한 국가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권력을 잡고 있기 위해서였다. 신경제정책으로 자본주의가 부분적으로 재도입됐다.

식량 생산을 위해 농민들에게는 돈이 지급됐다. 그러나 재정난 때문에 공동식당과 보육시설은 폐쇄되었고 이 때문에 여성들이 일자리를 갖기는 더 힘들어졌다. 성매매가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옛날 습관들이 차츰차츰 되돌아오고 있었다. 문제는 가난과 후진성이었다. 농민들은 결혼한 부부를 중심으로 가계를 꾸려야 했기 때문에 이혼에 호의적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볼셰비키는 남녀를 가족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려 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가족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국가는 [가족을 떠난] 여성에게 인간다운 생활수준을 보장해 줄 재력이 없었다.

요시프 스탈린은 이러한 고립과 빈곤을 배경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1917년에 스탈린은 상대적으로 비중 없는 인물이었지만 이제 그는 러시아의 후진성을 해결하려면 노동자와 농민을 더 쥐어짜야 한다고 믿던 신흥 계급을 대변하게 됐다.

일과 생활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통제가 갈수록 심해졌다.

차르 체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주된 구실은 출산으로 여겨지게 됐다. 자녀 일곱 명을 낳은 여성은 국가의 돈을 받았으며 열한 명을 낳은 여성은 더 많은 돈을 받았다.

스탈린 정부는 낙태를 금지했고 이혼을 더 어렵게 만들었으며 동성애를 다시 불법화했다. 게이들은 최고 8년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동성애는 다시 비밀스러운 것이 됐으며 자살이 부쩍 늘어났다. 1934년에는 모스크바 등의 도시에서 동성애자들이 대량 검거되기도 했다.

스탈린의 러시아와 나치 독일이 전쟁중에 서로를 비방할 때도 동성애를 비하하는 표현들이 동원됐다. 히틀러는 동성애를 “공산주의적 퇴폐성”으로 묘사했고 스탈린은 “동성애를 근절하면 파시즘도 사라질 것”이라 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사회주의를 배신했다고 해서 볼셰비키가 대변하는 혁명 전통이 조금치라도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니다.

볼셰비키는 더 나은 세계를 위한 투쟁과 성 해방을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으로 바라봤다.

출처: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